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의 노래 신학(14)
십자가 The Cross
윤동주 시 / 채일손 곡
- 1978년 만듦, ‘새의 날개’ 음반수록 -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어 있네(였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 갈 수 있을까(가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람(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이) 흘리리라(겠읍니다.)
1941년 5월 31일. 윤동주가 원고지에 참하게 써내려간 ‘십자가’ 원본 끝에는 시를 지은 날짜가 나와 있습니다. 해방을 맞고 전쟁을 지나 40년이 흘러 이 시는 노래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백성과 세상을 향해 눈 감고 귀 닫은 교회와 국가의 태도가 그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긴 75년이 지난 현재도 우리의 시대상황은 매한가지입니다. 시인의 예민한 의식은 종교와 국가를 품고 신앙의 절정을 노래합니다.
쫓아오든 햇빛이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린 것은, 할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첨탑이 높아 오르지 못하는 것은, 할 일이 이렇게도 많은데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겠지요.
교회가 정부가 신자가 할 일을 하지 않으니 종소리도 울리지 않습니다.
시인은 안타까움에 서성거립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그리고 이 부박하고 심란한 시대에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차라리 행복하다고 합니다. 괴로웠던 사람 예수,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이보다 더한 역설이 있을 것이며, 이처럼 장르를 넘어선 반어법이 또 있을까요.
그리고 어두어(워)가는 하늘 밑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조용히 흘리겠다고 노래합니다. 생색을 내고 홍보에 들뜬 작금의 교회를 꾸짖습니다. 최후에 흘릴 순교의 피도 모르게 흘린다는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감동으로 다가와 마침내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하여 삶의 화두로, 지표로, 실천의 본이 된 윤동주의 ‘십자가’ 교회가 사회와 역사를 대하는 안목을 길러 주었고 속 신앙까지 눈뜨게 해준 스승 같은 시입니다. 비교적 하는 일을 감추고 이름 내기를 삼가고 묵묵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끝에서 무심하게 사라지거나 싱겁게 돌아설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 것도 이 시에게 빚 진 덕목입니다.
끝내, 침묵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덤,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같은 반 친구가 교회에서 배워 온 노래라고, 악보도 없이 부르는 노래를 받아쓰며 코드를 만들어 외워 놓았던 노래입니다. 10년이 지난 89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미국에서 들어온 노래들이 난무할 때 우리 언어, 우리 역사, 우리 정신이 담긴 노래였기에 첫 노래로 당당할 수 있었던 귀한 곡입니다. 윤동주의 시에 흠뻑 빠져 살던 며칠, 지어놓은 몇 곡이 더 있었지만 발표는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난 92년, 서울에서 ‘기독교문화운동협의회’라는 모임을 가질 때, 강진에서 올라오신 채일손 목사님을 그곳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이 노래를 작곡한 분입니다. 음반을 발표하고도 얼굴도 연락처도 몰랐던 분입니다. 실제 악보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신통한 것은 원곡과 노래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가락을 고수하며 수십 곡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배움이 컸습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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