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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왜 산상수훈인가?

by 한종호 2015. 3. 22.

한종호의 너른 마당(13)

 

왜 산상수훈인가?

 

 

산상수훈’은 파격적이다. 성전에서 선포한 이야기가 아니라 산에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대목도 눈을 끌거니와, 그 내용도 통상의 유대적 종교성을 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여전히 파격적이다. 산상수훈대로 설교하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논리를 오늘의 교회가 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세가 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돌 판에 율법을 새기는 장면은 산상수훈과 그대로 겹친다. 산상수훈은 그런 면모에서 히브리 신앙 전통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건 다름 아닌 광야의 야성적(野性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의 복원이다. 이미 기득권으로 무장되어 있고, 교리가 되어버린 성전과는 구별된 공간으로 산은 지목된다. 산상수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 성전이 아닌, 바로 이 야성적 생명력이 훼손되지 않은 공간에서 성전의 율법과 대치되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전선을 이루고 있다.

 

산상수훈, 새로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이로써 산상수훈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의 대세와 투쟁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주의를 거부하는 것과 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그토록 거룩하게 여기는 성전보다 산을 우위에 놓는 방식은, 말씀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과 이어진다. 산상수훈은, 기존 교회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으로서의 효력을 잃어버렸다는 논증과 동일하다.

 

예수 당대의 교회는 산상수훈 앞에서 반격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들의 정교한 신학과 오랜 세월 다져놓은 교리가 이로써 단숨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를 느끼게 마련이다. 성전 밖에서 새로운 권위가 옹립되는 것을 그저 방관할 수만은 없다. 산상수훈은 그래서 새로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건 성전의 권력과, 광야의 생명이 충돌하는 상황이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 이전, 세례 요한은 바로 이 광야의 생명을 대변하고 있다. 기존의 성전세력은 진작부터 도전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산상수훈은 이 도전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임을 입증하는 육성이다.

 

기존의 성전을 지배한 자들과, 산의 사람들은 일대 자웅을 겨루게 된다. 지금까지의 대세는 당연히 성전파였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이제 그 주도권이 성전을 떠나고 있음을 알린다. 모세를 부인할 수 없는 성전파들은, 새로운 모세로 등장한 예수를 공격하고 싶어 하지만 산에 오른 그의 모습 자체를 공격하기는 쉽지 않다. 무수한 예언자들이 산에서 하나님과 만나 생명의 말씀을 토했다는 전통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성스러운 뿌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면모 때문에, 산상수훈의 현장은 성전을 본질적으로 압도하고 있다. 성전파들은 성전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보다 부차적인 가치를 갖는다. 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스스로 유대 예언자 전통 모두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위험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얼마나 놀라운가? 예수의 전략이.

 

산상수훈은 히브리 신앙 전통 전체를 본질적으로 압축하는 공간을 보루로 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선을 결집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팔복’의 마지막은 전투적 비장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Bloch-SermonOnTheMount" by Carl Heinrich Bloch>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복음 5:11-12).

 

이렇게 보니, 너무나 분명치 않은가? 산상수훈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위한 전투의 전야에 자신과 생사를 같이 할 자들에게 닥쳐올 성전파들의 공세에 대한 당당한 대응과 자신감, 그리고 궁극적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놓치고 말면 산상수훈은 단지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생동감을 배제한 팔복(八福)의 선언이라는 교리적 해석으로 그치고 만다.

 

성전에 머무를 곳이 없고, 광야로 내어 맡긴이들이 “산 사람들”이 되어 그들 가슴 속에 불타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려는 열정이 이 산상수훈에 있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웅대함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예수는 이 산상수훈이 히브리 예언자 전통과 그 맥을 함께 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은 자신들이 뿌리로 내세우고 있는 히브리 전통에 대한 배신이 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결국 산상수훈은 당대의 현실에서 매우 위험한 문서가 된다. 그건 그저 편안하게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감동을 받고 아멘! 하면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산상수훈을 내세우면 그는 산 사람이 되는 것이며, 성전파의 기득권과 맞서야 하며 박해의 위험부담을 지는 운명에 처한다. 예수가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은 까닭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산상수훈은 ‘혁명의 선언’

 

오늘날에도 이 산상수훈은 그래서 기존의 교회가 상실해버린 말씀의 효력에 대해 대단히 신랄한 비판이 된다. 성전의 거룩함만을 주장하며, 산으로 상징되는 이 전투적인 문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건 이미 예수를 대적한 세력과 유사한 입장에 서게 되는 일이다. 어쩌면 성전은 구원의 능력을 잃었을지 모른다. 산상수훈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성전의 교리를 해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기존 교회의 처지에서 불편한 일이다.

