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8 빌라도 그리고 바라바
마태수난곡 2부 54~55번 마태복음 27: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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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EcEEmTO_Fl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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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5)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 15. Auf das Fest aber hatte der Landpfleger Gewohnheit, dem Volk einen Gefangenen loszugeben, welchen sie wollten. 16. Er hatte aber zu der Zeit einen Gefangenen, einen sonderlichen vor andern, der hieß Barabbas. 17. Und da sie versammlet waren, sprach Pilatus zu ihnen: |
대사 | 빌라도 |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 Welchen wollet ihr, daß ich euch losgebe! Barabbam, oder Jesum, von dem gesaget wird, er sei Christus.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 18. Denn er wußte wohl, daß sie ihn aus Neid überantwortet hatten. 19. Und da er auf dem Richtstuhl saß, schickte sein Weib zu ihm, und ließ ihm sagen: |
대사 | 빌라도의아내 |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 19. Habe du nichts zu schaffen mit diesem Gerechten im habe heute viel erlitten im Traum von seinetwegen.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 20. Aber die Hohenpriester und die Ältesten überredeten das Volk, daß sie um Barabbam bitten sollten, und Jesum umbrächten. 21. Da antwortete nun der Landpfleger, und sprach zu ihnen: |
대사 | 빌라도 |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 Welchen wollt ihr unter diesen zweien, den ich euch soll losgeben?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이르되 | Sie sprachen: |
대사 | 무리들(합창) | 바라바로소이다 | Barabbam!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2.빌라도가 이르되 | 22. Pilatus sprach zu ihnen: |
대사 | 빌라도 |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 Was soll ich denn machen mit Jesu, von dem gesagt wird, er sei Christus?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그들이 다 이르되 | Sie sprachen alle: |
대사 | 무리들(합창) |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Laß ihn kreuzigen. |
55(46) 코멘트 |
코랄 |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형벌이 있을 수 있답니까! 선한 목자가 양떼를 위해 고난 받다니요; 의로운 주인이 자기의 종을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다니요. |
Wie wunderbarlich ist doch diese Strafe! Der gute Hirte leidet für die Schafe; Die Schuld bezahlt der Herre, der Gerechte, Für seine Knechte! |
빌라도의 갈등
잠시 환기가 되듯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가 이어집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로마 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글로벌 지성인이었고 노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죄가 없으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18절). 사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총독으로서 그는 그렇게 할 권한이 있었고, 옳고 그름을 판별할 상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아울러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은 그 지역을 돌봐야 하는 사람(총독, Landpfleger)으로서 그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의 딜레마입니다. 골치 아픈 유대 총독 임기를 문제없이 잘 마치고 중앙 정치 무대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목표였습니다.
순간, 그에게 묘책이 떠오릅니다. 에반겔리스트는 스스로의 지혜에 경탄하여 무릎을 치며 재판석에서 일어서는 빌라도를 묘사하듯 내러티브를 쏟아냅니다. ‘Auf das Fest aber hatte der Landpfleger Gewohnheit, dem Volk einen Gefangenen loszugeben, welchen sie wollten.../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15절).’
