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 그리고 살려내라!!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6. 5. 30. 07:54

<꽃자리>의 종횡서해(26)

 

살라! 그리고 살려내라!!

 

책을 읽는다는 것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이 문장 앞에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바다는커녕 나태하고 안일한 일상조차 깨뜨리지 못하는 책을 꾸역꾸역 써대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삶의 안정을 교란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라면서 결국 독서란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라 말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위험한 일이다. 책장을 여는 순간 평온한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한 권의 책을 반복하여 읽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슨 일일까요?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중략) 그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이 세계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세계의 성립 근거를 찾아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77-80쪽).

 

그가 말하는 ‘이 세계의 질서’는 물론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교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성경을 읽고 또 읽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고 그들의 일상을 쥐락펴락하는 종교적 위계질서의 근거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교권체제는 허공 위에 세워진 집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걸 보는 순간 루터는 현기증을 느꼈다. 세계의 진정한 준거여야 할 텍스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권력이 아닌가? 그 결론은 너무 무섭다. 그렇기에 그는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미친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서운 질문 끝에 그는 변혁에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두려운 일이다. 별 생각 없이 문자만 따라 읽는다면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 년에 성경 몇 독(讀)을 하는지가 아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고갱이와 접속해 우리 삶을 변혁하는 것이다. 그 고갱이에 자기 삶을 버무리기 시작하는 순간 성경은 우리 무의식을 쥐어뜯을 뿐만 아니라 애써 봉인해 놓았던 부끄러움의 민낯을 드러내는 강력한 도끼날이 된다. 성경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그렇기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성경이라는 광맥을 통과해 나가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이들이 참 많다.

 

백소영 교수는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길 안내자이다.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지만 그는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눈은 대중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대중들의 욕망이 오롯이 투영된 다양한 문화 현상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풀어내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그에 못지 않게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성경 속에 깃든 가장 심오한 진리를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다.

 

 

 

 

《삶, 그 은총의 바다》는 CBS TV의 ‘성경 사랑방’에서 패널들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그는 비범한 이야기를 본래의 의미를 훼손함 없이 평범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인신제물을 받곤 하던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그 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테세우스를 연모했던 크레타의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 한 타래를 주면서 그 실을 풀면서 미궁에 들어가라 이른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자기가 풀어놓았던 줄을 따라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경을 미궁에 비유할 일은 아니지만 그 심오한 세계를 탐험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백소영 교수의 책은 그런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다.

 

텍스트가 발생한 자리

 

성경에는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숨결이 켜켜이 배어있다. 소멸의 운명에 매인 인간은 누구나 불멸을 동경한다. 불멸은 물론 시간의 영원한 연장이 아니다. 섬광처럼 열리는 영원의 빛 안에 서는 순간 소멸에의 공포는 스러진다. 성경은 소멸과 불멸, 순간과 영원이 교직하면서 만들어낸 일종의 태피스트리이다. 그 무늬는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분명한 것은 이런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성경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문학양식과 시대 배경, 저자들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시, 역사서, 예배서, 신학적 고백…, 언어의 양식도 다양하고 문학 장르도 풍부한 것이 성경입니다”(21쪽).

 

백소영에게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이다. 강물에 떠밀려온 퇴적물들이 이룬 섬처럼 성경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단순한 퇴적물이 아닌 것은 각 시대의 이야기를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초점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이다. 구원 이야기는 ‘구원이 필요한 특수한 상황’을 전제한다. 설교자들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그래야 구원이 필요성을 회중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절박함을 두루뭉수리로 뭉개고 만다. 백소영은 성경을 “인류 역사상 ‘을 공동체’의 체험이 세계적인 주류서적이 되어버린 아주 독특한 책”(13쪽)이라고 말한다.

 

위계질서가 엄연했던 세상에서 그 질서의 맨 밑바닥에 처했던 이들은 억압과 착취를 숙명인양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러나 야훼는 그런 질서는 숙명이 아니라 불의임을 일깨움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대한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위계사회에서 벗어난 탈출공동체는 가히 ‘을의 공동체’라 할만하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이라 해서 다 의롭거나 깨끗하지는 않다. 아름다운 꿈도 세월과 더불어 퇴색되고, 불씨처럼 숨겨져 있던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순간 역사는 또 다시 퇴행하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숨바꼭질이라 말하기도 한다. 저자가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굴곡진 삶을 자세히 살피는 것은 그 속에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대안적 비전이 현실의 욕망과 맞닥뜨리면서 어떻게 제한받고 때론 좌절되고 또 종종 배반되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건들을 통해 조명해 보았습니다”(13쪽).

