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4)
‘위대한’ 인간의 품성에 대하여
- <위인의 요소> 1940년 12월 -
어려서부터 고난주간에는 꼭 독한 감기를 앓곤 했다. 환절기에 치르는 몸살일 터인데, 올 해도 거르지 않았다. 끙끙 괴롭게 누워 ‘머리’는 차질을 빚은 글쓰기와 밀린 연구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누워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보니 마치 데자뷰처럼 ‘몸’은 작년 이맘때 고난주간의 괴로움이 떠올랐다. 2014년은 부활 주일이 꽤 늦은 편이어서 4월 중순도 훨씬 지나 고난주간을 맞았었다. 4월 16일, 세월호가 소중한 생명들을 304명이나 품고서 검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난 그 끔찍한 날 이후에,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았다. 이미 생존가능시간을 넘기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발 한 생명이라도 더 살아라, 살아서 구조되라, 모두가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며 보냈던 시간이었다. 기적을, 기적을 보여 달라고,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무덤 같은 저 검은 바다 밑에서 살아 구출되는 생명의 소식을 듣게 해 달라고….
그러나 모두의 애타는 바람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이후 진행되는 상황의 ‘어이없음’이 계속되자, 우리는 이 어려운 시절에 공동체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이끄는 ‘위인’ 하나 없는 현실을 한탄했었다. 우리나라에 책임감과 실무능력을 가진 사람이 저리도 없나? 배 열 두 척으로 조선을 지킨 이순신 장군만큼은 아니어도, ‘지키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모여 있는데 어찌 ‘인물’이 없느냔 말이다. 다들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시대엔 왜 그런 위인이 나타나지 않는 거냐’고 애꿎은 시대 탓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 역시 비슷한 심정으로 지내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유가족들과 함께 곁을 지키며 울고, 시간과 물질과 사랑을 기꺼이 나누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몸을 사리지 않는, 수많은 위인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만이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더 무시무시했던 반(反)생명의 시절에도 함께 울고 기꺼이 나누고 의분을 일으킨 위인들은 ‘늘’ 그리고 ‘많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
김교신의 시절은 더 했겠지. <위인의 요소>라는 글을 쓴 것이 1940년임을 떠올린다면,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식민 말기에 그 폭력성이 하늘 꼭대기에 닿은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어리고 여리고 순한 생명들을 얼마나 많이 잃었던가? 이 ‘반(反)’생명의 상황을 그칠 수 있는 ‘위인’들이 절실히 필요한데, 참으로 시급한데, 그의 초조함이 얼마나 컸을까! 무장독립투쟁을 하던 투사들도, 물질적 힘을 기르려 애썼던 애국자들도, 의도야 십분 이해했지만 그들과는 다른 비전을 가졌던 김교신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인간성’의 개조를 위해 성실히 출간해왔던 『성서조선』이 아니었나. 그랬던 그가 ‘성서’와 ‘조선의 문명적 전통’에서 함께 발견한 ‘위인’의 요소라며 이 글을 적었다.
사도 바울은 신자 즉 천적(天的) 새 생활인의 표준으로서 1. 자비 2. 인자 3. 겸손 4. 온유 5. 관용의 다섯 덕성을 옷처럼 입고 그 위에 사랑으로 띠처럼 매라는 것을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다(골로새서 3:12-14). 현대의 우리가 이것을 읽고 매우 이상한 느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들 다섯 덕행이라는 것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소위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과연 이런 덕행을 수득(修得)하여서 생존에 견딜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상한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 조선 사람의 수덕(修德)의 이상이 바울이 제시한 덕성에 심히 근사(近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조선 사람의 이름에 가장 잘 쓰이는 자는-인(仁), 의(義), 예(禮), 신(信), 순(順), 순(淳), 화(和), 덕(德), 명(明) 등의 자이다.