때마침 유월절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명절에는 백성들이 청원하는 죄수 한 명을 놓아 주는 전례(Gewohnheit)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오늘날의 특별 사면과 같은 이 제도를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Er hatte aber zu der Zeit einen Gefangenen, einen sonderlichen vor andern./그 때에 ...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16절)’ 당시 빌라도의 수중에는 그 어떤 죄수들보다 특별한(sonderlich)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죄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그리 특별한 이유는 백성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당연히 놓아줄 이로 그 악명 높은 범죄자 대신 예수를 택하리라 생각했기에 선심을 쓰듯 그 두 선택지를 그들에게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Aber die Hohenpriester und die Ältesten überredeten das Volk/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20절)’ 빌라도는 예수를 시기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마음과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백성들의 무지함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지혜에 얽매여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애초에 총독의 권한으로 예수를 풀어 줄 수 있었지만,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으려는 심산으로 내밀었던 묘안에 붙들려 예수를 십자가형에 내어 주고 맙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렇게 진실과 정의와 공정함을 버렸습니다. 양심에 찔렸는지 얼른 손을 닦으며 책임회피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짜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자기 합리화는 이렇습니다. 그간 정치인으로서 살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와 같은 방식을 학습해 오면서 총독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겠지요. 사실, 이번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반대의견도 없었고 힘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 원했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그들에게 돌리면 될 일이었고 예수라는 그 힘없는 한 사람만 희생양 삼으면 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빌라도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잔악한 시대의 로마 총독으로서 유대인 한 사람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닐진대 이번 일은 왠지 모르게 꺼림했습니다. 그의 첫인상부터 그랬습니다. 초연해 보였지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헤아려 아는 듯한 그 눈빛이 신경 쓰였습니다. 일반적인 죄인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죄를 인정해서 자포자기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인편으로 급히 전달받은 아내의 꿈자리 이야기도 그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빌라도는 이 갈릴리 사람에게서 왠지 모를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 그것은 무언가 근원적이고 변치 않는 것을 향한 이끌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빌라도는 자기도 모르게 재판장 총독과 죄수라는 커다란 간극을 넘어 이래저래 억눌러 왔던 존재적 갈등을 토로하듯 자기도 모르게 이 질문을 던지고 맙니다.
“Was ist Wahrheit?/진리가 무엇이냐?”
예수와 단둘이 만나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되었고 빌라도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면과 존재에 대한 성찰 즉, 종교의 영역에 발을 디딜 뻔했던 빌라도는 아차 싶었는지 이내 발뺌을 합니다. 질문을 던져 놓고는 서둘러 공적인 업무의 영역으로 도망치는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해당 구절을 잘 살펴보면 이러한 빌라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요한복음 18:38
재판장 빌라도는, 적어도 그 재판정에서만큼은, 자신이 그 능력과 위력에 있어서 ‘판단력의 우위’에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내면에 던진 파장을 외면하고 최대한 안전한 방식을 택합니다. 그의 권위를 생각할 때 더이상 저 갈릴리 사람으로 인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습니다, 늘 해왔던 작은 정치적 타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자기 이름이 사도신경에 올라 예수를 죽인 주범으로 끊임없이 거명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무기력하게 재판정에 서 있던 그 갈릴리 사람이 만왕의 왕이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양이라고 생각해 죽음으로 내몰았던 힘없는 이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세상 속 빌라도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는 빌라도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로마 지배하의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인간 권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 현실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힘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는 인간 권력이었다는 사실을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으로 거듭 확인시켜 줍니다.
그 역사적 현실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지금 우리와도 잇대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 권력은 갈수록 그 힘을 더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빌라도와 같은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인물상일 것입니다. 그는 상식과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글로벌 지성인이었으며 로마 귀족이었고 장래가 촉망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언뜻 보면 빌라도가 억울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비겁하기는 했지만, 사도신경에 이름이 올라 예수를 죽인 원흉으로 세세토록 비난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가 빌라도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한 주역 중의 하나인 빌라도는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을 법한 인간의 모습이 예수를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빌라도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서 빌라도를 자주 봅니다. 예수도 얻고 세상도 얻으려는 심산 말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이 땅 위 교회들에 만연합니다. 예수를 원한다고들 하지만 동시에 세속적 가치 추구로 가득한 교회의 모습은 결국 예수를 죽이고 맙니다.
빌라도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께 집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예수와 연결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와 대면할 때 인간적인 상황과 껍데기에 연연하여 발을 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며, 진리 운운하기 전에 진실 앞에서 용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빌라도는 곧 소개해 드릴 바라바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 세상 속의 빌라도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성공이나 출세에 이전과 같은 강한 집착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재판장 빌라도처럼 적어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판단력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중심이 자기 자신과 고작해야 자기 가족이 되어 버렸기에 종교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적 옳고 그름은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반면, 예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목 놓아 외쳤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굴복시켰습니다.