 

인물들이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는 각기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리사니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백소영은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에 주목한다. 옛 사람들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박이약지(博而約之)라 했다. 제 아무리 폭넓게 섭렵한다 해도 그것을 하나의 초점으로 모을 수 없다면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을 일이관지하는 핵심 메시지가 창조주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잘 살아야 한다는 첫째 명령인 ‘창조(존재)명령’에 더하여 혼자서는 못 사는 데데한 생명체를 보듬어서 잘 살게 해주라는 ‘구원 명령’을 하나 더 받은 셈입니다”(32쪽).

 

창조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절 속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숨을 받은 존재인 만큼 제 숨을 쉬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구원 명령은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를 ‘다스리라’는 명령과 관련된다. 이것은 뭇 생명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거나 지배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두 명령은 생명을 풍성하게 ‘살아내라’는 말과 미약한 존재들을 '살게 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자기 생을 긍정하며 철저하게 살아내는 동시에 연약한 생명을 돌보아 살게 하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기초이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 알아차리기

 

《삶, 그 은총의 바다》의 가장 큰 미덕은 성경 이야기가 탄생한 맥락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그것은 저자가 다양한 성서 해석 방법론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이한 언어로 기술되고 있는 저자의 성서 해석은 실은 역사 비평, 양식 비평, 전승 비평, 문학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 등을 거친 결과물들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까닭은 해석에 이르는 긴 사유의 과정을 저자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야기의 맥락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성경 속에 감춰진 숨은 메시지와 접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원역사에 속하는 타락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이 왕정체제로 돌입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출애굽 공동체의 이상이었던 평등공동체의 꿈은 어느덧 망실되고,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가 공고해지면서 ‘살아내라’와 ‘살게 하라’는 하나님의 원초적 명령은 잊혀지고 말았다(38-39쪽). 권력을 독차지한 이들이 약자들을 억압하는 현실에 맞서 성서기자는 타락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는 것이다.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마다 근본으로 돌이켜야 하기 때문이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벽돌’이다. 바벨탑 이전까지는 건물을 지을 때 자연에서 얻거나 채취한 돌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규격의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고안되면서 힘을 가진 이들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남과 구별되는 건축물을 짓고 싶은 욕망이 커지면서 그들은 거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노동력을 얻는 데 골몰한다. 전쟁처럼 좋은 수단이 없다. 미국의 문명비평가인 루이스 멈퍼드는 고대인들이 전쟁을 수행한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영토 확장, 인력 수탈, 노역으로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약탈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문명이 국가 내부에서 촉진하는 동시에 격렬하게 억압한 국내적 충돌을 외부로 방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루이스 멈퍼드, 《인간의 전환》, 박홍규 옮김, 텍스트, 2011년 8월 5일, 70쪽). 바벨탑 이야기는 약소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제국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자기들을 신격화하려는 왕과 귀족들에 대한 경계였다. 저자는 여리고 성 함락 이후에 그 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야훼의 엄중한 경고(여호수아 6:26)를 동일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성곽을 쌓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순간 또 다시 권력관계가 발생하여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비인간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맥락화

 

창세기, 출애굽기,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중요한 가르침을 다루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저자의 시선이 성경 속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성경을 통해 열린 눈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현실을 살핀다. “성경 읽기에서 ‘맥락화(contextualization)’는 매우 중요”(191쪽)하다. 그래서일까?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던 히브리인 ‘아브람’ 이야기는 돌연 21세기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무차별 폭격으로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신산스런 처지와 연결된다(88쪽). 오직 하루분만 거둘 것을 요구받았던 광야의 ‘만나 이야기’는 투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십계명 역시 고리타분한 옛 규범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하게 적용되어야 할 삶의 원리가 된다. 저자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렇게 ‘맥락화’ 하고 있다.

