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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님께 바쳐지이다

by 한종호 2021. 4. 3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 1:10)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빕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시절은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주말부터 주초께 코로나 확진자 수가 줄어드는가 싶어 기대를 품어 보지만, 주중에는 어김없이 늘어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희망 고문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무심해져 보려고 하지만 교회 문을 닫고 있는 입장에서 그럴 수가 없군요. 이 곤고한 시간이 속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계시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주님께서 힘겨운 시간을 견딜 힘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난 월요일 모처럼 아내와 용산가족공원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오전 내내 서재에 갇혀 지내다가 나오니 아내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햇빛 좋고 바람 서늘한 모처럼의 휴일, 일에 붙들려 지내는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용산가족공원입니다. 산사나무 하얀꽃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이들의 모습이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바닥에 깔린 참꽃마리의 앙증맞은 꽃잎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미나리아재비, 골담초, 큰꽃으아리, 등나무꽃을 찬찬히 살피며 오후를 다 보냈습니다. 거리 곳곳에 서있는 이팝나무도 흰꽃을 머리에 인 채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분주한 마음에는 깃들 수 없는 따뜻하고 아늑한 평화를 누렸습니다. 아름다운 계절에는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자연과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금주에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윤여정 선생의 오스카상 수상에 쏠려 있었습니다. <미나리>라는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다양한 매체와 한 윤여정 선생의 인터뷰는 많은 이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가학적이지 않으면서도 뭔가 깊은 곳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유머, 젠체하지 않는 태도가 외국인들에게도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당함은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깊은 연륜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고통의 세월을 겪는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깊고 그윽한 멋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윤여정 선생의 경우는 제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서 그가 한 말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5명 후보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있는 건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축약한 형태이긴 하지만 대략 이런 뜻의 발언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이 그저 겸양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상식 직후 온라인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도 참 크게 울려왔습니다.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흑인·황인종으로 나누고,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지닌 평등한 사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일회적으로 소비되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삶의 태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5월 첫 주는 어린이 주일인 동시에 우리 교회 설립 11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그 동안 설립의 의미를 되새기느라 어린이 주일을 소홀히 해 온 감이 있습니다. 며칠 전 딸이 손녀들의 근황을 전해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언니가 여섯 살 동생과 상황극을 하며 놀았습니다. 언니는 동생에게 로봇 역할을 맡기고는, 동생의 등에 배터리를 넣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언니의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배터리를 거꾸로 넣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맹랑하지요? 그러다가 자기 역할에 몰입한 동생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왜 로봇으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엄마가 없을까?” 아이들도 이처럼 존재론적 질문을 할 줄 압니다. 동생은 급기야 언니에게 자기 역할을 고양이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칼릴 지브란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옮김, 문예출판사, 1979, p.22)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올곧게 받아들일 부모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들풀 하나 앞에 멈추어 서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개미를 살피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는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신비와 경이에 대한 감각을 잃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빈곤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어린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공허함, 무력함, 분노 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하려면 상당한 공력을 들여야 하겠지만, 우리 시대가 속사람의 건강보다는 겉사람을 꾸미는 일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겉사람을 잘 훈련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보를 알린다. 또한 우리는 고마운 감정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기술을 가르친다. 또한 우리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잡다한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고요함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불어 삶을 장려한다. 동시에 우리는 홀로 있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능변은 중요하다. 그러나 침묵도 그만큼 중요하다. 기술은 살아가는 데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억제도 그러하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205)

공교육이 소홀히 하는 가치들이 실은 인생에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교육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고마운 감정 기르기, 통찰력, 고요함, 홀로 있음, 침묵, 자기 억제 등을 배울 때 우리 삶이 균형을 잃지 않을 겁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걸 꼭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교회 설립 기념주일에도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교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봅니다. 수많은 낮과 밤이 갈마들며 세월을 이루는 것처럼, 정말 많은 이들의 기도와 땀과 헌신으로 쌓아올린 역사이기에 감사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긴 역사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진대 교회의 교회됨은 그러한 일치를 지향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이번 주 내내 제가 읽으며 기도로 삼은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께 바쳐지이다’입니다.

“이 몸을 님께 바쳐지이다.
세포 하나 남기지 말고
털끝 하나 아끼지 말고
내 것이라곤 하나 없이
나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다 님께 바쳐지이다.

님께서 이 잘난 것을
소용되어서가 아니오라
내게는 둘 수가 없어서
두어둘 터무니가 없어서
님께 바쳐 처분해 주시기를 비오니
이 나를 온통 맡으소서.”

시인은 님께 바친 몸이니 쓰시거나 버리거나 님 곁에 두시거나 아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처절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까닭은 자기 몸의 세포 구석구석에 죄와 더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이끌려 살던 사십 년이 이제는 피곤하고 싫증까지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누르고 또 눌러도 미욱한 것이 자꾸 나오고, 내쫓으려 해보아도 지싯지싯 들어오는 염치없는 것을 혼자 힘으로는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 힘겨운 싸움 다 이기고 깨끗한 기쁨으로 얼굴 들고 주님께 가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더러운 보자기 채로 자기를 님께 바치려는 것입니다. 받아주시기만 바라면서. 시의 마지막 연을 읽으며 숨이 가빠졌습니다.

“그리워!
님의 영광 그리워!
그 영광의 얼굴 그리워!
그 영광의 목소리 그리워!
그 영광 내 얼굴 비치소서,
내 가슴 흔드소서.
그 영광 내 입고, 내 찬송하고 싶어.
아아, 그 영광 그 영광!
나를 둘러싸소서 감추소서 삼키소서,
나를 녹여버리소서,
영광 영광 아아, 그 영광!”
(함석헌 전집6 <시집 수평선 너머>, 한길사, p.266-269)

이것은 우리들 개인이 바쳐야 할 기도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바쳐야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흔드시고, 녹이시어 그분의 영광 속에 머물 수 있기를 빕니다. 올해 우리는 교회 설립을 기념해서 ‘세이브 더 칠드런’을 통해 인근 지역의 학대받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생필품 지원과 위기 청소년들의 상담 지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이 주일을 교회 생일로 삼고 있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 어디에서나 어둔 그늘에 갇힌 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햇살 한 줌이라도 전해주려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싶어하십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머무시기를 빕니다. 평화.

2021년 4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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