 

그러기에 성전파는 산상수훈을 각색한다. 팔복으로 각색한다. 본래의 전투성과 혁명적 선포의 힘을 빼버린다. 산과 성전의 대치전선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산상수훈은 그런 과정을 거쳐 유순한 양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다. 예수를 순치(馴致)시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이빨을 뽑고, 발톱을 빼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기복주의 문건으로 왜곡하고 변조해버린다. 광야의 야성을 박탈해버리고 만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그 파격성을 절감한다. 성전의 논리대로 하자면,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믿으면”이라는 전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산상수훈을 아무리 되풀이 읽어도 이러한 구절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무조건적인 신앙을 앞세워 하나님의 자녀 운운으로 윽박지르는 논법은 찾아볼 수가 없다. 뿐만이 아니다. 히브리 성서를 그 어디에도 인용해서 자신의 전거(典據)로 삼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설교에서도 방법론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산상수훈은 그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습과 자세에 눈을 돌린다. 믿고 있는가, 아닌가를 묻지 않는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이라는 전제 없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이들을 열거하는 방식은, 사실 유대적 율법주의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는 이들을 지목하는 것이 된다. 아무리 마음이 착해도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없으면, 그는 구원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성전의 논리이다. 아무리 마음이 맑고 깨끗해도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나 교리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열외(列外)이다.

 

산상수훈 앞에서 무력해지는 ‘현란한 신학’과 ‘엄격한 교리’

 

‘마음이 가난하다’, 그건 마음이 절박하고 갈망이 넘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세의 풍족함에 취해 자신이 복 받았다고 여기는 이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들의 눈으로 볼 때 이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는 복에서 비껴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예수는 마음속에 깊은 공허함과 그로 인한 열망이 식지 않은 이들이 진정 하나님 나라를 목말라하고 있다고 밝힌다.

 

당연히 아파하며 슬퍼할 일에 무심하고 무정한 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외치고 신앙을 고백해도 그건 소용이 없다고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웃에 마음을 진심으로 쏟고 그들의 고난에 애통해 하며 그로써 무언가 일을 이루어내는 마음을 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열린다는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그로써 정의를 이룩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이는, 그가 말로 신앙을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그 존재와 행위 자체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로써 복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고 쟁투를 벌여야 하는 지 명확하게 논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종교성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믿음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를 주목하지 않는다. 교리적 지식이 풍성한 가 아닌가를 또한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 정의와 평화, 자비와 사랑, 온정과 맑은 정신,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있는가의 여부를 주시한다. 모든 신앙적 위선을 배격하고, 그 존재 내부의 심연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는 인생과 역사의 열망을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으로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선언 앞에서 그 현란한 신학과 엄격한 교리는 무력해진다. 성전의 지도자인가 아닌가가 무색해진다. 자신이 정통이다 아니다의 논쟁도 무의미해진다. 그러한 것들은 전부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 지배욕을 위한 논리이자, 위선을 은폐하는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 그로써 증명되는 하나님의 자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를 일깨우고 있다.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사랑과 평화, 정의와 자비에 자신을 쏟는 이가 진정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아름다운 사람인 것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다.

 

산상수훈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주체들’

 

그러기에, 이 산상수훈은 오늘날 성전 안에서 자기출세를 위한 신학에 매달리는 자들과 대적한다. 신앙이 깊다고 하면서 인정머리 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선고한다. 종교를 내세워 전쟁을 정당화하는 자들을 통박한다. 그와 함께, 박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있다. 자비심이 깊어 이웃을 돕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적통 승계자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들이 때로 비록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건 사실 예수의 이름을 위해 일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변증하고 있다.

 

인권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교회에서 쫓겨난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교회로부터 배척당한다. 노동자와 농민, 빈민을 위해 발언하는 자들이 축출 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산상수훈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결국 복을 받는다. 역사에서 궁극적인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그리하여 ‘혁명의 선언’이다. 성전의 기득권과 정의와 평화를 압살하는 일체의 권력과 사상에 맞서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외치는 “예수의 선언(Manifesto)”이다. 아멘!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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