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입하와 소만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떡갈나무 잎이 넓게 퍼지고 뻐꾹새와 꾀꼬리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올 때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는 시에서 “5월 7일 오전 9시 43분/올해 첫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다고 적었습니다. 청명한 대기를 울리는 꾀꼬리 울음소리는 아득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소리의 품 안에 안기고 또 안긴다고 말합니다. “번개처럼 귀밝히며/또한 천지를 환히 관통하는/이 세상 제일 밝은 光音, 새소리!” 숲길에서 만나는 새소리는 울울한 우리 마음을 말끔히 닦아내는 하늘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런 소리의 세계 속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런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주함에 포획된 채 허둥거리며 사느라 정작 귀한 시간을 낭비하곤 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하면서도 흔쾌히 즐겁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5월의 대지를 물들인 피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귀의 객이 된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만 23살이 갓 지난 이선호 씨의 때 이른 죽음이 참 가슴 아픕니다.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 해체 작업을 하다가 300kg이나 나가는 철판에 깔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후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기 전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잠시 구했던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치 그 죽음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아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아들의 전화번호를 ‘삶의 희망’이라고 입력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아들의 죽음을 어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 젊은이의 꿈이 그리고 한 가족의 희망이 그렇게 무너진 것입니다. 일터에서 집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어린이날에도 어버이날에도 일터에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한다 해도 한순간 방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다른 이들의 실수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 문제는 그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도 부족할 판입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율법도 그와 유사한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가 어떤 사람을 들이받아서 죽게 하였으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처형된 소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면 소의 주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에게 받는 버릇이 있는데, 그 임자가 남에게 경고를 받고도 단속하지 않아서 어떤 남자나 여자를 죽게 하였으면, 그 소만 돌로 쳐서 죽일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함께 죽여야 한다.”(출 21:29)
위험을 알고도 방치한 사람에게 무겁게 책임을 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이 원하면 소 임자를 처형하는 대신 배상금을 물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놓거나,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출 21:33)에는 구덩이의 임자가 짐승의 임자에게 배상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세세히 적시한 까닭은 강자들에 의해 약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기보다는 강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집행되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율법은 약자 보호가 하나님의 관심사임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과부, 고아, 채무자들은 친족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부모나 남편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도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약자의 보호자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출 22:23).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그들이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책무입니다.
며칠 전부터 잠시 짬이 날 때 읽는 책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파시스트 정권과 나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당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지막 편지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짤막한 편지도 있고 긴 호흡으로 쓴 편지도 있지만, 처형을 며칠 혹은 몇 시간 앞두고 쓴 편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의를 따라 살다가 맞이하게 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남겨진 가족들이 겪을 상실의 고통을 염려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은 41세의 가구공인 피에트로 베네데티의 편지입니다. 젊어서부터 낡은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해왔던 그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긴 호흡의 편지를 썼습니다. 특별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아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슬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겨질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합니다.
“내 사랑이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 주렴. 그리고 네 엄마를 사랑해 드리려무나. 내 빈자리를 너희들의 사랑으로 채워 다오. 공부와 일을 사랑하렴. 정직한 인생은 살아 있는 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란다. 인류애를 신조로 삼고 너희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결핍에 항상 신경 쓰렴. 자유를 사랑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이 안녕은 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혹은 누군가가 목숨을 바친 대가로 이뤄진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저들의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모국을 사랑하되, 진정한 조국은 전 세계이며, 어디에나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너희들의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렴.”(피에로 말베치·조반니 피렐리 엮음,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 임희연 옮김, OLDBEN, p.92-93)
아직은 세상 물정을 다 알기 어려운 나이의 아이들이 그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임을 잊지 말라는 말, 파시스트들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마치 피울음처럼 들립니다. 단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는 것처럼 자기가 하려 했던 일의 의미를 밝힙니다.
“인류에게 가해진 이 끔찍한 모욕을 견디고 지금의 슬픈 현실보다는 우리가 누려 보지 못한 더 아름답고 더 좋은 미래를 그들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그 미래는 곧 실현될 거야. 어찌 되었건 나는 사람, 사물 할 것 없이 전부 파괴하는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질 거야. 나는 내 아이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꽁무니를 빼는 겁쟁이가 아닌, 의무의 호소에 응답하다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앞의 책, p.96)
그는 인류에게 가해진 끔찍한 모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려 하지 않고 거기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켜 결국 더 나은 세상의 꿈이 영글게 하려 했기에 떳떳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겁쟁이가 아니라 용감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가 견지한 단호한 입장은 소시민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우리 삶에 큰 도전이 됩니다. 지금도 인류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모욕이 세상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삽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 11:3)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다가도 문득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의인은 가려내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곧 희망입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됩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상황이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명랑하고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는 일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사랑의 범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백신 접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도우심이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1년 5월 1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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