 

“‘거짓 증거’라고 하니까 우리가 꼭 법정에 설 일이 있어야만 저지르는 행위 같지만, 실상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강요받는 크고 작은 ‘거짓 증거’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내부자들끼리 거짓증거물들을 모으고 거짓증거에 동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의료 사고 같은 것 말입니다. 전문가 집단인 의사들이 증거를 조작하면 평범한 일반인인 환자들로서는 진위를 파악하기 참 어렵습니다. 나는 그저 인턴일 뿐인데, 지도교수님이 하라는데, 할 수 없지, 뭐. 이렇게 정당화하면서 병원의 편에 서기 쉽습니다”(195쪽).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부하직원의 실적을 내 것으로 슬쩍 둔갑시키는 것, 시간 외로 일을 시키고 업무 범위 외의 일을 명령하는 것, 이런 것들도 다 ‘도둑질’입니다”(195쪽).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성경이 왜 여전히 우리 삶의 ‘척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낮은 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삶, 그 은총의 바다》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천대받는 이들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만났던 하갈, 생명을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 출애굽 공동체의 숨은 리더 여선지자 미리암, 약속의 땅에서 땅을 분깃으로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회막 앞에 나와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마침내 땅을 약속받았던 슬로브핫의 딸들, 여리고라는 위계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기꺼이 동참했던 기생 라합 등이다. 그들은 대개 검질긴 생명력으로 ‘살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부응한 이들인 동시에, ‘살리라’는 구원명령에도 충실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생명 살림의 길은 자신들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살리는 역할도 수행했다. 일종의 ‘사이-존재’인 그들은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가장 예리하게 알아차리곤 한다. 고대 세계에서 여성들은 약자 중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벽 위에서 살았던 라합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성벽은 성 안과 성 밖의 경계 지역이다. 성 안에도 속할 수 없고, 성 밖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 지역에서 살았기에 라합은 체제의 모순을 온 몸으로 실감했던 것이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남성들에게만 땅이 분배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당연'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땅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약속의 실현을 의미한다면 남성 가장이 없다 하여 자기 집안을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런 정당한 이의 제기를 하나님은 귀히 보셨고 법 자체를 바꾸도록 명령하셨다(민수기 27:6-9).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들이 없는 집이면 딸에게 먼저 여호와의 분깃이 가야 된다’는 법 조항을 만들게 한, 굉장히 놀라운 공동체적 변화를”(269쪽) 이루어냈다.

 

백소영은 성경의 난제들을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불뱀을 만나 어려움을 겪던 탈출공동체는 그 뱀을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한다. 하나님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이르신 후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칫 잘못하면 그 구리뱀이 우상으로 숭배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시를 내리신 까닭은 무엇일까?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문제는 해석이다. 백소영은 이 문제를 역시 생명 살림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구리뱀은 아직 안 물린 사람들이 아니라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에 대한 처방전이었습니다. 사랑의 상징이죠. 자기만 살겠다고 여호와 앞에 나온 건강한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구리뱀을 통해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함께, 다 사는 길을…”(256쪽).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대목은 적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헤렘)는 명령이다. ‘사는 것’과 ‘살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하신 하나님이 정말 다른 생명을 잔혹하게 죽이라 하셨을까?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갈 수도 없다. 백소영은 그것을 정복전쟁이 벌어지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무오류의 책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이어 ‘진멸하라’는 명령 속에 담긴 숨겨진 의미에 주목한다.

 

“헤렘의 명령에는 가나안적인 습속과 행위를 따라 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필요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을 탐하고 더 소유하려 하고 비윤리적인 종교의례를 따라하는 삶의 가능성을 ‘헤렘’하라는 것이 여호와의 본뜻이었다고,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313쪽).

 

백소영의 성경 해석은 생명 살림의 지혜와 새로운 세상의 꿈과 늘 접속되어 있다. 그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니지만 독자들은 그런 해석을 통해 성경을 읽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1꼭지의 글로 구성된 이 책이 마치 독자들에게 조근조근 말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구어체로 기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하나의 해석을 강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게 아닐까요?’ 하고 말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여유를 가지고 성경 이야기와 실존적으로 만나도록 주선하고 있다. 2권과 3권으로 이어질 그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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