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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조선일보>의 달관할 정도가 되었다?

by 한종호 2015. 3. 31.

한종호의 너른 마당(14)

 

<조선일보>의 달관할 정도가 되었다?

 

 

<조선일보>가 지난 2월 말부터 ‘달관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내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달관이라니? 절망하고 있는데”라는 반론부터, “새로운 행복관을 가진 세대의 등장”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달관세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오늘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고 있는 청년세대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시선 문제가 놓여 있다. 그에 더해 어떻게 청년들이 뜻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인가라는 사회적 과제에 대한 문제제기다.

 

달관세대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차용한 개념으로, 사토리(さとり)란 ‘득도, 깨달음’으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일본에서 태어난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일본 청년들이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며 그걸로 삶의 만족을 느낀다는 의미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직접 보도 보자. 아래 기사는 2월 26일 자 사회부 김강한 기자의 글 “‘행복하다’는 달관세대… 그들을 보는 불편한 視線(시선)” 일부이다.

 

달관세대의 원조는 장기불황·저성장의 일본 사회에서 등장한 ‘사토리(さとり·깨달음) 세대’다. 4~5년 전 사토리 세대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 기성세대의 반응도 비슷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현상을 타개하려는 도전도, 미래를 위한 분투도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사토리 세대’는 이제 일본 사회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회현상이 됐다.

 

이번 취재의 계기는 일본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壽)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이었다. 사토리 세대를 다룬 책이다. 우리 사회도 비슷한 유형의 젊은이들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취재였는데, 실제로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행복을 느끼는 20~30대 달관 세대를 만날 수 있었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직장’ 등을 행복의 요소로 여기는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은 적은 수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만족을 추구하고 있었다.

 

 

             2월 23일자 <조선일보> 11면

 

 

그런데 달관세대 기사에 대한 적지 않은 비판을 의식해 이에 대해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지의 보도는 그들을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유형의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기성세대가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만큼이라도 나라가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보기에, 달관 세대가 말하는 ‘행복’을 선뜻 수긍하기 힘든 면이 있다. 한국에서 달관 세대가 등장한 것은 우리 사회가 저성장, 장기 불황의 일본 행로를 따라가기 시작한 시점이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달관 세대의 “행복하다”는 말을 모두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운 것 같다.

 

낙관적인 달관 세대론를 펼치다가 한발 물러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칼럼들은 기조를 달리하고 있다. 3월 7일자 한현우 문화부 차장의 글 “‘達觀(달관) 세대’ 속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의 일부 대목이다.

 

대기업·정규직·고소득 같은 기성세대의 가치를 버리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 ‘달관(達觀) 세대’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반가웠다. 기성 가치를 맹종(盲從)하다가 한 달에 88만원밖에 벌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낙담해서 폐인이 되는 것보다야 ‘적게 벌고 적게 쓰겠다’고 마음먹는 게 훨씬 낫다. 물론 그보다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잘하는 일을 하다 보면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돈 벌고 존경도 받는 사례를 무수히 봤다. 가장 좋은 예는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다.

 

‘달관 세대’의 등장은 '남들보다 앞서가는 법'만을 가르쳐 온 한국 교육의 상처가 곪아 터지기 시작한 것으로 봐야 한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다. 그것만이 옳은 것처럼 가르치는 게 잘못이다.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에서까지 젊은이들을 직진 주로(走路)로 몰아세운다. 모든 사람에게 1등을 하라고 가르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1등이 되지 못해 좌절해야 하는가.

 

‘달관 세대’를 두고 기성세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성공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국가 성장 동력이 저하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쓸데없는 걱정 같다. 달관 세대는 삶을 포기한 세대가 아니라 기성의 가치, 정확히는 '못살던 시대의 가치'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세대다.

스티브 잡스는 젊은이들에게 “애인을 찾는 것처럼 직업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달관 세대는 부모가 권하는 직업 대신 애인 같은 직업을 찾는 세대다. 그들 가운데서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나올 것이다.

 

1등을 목표로 몰아쳐오던 <조선일보>의 이런 시선과 태도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침체된 사회의 미래 앞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가 보이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 청년들의 앞날을 보는 것도 마냥 탓할 일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가 그토록 치열하게 강요해온 행복론, 성공, 처세 등의 논법에서 이탈하고 있는 세대의 등장이란 중요한 가치변화의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만의 성공이라는 개별적 가치관을 실현하는 삶을 선택하려드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환영할 일이다. 또한 이들이 현실의 기득권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목표와 가치에 대한 득도의 경지에 이르러 그렇게 한다면 이야말로 괜찮은 변모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진단과 전망과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 있어서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론은 허구가 된다. 왜 그런가?

 

우선 오늘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들 청년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성세대 역시도 꿈쩍도 않는 권력의 아집과 기득권의 철통방어 앞에서 좌절감이 깊어지고 있다. 그런 현실은 달관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체념과 절망을 키우고 있다. 그러니 이런 현상을 짚어보고, 이렇게 되어가는 까닭을 분석해야 옳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그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현상의 뿌리를 찾아가면 박근혜 정권의 무책임과 이 나라 보수 기득권의 탐욕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이들 세대들은 기성의 가치관과 다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예 그럴 수 있는 물적 기반 자체가 없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지경에 몰려 있는 판국에, 달관이라…? 아니, 그런 현실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달관하라,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 아닐까? 다른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은데 너만 그렇게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 아닌가? 청년 세대 대다수가 ‘미생’의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위로와 활로를 마련해줄 생각은 않고 난데없이 달관세대라니? 듣는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일이다.

 

기성의 가치관에서 이탈해서 새로운 방식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글들은 또 다른 성공주의 논법이다. 못살던 시대의 가치라…? 그렇다면 지금은 풍요하다는 말인가? 빈부격차가 더욱 심각해지고 사회적 양극화가 손댈 수없는 지경으로 몰아쳐가고 있는데 그런 현실에는 눈을 감으라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의 달관세대론은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을 제거한 채,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식의 이기적 세대를 길러내는 주장이 되기 첩경이다. <조선일보>의 달관세대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삶’ 외에는 없다. 정치가 파행을 겪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적 부정의와 국가적 무책임이 확대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논란을 제기하고 패기 있게 도전하라고 일깨우지 않는다. 그냥 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봐, 그게 전부라 말한다. 그러고는 이걸 ‘달관’이라고 부른다. 이런 기만이 어디 있는가?

 

한때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고통에 빠진 청년세대를 기만했던 어느 교수가 있었는데, 이제 <조선일보>는 ‘너 달관해, 그게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청년의 모습이지’ 하고 있다. 무기력해지고 좌절감에 빠지고 있는 청년 세대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은 전혀 거론하고 있지 않고 이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이 달관이라는 이름 아래 적당히 김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면 청년세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분노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잘 먹고 잘 살면서 ‘너는 달관이 안 되서 그래, 하는 세력들을 향해 그게 뭔 소리야? 하고 고함을 질러야 한다. 문제제기 없이 교정되는 모순은 없다. 현대판 농노가 되어가고 있는 수많은 청년세대들이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이를 법제화하는 정치에 대해 도전하고, 거세게 봉기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예를 길러내는 교육과 사회만이 지속될 것이다.

 

진정한 달관이란 무엇일까? 그건, 현실의 모순에 침묵하면 그 모순이 결국 자신의 목에 걸리는 밧줄이 되고 만다는 것을 통찰하는 힘이다. 역사적 달관의 깊이에 이르는 세대, 그걸 우리는 보고 싶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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