기독인들은 빌라도의 방식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죽였다면 기독인들은 예수를 다시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독(基督)’은 한문으로 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기독인이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흔한 표현 대신 ‘기독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예수를 따름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죽인 주동자들이 종교지도자들이었듯이 교회 내에서 예수가 아닌 빌라도의 방식을 따르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기독인은 양심과 상식과 신앙으로 이미 알고 있는 옳은 길, 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그 갈릴리 사람을 ‘옳은 사람/Gerechte’이라고 말했습니다(19절). 빌라도 아내의 그 표현은 이어지는 코랄의 ‘Die Schuld bezahlt der Herre, der Gerechte/의로운 주인이 죄값을 지불했다’라는 가사로 다시 사용됩니다.
기독인들이 빌라도의 삶의 방식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의 삶의 방식을 따르다가는 빌라도처럼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기독인은 지금까지 열거한 빌라도의 방식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실은 감추어진 비밀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이미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사형을 당했고 예수를 죽이려는 빌라도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것일까요? 서로를 끌어들이며 합리화하고 서로 위로하는 악의 본성 때문입니다. 반면 진리는 외롭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예수처럼 말입니다.
바라바로소이다
한편, 빌라도의 물음에 무리들은 ‘Barabbam/바라바로소이다(21절)’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여기에 쓰인 풀 디미니쉬 화음은 바흐의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화음입니다. 약 80년 후에도 파격적으로 들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의 3악장 시작 부분과 같은 화음이지요. 바흐는 시대를 초월한 음악가였습니다. 바흐는 그에게 이른 모든 음악적 유산을 섭렵했고 그의 시대를 온전히 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연주회장은 물론이고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의 빌딩 숲, 자연, 우주, 심지어 폐건물까지 이 세상 어느 공간에서도 그에 어우러지는 음악이 되어 줍니다. 클래식 음악 중에 재즈와 만났을 때 가장 큰 시너지를 일으키는 음악이 바흐의 음악입니다.
풀 디미니쉬 화음은 감3화음에 감7도 음이 추가된 서양 음계에서 가장 어두운 화음입니다. 불안정한 화음이기에 화성학적으로 이 화음 이후에는 해결음이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도레미파솔라시’까지만 부르고 ‘시’에서 멈추게 되면 불안함을 느끼고 그다음 음인 ‘도’를 불러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바흐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 광기의 울림을 멈출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듯 풀 디미니쉬 화음을 해결하지 않고 계속 울려 퍼지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 울림을 통해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광기가 공포스럽게 전달됩니다. 이 소리는 인간의 죄의 추악한 울림입니다.
우리가 함께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에서 ‘Barabbam/바라바로소이다(21절)’라고 외치는 부분은 엄청난 마성의 힘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칼 리히터는 이 부분을 악보대로 짧게 연주하지 않고 세 음 모두에 페르마타를 넣은 것처럼 지휘합니다. 바흐는 실제로 무리들이 외치는 언어와 악센트로 표현했기에 짧은 박으로 작곡을 했고 마태수난곡을 녹음한 거의 모든 지휘자들이 악보대로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음악적 표현에서 인간의 광기를 발견한 리히터는 이번만큼은 악보의 지시를 어기고 맙니다.
그 부분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는 에반겔리스트의 ‘Sie sprachen/(그들이)이르되’ 이후에 거대한 고장력의 활시위를 당기듯 오르간과 콘티누오의 예비박을 준 후 ‘Barabbam/바라바로소이다’이라는 폭발적인 외침을 끌어냅니다. 그 어떤 지휘자 보다 아름다웠던 칼 리히터의 힘찬 비팅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처음 이 음반을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에 비하면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2악장은 상큼한 수준입니다. 이 부분은 마태수난곡의 모든 합창단이 동원되기 때문에 순수한 목소리의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도 섞여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그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들의 죄로 인해 예수께서 죽으셨다!’라는 일갈을 날리듯 말입니다.
