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9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마태수난곡 2부 56~57번 마태복음 2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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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PcoyJf1ko8A | |||
56(47)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3 빌라도가 이르되 | 23. Der Landpfleger sagte: |
대사 | 빌라도 | 23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23. Was hat er denn Übels getan? |
57(48) 코멘트 |
소프라노 레치타티보 |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눈먼 이에게는 눈을 뜨게 하셨고, 걷지 못하는 자에게는 걷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들려주셨으며, 악한 것들을 내쫓으셨으며: 슬픔에 싸인 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 외에, 나의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Er hat uns allen wohlgetan. Den Blinden gab er das Gesicht, Die Lahmen macht er gehend; Er sagt' uns seines Vaters Wort, Er trieb die Teufel fort; Betrübte hat er aufgericht't; Er nahm die Sünder auf und an; Sonst hat mein Jesus nichts getan. |
어찜이냐
바라바가 아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Was hat er denn Übels getan?/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 문장에 쓰인 독일어 'denn'은 '도대체'라는 의미로서 우리말의 ‘어찜이냐’에 해당합니다. 바라바를 풀어주면서까지 죄 없는 예수를 죽이려 혈안이 된 저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입니다. 빌라도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에 있는 빌라도의 말은 그의 감정이 꽤 격양되어 있으며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저들을 답답해하는 듯한 톤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마태수난곡에서의 빌라도의 음성은 다릅니다. 바흐는 이 부분을 중저음의 음역으로 나지막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빌라도는 지금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중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혼잣말을 하듯 이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이제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시작됩니다. 바로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와 다음 시간에 만날 아리아 ‘Aus Liebe/사랑 때문에’입니다. 오늘 다룰 내용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성경에서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무리들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마태복음 27:23
그것은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영어의 ‘What’에 해당하는 독일어 ‘Was’로 물었으면 그 질문에 적합한 사실로 대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대답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는 그들의 소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러한 뜬금없는 문맥은 오히려 그 상황을 매우 실감나게 그려줍니다. 마태복음의 문학적 표현이 놀랍습니다. 보십시오, 마태복음은 지금 무리들의 동문서답을 통해 그들이 빌라도의 질문에는 아랑곳없이 광기 어린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외침이 너무나 시끄럽게 반복되는 터에 진중하고 나지막했던 빌라도의 다음 질문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를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이전에 한 질문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마태복음 저자의 문학적 표현력뿐만 아니라 그 점을 정확하게 캐치한 바흐와 대본작가 피칸더의 감각도 놀랍습니다. 우선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태수난곡에서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말하는 빌라도의 음성은 중저음의 음역대로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중한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듯 표현됩니다. 또한 곧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흐와 피칸더는 이 부분에서 소프라노 솔로로 하여금 대답을 하게 합니다. 빌라도의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그들 대신 대답을 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코멘트에 해당합니다. 코멘트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 밖에서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성도들이 느끼는 신앙적, 감성적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소프라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가 한 일은...
소프라노는 예수와 함께했던 놀랍고 아름다웠던 일들을 회상하며 노래합니다. 바흐의 교회음악 성악곡에서 소프라노의 음색은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소프라노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지만, 그 마음속은 예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부드럽게 전환되는 영화의 회상 장면처럼 이 노래를 배경으로 예수와 함께 한 아름다운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두 대의 오보에가 3도 화음을 이루며 온화한 바람에 함께 흔들리는 갈리리 바닷가 언덕의 들꽃들로 피어납니다. 저기 갈릴리 사람 예수가 보입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눈빛과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번갈아 주목하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은 눈먼 이에게는 눈을 뜨게 하셨고,
걷지 못하는 자에게는 걷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들려주셨으며,
악한 것들을 내쫓으셨으며:
슬픔에 싸인 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노래하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며 마음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소프라노는 결국 ‘Betrübte hat er aufgericht't/슬픔에 싸인 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 자신이 예수로부터 그러한 은혜를 받았었는지, 그분에 대한 감사와 애잔함과 사랑과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내 다음 가사를 부르며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친구로 삼아 주신 예수의 품에 안겨 숨을 고릅니다. ‘Er nahm die Sünder auf und an/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 독일어 가사에서는 ‘영접하다’라는 의미로 두 개의 동사가 한꺼번에 쓰였습니다. 바로 ‘auf-nehmen’ 과 ‘an-nehmen’입니다. 두 동사 모두 ‘받아들이다, 영접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인데 피칸더는 ‘nehmen’이라는 같은 기본 동사를 사용하는 두 개의 분리 동사를 사용함으로 운(韻,Reim)을 맞추고 예수께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했으며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랬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레치타티보의 마지막 가사가 담담하게 서술됩니다.
‘Sonst hat mein Jesus nichts getan.
그 외에, 나의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이지 문학사에도 길이 남을 놀랍도록 멋지고 아름다운 가사입니다. 이 진술은 빌라도의 질문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에 대한 부정형 대답의 마침표 역할을 합니다. 소프라노의 코멘트는 빌라도의 질문에 구구절절 항변하지 않고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들을 나열한 후, ‘그 외에, 나의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단정하게 진술을 마무리합니다. 진리는 악에 대하여 악의 방식으로 항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선한 것으로 응답합니다.
