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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부활의 믿음으로

by 한종호 2015. 4. 12.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5)

 

부활의 믿음으로

- <부활> 1932. 5월 -

 

 

“도대체 우리는 이 시간에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출근시간이라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바쁜 광화문 한복판에 앉아 열심히 노란 리본에 고리를 달다가 한 지인이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 말이다. 수업시간에 맞춰 10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유난히 손을 빨리 놀리며 노란 리본 고리를 달던 내게서도 한숨이 나왔다. 신학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하고 있는 일로는 분명히 ‘낯선’ 장소 ‘낯선’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바로 앞에는 지난 1년 간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허리를 반듯하게 하고 앉아 계시다.

 

세월호 노숙자,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고 있는 유가족들이 이렇게 차디 찬 광화문 바닥에서 하늘을 이불삼아 몸을 눕힌 지 벌써 한 해가 되어 버렸다. “수학여행 왔구나! 오늘 추운데 옷 좀 든든히 입고 나오지~”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아이들을 향해 유민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던진 말이다. 그제야 얼굴을 알아본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허리를 깊이 숙여 배꼽인사를 한다. 애도의 몸짓이리라. 여학생 몇은 다가와 우리가 열심히 만든 노란 리본을 한 움큼 가져다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교복만 보아도 철렁하고 아이들 웃음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뚝뚝 날만큼 아플 텐데, 진심이 담긴 저 환한 웃음은 어찌 가능할까?

 

아, 이미 유민 아빠는 유민이 한 아이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니구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유민이 한 아이를 잃고서 저이는 모든 아이들을 다 자신의 아이로 품어버렸구나! 유민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셨다더니,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안전하게 수학여행을 다닐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그 세상이 결국에 도래할 그 날을 그리며 저이는 믿음으로 ‘미리’ 웃고 있는 것이겠구나! 그저 열일곱 살짜리 ‘살아있는’ 아이를 곁에 둔 엄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미안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최근까지 나를 짓눌렀던 절망감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겠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내가, 부활절은 절기처럼 그냥 지내버렸는지, 자꾸 이렇게 우울해하고 좌절하면 불신앙이겠지. 예수께서 이미 이기신 싸움임을 믿는다면, 죄책감이나 우울함 대신 미래에는 결국 도래할 정의와 평등의 질서를 ‘믿으며’ 기뻐하고 담대해야겠지. 이 불가사의한 기쁨과 희망이 의지나 이해로 인함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내 안에서 만난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데, 예수가 몸으로 혼으로 살아낸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알고 믿고 추구하고 가르친다는 사람이 자꾸 이렇게 절망감을 가지면 안 되겠지. 자꾸 이렇게 우울해지고 절망하려 드는 걸 보면, 그동안 나는 내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었던 복음의 내용들만을 가르치고 있었을 뿐, 부활 예수의 동력으로 인생을 살아내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자기반성이 가득한 가운데 읽었던 김교신의 「부활」의 한 글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내 가슴에 콕 박혔다.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믿으라’ 하셨다. 연구하라, 사색하라, 증명하라, 변박하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믿으라!’ 하셨다. 담대하라, 호활(浩活)하라, 정복하라, 추격하라는 것이 아니요, ‘오직 믿으라!’ 하셨다. 묵묵한 중에서 오직 믿고만 있으라 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말은 아니다. 사람의 권면이 아니요, 그리스도 자신의 음성인 ‘오직 믿으라’는 이 일성의 파동이 너의 심령에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의하여 세계는 이분되고야 만다. 오직 믿는 자에게는 다른 아무 유익함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손을 펼쳐 잡으시고 “일어나라”(누가 8: 54)고 외치실 때에 야이로의 딸과 같이 묵묵한 중에서 죽음을 정복하고 일어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에게 전파하고 회중에게 찬송하겠나이다”(시편 22:22) 하면서 개가를 부를 것이니 그 때엔 다시 조롱도 없고 눈물의 흔적도 못 볼 것이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평소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성서 문장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분석하고 연구하던 김교신의 입에서 ‘할렐루야!’라는 감정적 찬양과 ‘오직 믿으라!’는 선포가 나왔다는 사실은 조금 낯선 장면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학도였던 김교신은 근대지식인으로서도 신앙인으로서도 어느 부분에서 인간 이성을 끝까지 밀고나가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에 대한 믿음의 차원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구별하고 있었다. 부활의 영역은 과학적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음을 그는 분명히 인정했다. 그들이 ‘무식’하다고 조롱한다면 이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 말이다.

