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상대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내면의 면모를 제대로 알기란 현실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부딪혀보고 겪어봐야 아는 것이고, 또 겪어보았다고 해서 상대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절대적으로 자신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상대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거나 불신해서 생기는 오해라는 것도 있고, 또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아주 묘한 상황이라는 것도 있으며 잘못된 정보에 의한 선입관이나 편견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단 상대를 한번 잘못 보면 그 어떤 일도 전혀 예쁘게 보이지 않고, 사사건건 흠잡을 일만 눈에 띄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적당히 위장할 줄도 아는 법이어서 그 위장된 이면을 아는 일이 쉽지 않을 경우가 있고, 또 끊임없이 변하기도 하는 존재여서 과거 어느 시점의 경험이 상대에 대한 판단의 영원한 근거가 될 수도 없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면모가 드러나는 반면에 저 사람에게는 그와는 전혀 다른 면모가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러니, 사람의 진실을 알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얽힘을 푸는 일만큼이나 우리에게 어려운 과제도 없다. 언제 어떤 경우에든 한결 같고, 진심을 다해 인간을 대하는 힘을 제대로 갖지 못하거나 기르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 이렇듯 어려울진데, 하물며 세상의 세력가들의 위선을 아는 일에야….
라틴 아메리카 우르과이의 뛰어난 지식인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Upside-down)라는 책이 있다. 거꾸로 된 세상은 우리에게 현실을 바꾸지 말고 참으라 하고, 과거의 소리를 듣지 말고 잊으라 하며,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리지 말고 받아들이라 한다. 그렇게 죄를 범하고, 또 그렇게 죄를 권한다. 범죄학교에서는 무능함, 기억상실, 체념이 수강해야 할 필수과목이다. 그러나 행운 없는 불운은 없고, 뒷면 없는 앞면도 없으며, 희망을 갈망하지 않는 실망도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대항(對抗) 학교 없는 학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갈레아노는 이 책을 통해서, 강자들의 위선을 아주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무기를 가장 많이 파는 국가들이 다름 아닌 세계평화를 책임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들에겐 천만다행으로 평화의 위협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전쟁 시장은 회복되어 짭짤한 수입원인 대량학살이 가져다줄 희망찬 전망을 보여준다. 마약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면서 마약퇴치를 그토록 부르짖는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무기산업은 어찌해서 도리어 옹호하고 나서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스위스의 은행에는 사실 세상의 가장 큰 도둑들의 돈이 몰려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힘을 꽤나 쓰는 이들이 은폐하고 있는 본심과 허위를 직시하라는 일깨움이다. 예수께서 하신 “저들은 잔의 겉은 깨끗하게 하려 하지만 그 속은 오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세상사의 파악이다.
“자본의 축적과 동시에, 비참한 현실의 축적도 이루어진다. 한쪽에서 부가 축적되면, 그와는 다른 반대쪽에서는 정신적 피폐함을 포함한 빈곤의 축적이 진행되고 마는 것이다.” 이 말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한 구절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을 축적해가는 성장의 이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꿰뚫어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에서 시장이란 바로 이런 두 가지 모순된 축적의 과정이 벌어지는 현장인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평등한 거래가 실현된다. 시장에서 민주주의란 없다. 자본의 발언권이 모든 것을 압도해 나가게 되어 있다. 하여, 저자는 이렇게 갈파한다.
“전체주의적으로 세계화된 질서는 손이 두 개 있어서 금융의 손이 재물을 갖다 주면 무역의 손이 낚아채 버린다. … 세계가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현실은 금융자본 범죄가 신문사회면에 등장하는 범죄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자본의 관심은 노동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노동력을 가진 사람의 행복에 있지 않다. 그걸 흔히들 “시장논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순은 일어난다. 다른 생산수단과는 달리, 노동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기계와는 구별되는 감정과 의지,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행복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자본의 출현은 극히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의 가장 확실한 상징은 어쩌면 물질은 숭상하고 인간은 까맣게 짓눌러 버리는 중성자탄일지도 모른다”고 자조한다.
바로 여기에서 갈레아노는 자본의 탐욕을 채우는 시장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역설한다. 이러한 저항의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부와 빈곤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사회적 양극화는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전제라는 점이다.
즉, 부의 집중이 성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상대적 빈곤을 전제로 한 부의 독점이 가능해질 때 자본주의 시장의 성장은 실현되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체제란, “승자 독식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방식은 자본이 없는 이들에게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승자의 대열에 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러한 현실에서 필연적이다. 자본의 발언권은 권력화되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발언권은 묵살 되고 있으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해보겠다면 그런 모순이 따로 없다. 권력이 자본과 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 민주주의적 양극화 해소는 진정한 답이 나오지 않음을 지적한다.
옮긴이가 언급했듯이 이 책은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읽고 난 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말랑말랑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인권과 계급을 다룬 르포르타주이기도 하다. 20세기 성장의 신화와 자본주의에 덮여있는 거품을 빼고, 시장경재와 신자유주의를 재해석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들춰내고, 현대적 생활방식이 지닐 수밖에 없는 불의를 고발한다.
그러나 그는 예리한 언어로 통렬하게 사회비판을 가하면서도 우아하고 예술적인 산문체 문장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또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물고 언어의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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