오늘의 이 장면과 가사 그리고 음악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그토록 아름답고 선한 일을 베풀어 주신 예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극적이고 아름다운 가사를 쓴 피칸더, 그리고 이에 곡을 입힌 바흐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음악사에서 가장 멋진 한 팀이었습니다. 자기보다 열다섯 살 어렸던 피칸더에게 바흐는 많은 문학적, 영적 조언을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피칸더는 원래 연인의 사랑에 관한 작품을 많이 남겼던 자유분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흐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함께 작업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다듬은 위대한 작가로 길이 남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바흐는 장인이요, 음악가요, 성직자요, 신학자이며 문학가이기도 하지만 저를 포함하여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피칸더에 관해서는 이 연재의 두 번째 시간에 다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fzari.com/902
오보에 다 캇치아
한편, 오늘의 음악에서 쓰인 오보에는 바흐의 음악에서 자주 쓰인 오보에 다 캇치아(Oboe da caccia)입니다. 우선 오보에족(族) 악기는 사람의 성대와 같이 두 개의 리드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악기로 여겨졌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만 해도 크게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로 구분되듯이 오보에도 그렇습니다. 소리를 내는 방식과 음색은 ‘오보에’나 ‘오보에 다모레(oboe d'amore)와 동일하지만, 오보에 다 캇치아는 크기도 크고 휘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부드럽고 낮은 소리를 냅니다. 이 악기는 음색과 음역에 있어서 오늘날의 오보에보다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 솔로에 쓰인 ‘잉글리시 호른’에 가까운 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과 같이 현대 오케스트라로 마태수난곡을 연주할 때에는 오보에 다 캇치아 대신 잉글리시 호른이 사용됩니다. 오보에 다모레는 일반 오보에보다 3도 낮고, 오보에 다 캇치아는 5도 낮습니다. 즉 소프라노의 소리는 ‘오보에’, 메조 소프라노의 소리는 ‘오보에 다모레’ 그리고 알토의 소리는 ‘오보에 다 캇치아’가 커버한 셈이지요. ‘캇치아(caccia)’는 이탈리아 말로 ‘사냥’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이 악기가 사냥에 쓰인 오보에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코르노 다 캇치아(Corno da caccia, 사냥 호른)’와 같이 구부러진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관을 구부러트린 것은 그 모양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관의 길이를 길게 해서 저음 영역을 확장하고 운지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보에 다 캇치아는 바흐와 동시대에 같은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했던 아이헨토프(J.H. Eichentopf, 1678~1769)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바흐와 아이헨토프의 관계는 바흐가 쾨텐의 궁정악장으로 일했을 때(1717~1723)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오보에 다 캇치아’라는 악기에 얽힌 이 두 장인의 역사적 만남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라이프치히시의 모든 음악을 총괄했던 바흐와 당대 최고 기술을 가진 악기 제작자 아이헨토프는 당시 그 도시의 인구가 3만 명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분명히 서로 어떤 형태로든 교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악기가 유독 바흐의 음악에 자주 쓰였고 바흐 이전과 그 이후의 음악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바흐의 창의성과 열정, 아이헨토프의 기술과 장인정신 등을 미루어 볼 때, 바흐가 아이헨토프에게 ‘오보에 다모레’보다 부드럽고 낮은 비슷한 음색의 악기 제작을 직접 의뢰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흐의 음악에서 오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바흐가 느끼기에는 일반 바로크 오보에뿐만 아니라 그보다 낮은 소리를 내는 오보에 다모레조차 날카롭고 발랄하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신 사랑과 상처로 얼룩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표현할 때 아쉬움이 있었지요. 그래서 바흐는 당시에 널리 쓰이고 있던 오보에 다모레를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노래할 때 사용했고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과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표현할 때에는 오보에 다 캇치아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실례로, 이 연재의 11번째 시간(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에 만나본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 ‘Wiewohl mein Herz in Tränen schwimmt,/예수께서 떠나신다니 내 마음이 눈물 속을 맴돕니다(18번 곡)’와 이어지는 아리아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내 마음 당신께 드립니다(19번 곡)’는 오늘의 곡과 같은 형식으로서 소프라노의 노래에 두 대의 오보에가 쓰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쓰인 오보에는 ‘오보에 다 카치아’가 아니라 ‘오보에 다모레’입니다. 오늘의 곡처럼 우리를 향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예수를 향한 우리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두 악기의 소리는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바흐처럼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있는 악기를 가지고 쉽게 작곡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흐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없던 악기를 새로 만들어 낼 정도로 실력뿐만 아니라 섬세한 열정을 지닌 장인(Meister)이었습니다. 음악의 장인 바흐, 문학의 장인 피칸더, 악기의 장인 아이헨토프 ....그들이 모여 마태수난곡이라는 이토록 놀라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장인들의 장인정신은 오늘날의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공들이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바흐처럼 피칸더처럼 그리고 아이헨토프처럼 그 분야의 장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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