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방앗간의 방아소리가 며칠째 끊이지 않는다. 방앗간은 설날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고무 함지박을 줄 맞춰 내려놓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하는 밝은 표정들. 쌀을 빻기도 하고, 가래떡을 뽑기도 한다. 지나치는 길에 잠시 들여다 본 방앗간엔 구수한 냄새와 함께 설날에 대한 기대가 넘쳐 있었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가 있는 반장님 댁도 바빴다. 쌀, 옥수수, 누룽지 등이 빙글빙글 손으로 돌리는 기계 속에서 하얗게 튀겨져 나왔다.
“뻥이요!”
소리를 치면 둘러선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고, 곧이어 “빵!” 대포 소리와 함께 하얗고 구수한 연기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작실 단강리 섬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옥 집사님, 지금순 집사님 집은 콩으로 두부를 직접 만들었다. 작실엔 돼지를 두 마리 잡았는데도 모자라 또 잡기로 했단다. 엿이며, 강정이며, 만두며, 감주며, 집집마다 하얀 연기 피워 올리며 설 준비에 모두들 바빴다. 벌써부터 설빔을 차려입고 고향을 찾는 이들의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고향에 모여 가족임을 확인하고, 그새 늙으신 어버이 주름이며 흰머리 안쓰럽게 헤아리며, 집집마다 찾아 절을 하며 한 이웃임을 확인하는 설.
“아니 니가 아무개 아녀?”
“네 맞습니다.”
“많이 컸구먼, 몰라보겠어. 그래 어떻게 지냈누?”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자, 절 받으십시오.”
“아니 절은 무슨 절, 됐어 됐어 봤으면 됐지.”
그럴수록 덥석 절을 한다. 절을 하는 이, 절을 받는 이 훈훈한 마음속 그렇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 보이지 않는 끈이 곧 우리네 인생임을, 고향이란 이런 곳이지, 생의 뿌리를 깨닫는다.
어디 코끼리나 여우나, 연어뿐이겠는가. 누울 곳을 찾는 귀소본능이란 어쩜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인지도 모른다. 설은 그 귀소본능의 확인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의 이유로도 돌아갈 곳이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걸 갖고도 돌아갈 곳이 없는 이도 더러는 있는 법이니까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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