바라바
예수로 인해 사형을 면한 바라바는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언급되고 있습니다. 쉽게 지나칠 인물이 아닌 듯합니다. 마태복음 27장 16절은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로, 마가복음 15장 7절은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중의 하나로, 누가복음 23장 19절은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로 그리고 요한복음 18장 40절은 ‘강도’로 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표현으로 미루어 그를 로마제국에 반대한 폭력투쟁의 지도자 혹은 열심당(Zealot)의 열혈 당원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그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릴 적 저희 집에는 세계 문학 전집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그러한 전집이 한두 질 있었지요. 지금도 기억하는 몇몇 제목을 떠올려 보니 아마 노벨문학상 작품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소화하기에는 벅찬 작품들이었지만 교회에서 많이 들어 왔던 ‘바라바’라는 제목에 이끌려 그 소설을 뽑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내용보다는 그 소설을 읽었던 공간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공간을 통해 유추해 보니 중학교 1~2학년 때였습니다. 불안한 가정사와 근본주의적 신앙의 영향이 있었는지 그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은 어두침침한 그 방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혀 신앙소설로서 그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번 원고 집필을 앞두고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är Lagerkvist, 1891~1974)의 195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바라바’를 다시 읽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게 읽혔습니다. 예수의 대속의 은혜를 그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인 바라바는 십자가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현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소설 바라바의 첫 장면은 골고다 언덕 아래 한쪽 편에 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세 사람 중에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라바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고 싶고 십자가에서 참된 사랑을 느끼지만 섣불리 다가서기 힘들게 하는 현실 속 자아의 저항에 갈등하는 현대인들이 바로 바라바입니다. 또한 바라바는 스스로를 ‘신앙 없는 신자, 종교적 무신론자’라로 일컬었던 작가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앙드레 지이드의 평대로 라게르크비스트는 ‘현실과 믿음의 세계 사이에 있는 심연을 훌륭히 형상화’했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는 도저히 함께할 수 없어 보이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여 어우러진 소설입니다. 빛은 예수와 구원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와 사랑을, 어두움은 바라바와 잔혹한 형틀로서의 십자가와 두려움을 상징하는데 이 소설은 빛과 어두움을 대립적으로 그려내지 않고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 속에서 빛과 어두움이 뒤섞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설 가운데에는 바라바와 그의 친구 사하크가 노예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고발을 당해 총독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너도냐? 너도 이 사랑의 신을 믿느냐?"는 총독의 질문에 바라바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신이 없습니다." 총독이 다시 묻습니다. "이상하군. 그렇다면 왜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새긴 표를 달고 있지?" 바라바는 대답합니다.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라바의 두 마디 대사 "나는 신이 없습니다."와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는 모두 바라바의 진심이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혼재된 바라바의 마음이요 참된 사랑과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소설 ‘바라바’는 1962년에 안소니 퀸의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웅장한 스케일과 영상미, 그리고 안소니 퀸의 명연기로 길이 남을 명작입니다. 특히 소설과 영화에서 바라바와 예수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빛과 어두움의 첫 만남으로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합니다.
“총독 관저의 뜰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바라바는 그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이 이상한지 말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바라바는 이전에 그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바라바가 그 사람한테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땅굴 감옥에서 막 나온 그의 눈이 빛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은 찬란한 빛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빛은 곧 사라졌다. 바라바의 시력은 차차 정상으로 돌아왔고 관청 뜰에 홀로 서 있는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물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바라바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매우 이상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자기처럼 죄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사형을 당할 죄수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재판을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무죄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십자가에 처형되려고 끌려갔으며 자신은 쇠사슬에서 풀려나 석방되었다. 바라바가 무엇인가를 해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키는 사람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바라바>, 한영환 옮김, 문예출판사, p9)
지하 감옥에서 막 끌려 나온 바라바는 예수에게서 그의 눈이 감당할 수 없는 빛을 보았지만 이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영화 ‘바라바’를 연출한 리차드 플레이셔(Richard Fleischer) 감독은 그 어떤 화가의 위대한 그림보다 더 예술적으로 이 장면을 영상에 담아냈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의 빛은 ‘그림자처럼’ 계속하여 바라바를 따라다닙니다. 삶의 어두움도 여전히 바라바를 욱여싸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 가운데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바라바는 그를 살려 주었던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땅거미가 내리자 구경꾼들은 더 서 있기가 지루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이 다 죽은 뒤였다. 오직 바라바만이 아직 살아서 거기 홀로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가 늘 두려워하던 죽음이 닥쳐옴을 느끼자 어둠을 향해 말했다.