동과 서, 지리적인 차이나 시대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살아간 사람들이 닮으려 추구한 인간성의 특성이 같았다는 것을 발견한 기쁨이 컸었나 보다. 무엇보다 칼과 총을 앞세운 민족주의나 제국주의가 세력을 떨치던 상황이고 보니, 그런 시절에는 경쟁력이 없는 이런 ‘여성적’ 성품들을 길러 생존이 어찌 가능하겠느냐 질문도 던진다. 그러나 김교신이 ‘여성적’ 품성이냐 ‘남성적’ 품성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갈등을 하며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이미 이 세상이 소위 ‘경쟁력 있는 성품’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은 전혀 ‘하나님-닮은-성품’이 아님을 깨달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정복하고 억누르고 죽이고, ‘내’ 것을 확장시키기 위해 ‘너’에게 폭력을 가하는 ‘투견투계’의 세상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인간성을 ‘거듭난 위인의 성품’으로 주장했던 것이 아니겠나.
위인은 어떤 사람이냐.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나 성길사한(칭기즈 칸) 등을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前) 세기의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현대에 있어서는 아마 소년잡지의 독자 정도일 것이다. 바울은 새 사람의 덕성으로서 다섯 요소를 들었지만 이것이 곧 위인의 요소이다. 위인이란 … 그 가슴에 자비의 마음 즉 용광로 같은 연민 동정의 심정을 소유한 인간이야말로 참다운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다. 석가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야, 예레미야가 그런 사람이었다. 장차 올 사회에 있어서는 자비의 마음, 인자, 겸손, 온유, 관용의 덕을 갖춘 사람만이 참 인간이고 따라서 참 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김교신은 이 글에서 ‘인간다움’과 ‘남자다움’ 사이의 큰 정의적 구별을 두지 않았는데, 그거야 사람을 ‘man’이라 하고, 역사를 ‘history’라고 하고, 심지어 성별을 초월하신 하나님조차 ‘He’라고 적어놓고도 무심한 가부장 문화권의 공통적 한계이기는 하다. 예를 들어 김교신은 “위인이란 인간다운 인간, 남자다운 남자를 말한다”라는 표현을 큰 문제의식 없이 썼는데, 그럼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위인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냐고 따질 수 있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김교신의 이 글이, 여자는 조신하게 집 안에서 내훈이나 읽고, 남자들은 ‘투견투계’의 전투력으로 공적 세계를 장악하라는 요지가 아닐진대, 지엽적인 문제로 주장의 본질을 흐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 이를 ‘페미니스트적’ 시각에서 굳이 죽자고 덤빌 일은 아니지 싶다. 하여, [ ] 안의 내 임의로 수정한 양성평등적 표현은, 김교신이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핵심적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거듭난 성품’으로서의 위대한 인간성을 살아낸 사람들을 제시하며 예수를 적지 않은 아쉬움은 크다. 정통신앙인 김교신에게 예수는 곧 그리스도라 그 긴밀한 신앙고백적 언어에서 ‘인간 예수’만을 따로 떼어 모세나 이사야, 예레미야와 함께 나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가르치는 이 경쟁 사회에서 보다 근원적인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는 단연코 ‘위인’ 중의 위인이었다.
김교신과 같은 해 같은 달에 히틀러의 광기어린 폭력에 희생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위인’의 삶을 살다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었다. 동과 서, 비록 거리의 간극이 컸으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위인’의 삶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치열하게 따라 살아간 두 사람이라 그들이 보고파했던 ‘위대한 인간성’의 닮음이 연결되어 떠올랐다. 이 잔인한 4월에 예수께서 본을 보이시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 길을 따라간 ‘인간다운’ 삶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기를, 자기 삶의 한 가운데서 실천하고 또 실천하기를 소망하며 본회퍼의 《옥중서신》 한 구절로 글을 맺는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쓸모가 있을까? 장래에는 천재도 아니고 냉소가도 아니고 인간 경멸가도 아니고 교활한 책사도 아닌, 소박하고 단순하고 정직한 인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박과 정직에의 길을 재발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의 내적 저항력이 강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 가차 없이 엄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본회퍼, 《옥중서신》)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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