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관련된 우리말 중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 즐겨 쓰지 못하는 말들이 있다. 안개비나 이슬비는 익숙해도 ‘는개’라는 말은 낯설지 싶다.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는개라 불렀다. 채찍처럼 쏟아진다고 하여 ‘채찍비’도 있었고,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린다 하여 ‘발비’도 있었다. 좍좍 내 리다가 금세 그치는 비는 ‘웃비’, 한쪽으로 해가 나면서 내리는 비는 ‘해비’나 ‘여우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비는 ‘먼지잼’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를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 라 했다던데, 가뭄 끝에 내리는 비는 너무 고마워서 ‘단비’ 혹 은 ‘약비’, ‘복비’라 부르기도 했다. ‘비그이’라는 말은 비가 올 때 잠깐 피하여 멎기를 기다리는 일이며, ‘비거스렁’이라는 말은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비빌이’는 가뭄에 비 오기를 비는 일로, 기우제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비와 관련된 말 중에 ‘비꽃’이란 말도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말한다. 비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 ‘비꽃이 듣는다’, 혹은 ‘비꽃이 피기 시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저 ‘비가 온다’ 하는 것보다 훨씬 운치 있고 그윽한 말이 될 것 같다. ‘비갈망’이라는 말도 있다. 장마철을 앞두고 비를 맞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뜻을 가진 말로 ‘비설거지’가 있다. 식사 후에 그릇을 씻는 일만 설거지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비설거지라는 말은 재미있지 싶은데, 비설거지라 함은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맞아서는 안 될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말한다. 천둥 번개가 치며 금방이 라도 비가 쏟아질 징조를 보이면 얼른 장독대를 덮든지 널어 놓은 곡식을 집안으로 들이든지 하는데, 바로 그것이 비설거지 였던 것이다.
어느새 우리들의 삶은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비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몇 개쯤은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비와 관련된 우리말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 히 몰랐던 말 몇 개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며 때에 맞는 이름을 애정으로 불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삶의 모 든 순간을 사랑하는 일도 될 것이다.
‘후둑후둑 비꽃이 듣기 시작하여 서둘러 비설거지를 끝내고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비가 내릴 때면 덩달아 마음이 우중 충해지기보다는, 누군가를 그리움으로 떠올리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한희철/정릉감리교회 목사, 동화작가
예글 나들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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