“당신께 내 영혼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바라바>, 한영환 옮김, 문예출판사, p162)
영화에는 “당신께 내 영혼을 드립니다.”의 앞뒤로 바라바의 대사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앞에 있는 대사는 “낮이오 밤이오?”이며 뒤에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저는 바라바입니다!”입니다.
“낮이오 밤이오?”정말이지 소설 바라바를 상징할 만한 의미심장한 대사입니다. 언덕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수많은 십자가 사이에서 누구 하나 들어 주는 사람이 없음에도 바라바는 그와 같이 묻습니다. 그렇게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도 여전히 빛과 어둠의 혼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바라바는 여전히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는 그의 존재적인 현실을 내던지지 않고 끝까지 씨름합니다. 그렇다고 그는 그를 처음 보았던 날 이후 어느새 그의 마음에 자리한 빛 또한 밀어내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 앞에서도 진실했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 앞에서도 진실했습니다. 그것이 바라바와 빌라도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습니다.
바라바는 자신이 살아났던 그 날 십자가 언저리에서 들었던 그분의 음성을 기억하며 그분의 말을 되뇌입니다. 그리고 참 빛이신 그분을 드디어 만난 것인지 “바라바입니다!”라고 말한 뒤 십자가 위에서 고개를 꺾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무리들의 외침에 총독 빌라도는 “Was soll ich denn machen mit Jesu, von dem gesagt wird, er sei Christus?/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에 무리들은 “Laß ihn kreuzigen/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외칩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의 목소리를 표현할 때 바흐는 앞서 ‘바라바로소이다’라고 한 순간에 외치는 것과 달리 시차를 두고 여기저기에서 시끌벅적하게 터져 나오는 소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의미의 ‘kreuzigen/크로이치겐’동사를 표현할 때에는 강한 당김음과 악센트로 마치 직접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군상이기도합니다.
이 짧은 합창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음이 있는데 높은 음역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플루트 소리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서 쓰인 플루트는 목재로 만들어진 현대 플루트의 전신인 ‘플라우토 트라베르소(Flauto traverso)’입니다. ‘트라베르소’는 이탈리아 말로 ‘가로’라는 의미인데 즉 ‘플라우토 트라베르소’는 ‘가로로 부는 피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일반적인 ‘플라우토(플루트)’는 오늘날 리코더와 같은 세로로 부는 형태의 목관악기를 통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가 쇠로 만들어졌음에도 목관악기에 속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흐 시대의 사람들이 가볍고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플루트의 고음을 악마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흐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마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음의 플라우토를 부각한 것이지요. 오늘날 강한 자극에 길들어진 우리의 귀로 들으면 그들의 상상력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만, 예전에 TV에서 남녀가 손을 잡는 장면만 나와도 괜히 부끄러워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법도 합니다. 이 음악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종종 잊어버리곤 하는데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은 1727년에 초연되었으니, 무려 약 300년 전의 음악입니다.
오 놀라우신 우리 주의 사랑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무리들의 악마적인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같은 합창단에 의해서 코랄이 울려 퍼집니다. 물론 무리들의 합창과 바로 이어지는 코랄이 극 중에서 동일한 화자들의 노래는 아닙니다. 마태수난곡에서 코랄은, 이 시리즈의 처음에 설명해 드린 대로, 십자가 이야기의 외부에서 바라보는 성도들의 코멘트입니다. 하지만 동일한 화자이기도합니다. 이 코랄을 부르는 이들은 빌라도와 바라바 그리고 무지한 군중들 가운데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 사이에 홀로 외로이 놓여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Wie wunderbarlich ist doch diese Strafe!
Der gute Hirte leidet für die Schafe;
Die Schuld bezahlt der Herre, der Gerechte, Für seine Knech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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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형벌이 있을 수 있답니까!
선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고난 받다니요;
의로운 주인이 자기의 종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다니요.
이 코랄은 이 연재의 다섯 번째 시간에 소개해 드렸던 마태수난곡의 두 번째 코랄 ‘Herzliebster Jesu/오 사랑의 예수시여’의 4절입니다. 살인자 강도 대신에 죄 없으신 주님이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악마의 하수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자도 양을 통해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건만, 우리의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이 코랄의 가사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은혜를 우리가 입었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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