 

나에게 과학적 지식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그 지식과 성서가 조화되지 못할 때에는 어찌할까. 무식이 또한 가하다. 내가 능히 일행서를 읽지 못하고 한마디의 변론으로써 신앙을 변호하는 술(術)이 없어 친척고우와 그 밖에 나를 보는 자마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이르되 “여호와를 의탁하라, 건지시리라. 여호와가 저를 즐거워하시니 구원하시리라”(시편 22:7-8) 하면서 조롱하여도 가하다. 진실로 주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받은 조소가 또한 이것이었다.(마가복음 15:31-32). 야이로의 집에 갔었을 때에도 ‘비웃음’을 당하고 아무 답변도 없었다. 예수 이래로 기독교도에게 조롱은 부대물이요, 위대한 신자일수록 더 큰 조롱을 받았다. 왜 그런가. 불가능을 믿은 까닭이었다. 하물며 죽어가는 사실을 보면서 부활을 믿을 때에 신자에게 대한 조롱은 그 극에 달한다.

 

그러게 말이다. 부활이 어찌 이해할 만해서, 납득할 만한 일이라서 우리가 ‘믿는다’고 하겠는가? 부활이 어찌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하면 될 것 같아서 ‘믿게’ 되는 일일까? 김교신이 시인의 입을 빌어 인용하듯이, “나의 모든 뼈가 어그러지고 내 마음이 황밀과 같아 뱃속에서 녹으며 내 혀가 이틀에 붙었으며 내가 내 모든 뼈를 넉넉히 세겠는” 그런 절망적이고 고통스런 상황에서조차 ‘믿어야’ 하는 것이 부활 소망이다. 김교신은 성서가 전하는 부활 메시지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신앙할 수 있을까. 부활은 어째서 가능한가. 가로되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종자가 먼저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린도전서 15: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요한복음 12:24)고 성서의 대답은 명백하다.

 

예수가 부활하셨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먼저 죽으셨다. 한 알의 밀알이 되셨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가르치고 돌보고 치유하는 삶을 살다가, 이를 그치지 않은 대가로 부정의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에의 믿음이 있으셨기에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비록 ‘인간’ 예수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으나, 부활을 믿고 죽은, 그리고 다시 사신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인이 살아야할 본을 보이셨다.

 

지난 주 부활주일 대학부 성경공부 시간에 나는 일종의 ‘커밍아웃’을 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서의 주된 메시지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지만, ‘부활’만큼은 이해도 못하겠고 설명도 못하겠고 해석도 못하겠노라고. 다만 이 지점에서 내 이성은 멈추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을’ 뿐이라고! 그러나 온전히 믿지 못했었나 보다. 비상식적인 연유로 자식을 잃고 진상규명을 원하는 유가족 앞에, 서민들은 만져보지도 못할 거액의 배·보상금을 제시하여 이들을 시험한 비열함을 접하여, 나는 울컥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릴 뻔 했으니 말이다. ‘생명에 대한 차등 없는 사랑과 존중, 이웃에 대한 공의와 평등한 사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께서 매일매일 이 땅에 도래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를 위해 살라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가치라고 믿으면서도, 나는 너무 쉽게 절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희망이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부활의 원동력으로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환히 웃으며 살아야겠다. 결국은 도래할 그 나라의 통치 질서를 믿으면서… 오늘 나에게 ‘달리다쿰’ 하고 손을 내미시는 부활 예수의 손을 잡고서….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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