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3)
정명훈 선생, 프란츠 리스트는 왜?
- 프란츠 리스트(3) -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와 작품은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덜 받은 부분은 작가로서의 리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물론 그는 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비교 대상이 거의 없는 피아니스트였고, 로베르트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처럼 음악 평론을 본격적으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당시 유럽이 그의 글을 주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한 21세기의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쓴 몇몇 글들은 지금 여기에서 읽어도 속이 후련하고 배울 바 또한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리스트가 남긴 저서, 에세이, 팸플릿 등의 글은 6권의 전집으로 나와 있습니다. 교회 음악의 미래와 예술가들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고발한 논문을 비롯하여 당대의 음악가들과 조르주 상드, 하인리히 하이네 등에게 보낸 편지가 제2권으로, 베토벤, 글루크, 베버, 벨리니, 도니체티, 바그너, 멘델스존, 슈베르트, 모차르트의 오페라나 음악을 논한 에세이가 제3권으로, 베를리오즈,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등의 작품 분석이 제4권으로, 보다 심층적 주제를 가지고 쓴 에세이가 제5권으로, 헝가리 집시 음악이 제6권으로 묶인 것입니다.
전집 1권은 그가 1852년에 출간한 Life of Chopin입니다. 리스트는 쇼팽이 39살에 요절한 지 3년 만에 그의 전기를 출간했습니다. 이 전기에 대한 음악사가들의 평가는 야박한 편입니다. 문학적으로는 빼어나지만 19세기에 나온 대다수 쇼팽의 전기들처럼 리스트의 전기도 “진실의 전달이라는 자료의 가치” 측면에서 큰 기여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그의 쇼팽 전기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습니다. 쇼팽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리스트가 내 연습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노라면, ‘나는 내 작품들이 괜찮은 곡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서 황홀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가 내 연습곡들을 연주하는 기법을 그로부터 훔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쇼팽은 리스트를 썩 좋아하지도, 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해서도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이벌 의식 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달랐습니다. 슈베르트처럼 쇼팽에 대해 호감 정도를 넘어서는 관심과 존경의 마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리스트는 자신이 좋아했던 쇼팽의 전기를 누구보다 먼저 썼습니다. 이 전기를 위해 그는 쇼팽의 여동생에게 질문지를 보내는 등, 나름 애도 많이 썼습니다. 쇼팽 여동생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21세기에도 세계적인 지휘자나 연주자가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이나 자기주장이 담긴 글을 발표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 리스트가 쇼팽 전기를 완성한 163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하물며 현역으로 뛰고 있는 연주자가 다른 연주자의 전기를 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자기에게 라이벌 의식 내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죽었을지 모를 피아니스트를 위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리스트는 쇼팽 전기를 썼던 것입니다.
작가 리스트에게서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글은 1835년에 쓴 <예술가의 지위에 대해서>라는 논문입니다. 1781년은 음악가의 지위와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해입니다. 25살이던 모차르트가 콜로제도 대사제와 충돌을 계기로 귀족과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25살 이전의 모차르트는 유럽에서 귀족의 총애를 받던 천재요 신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사제나 귀족의 노리개로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반항에 대한 대가로 그는 죽을 때까지 빈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 모차르트의 음악은 더 한층 매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 되었습니다. 독립 선언 이후 쓴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마술피리>(1791) 등의 오페라는 줄줄이 반 귀족, 반 계급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하이든도 1790년 30년간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궁전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베토벤 또한 1794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계약 작곡가가 됩니다. 178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이처럼 귀족의 보호 아래서 안정을 누리던 음악가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대다수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음악가란 자의식은커녕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로 비참한 생활을 면치 못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1808-1879)가 그린,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켜는 <곡예사의 퍼레이드>라는 그림은 19세기 대다수 음악가들이 어떤 처지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세기 초중반 음악가들의 지위는 귀족이 거느리는 시종 중에서도 하위직에 속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을 받던 모차르트조차 시종들 사이에서 식사를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모차르트가 타계하고 44년이 흘렀음에도 음악가들의 지위나 배고픔의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스트가 이런 논문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회를 향해 리스트는 “음악에 유보된 특권이나 사회적인 과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또한 그러한 특권이 없는 예술가의 굴복이나 그들에 대한 중상모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봅니다.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엄밀하게 또한 상세하게 규정해서 그의 정치적, 개인적, 종교적 관계를 설명하고, 그의 고통, 그의 불행, 그들의 곤궁함과 실망감을 기술하고, 그리고 늘 피 흘리는 상처의 붕대를 찢고 예술가를 상처 입히고 심하게 괴롭히고 영락시켜 그들을 장난감으로 이용하는 억압적인 불공정이나 파렴치에 대해 힘껏 항의하고, 그들의 과거를 검증하고,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며 그들의 훌륭한 능력을 세상에 알려 (……)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우리의 과제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한 마디로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 그렇다면 그것은 훌륭하고 멋진 과제일 것이다.
당시 그의 국제적 위치를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입니다. 《음악가의 생활사》에서 니시하라 미노루는, “리스트만큼 당시 음악계나 사회에 분노한 작곡가는 없었다”고 썼습니다. 1835년은 리스트의 피아니스트로서 기량이 절정이었을 때입니다. 1960년대의 비틀즈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한 도시나 나라의 영웅이 아니라 전 유럽의 스타 중 스타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연애가 시작되어 1835년 5월엔 스위스에서 도망하여 백작 부인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리스트는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근신하며 조용히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리스트는 가장 낮은 처치에 있는 삼류 음악가들의 고통을 더는 못 참고 도발적인 논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음악적으로든 1835년 당시, 아니 리스트의 평생은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2-3년 사이에 성년이 된 딸과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당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리스트의 이 논문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리스트는 말로만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음악가들을 걱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수백 명의 제자들을 무료로 레슨하고, 당시에 주목받지 않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글로 옹호하고, 자기가 지휘하는 연주회를 통해 등단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대선배들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하여 보급한 것이야 후배로 마땅한 일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도니체티, 벨리니 등의 음악가들의 작품을 편곡하여 직접 연주까지 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정명훈 이야기를 피해갈 수가 없네요. 리스트에게 그랬듯 정명훈에게도 프랑스 파리는 그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를 맡으면서부터였으니 말입니다. 리스트처럼 정명훈 역시 피아니스트로 시작해서 지휘자로도 성공을 했습니다.
정명훈이 프랑스 작곡가의 음악만으로 명성을 얻은 건 아니지만 그의 레퍼토리에서 프랑스 음악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베를리오즈, 메시앙, 라벨, 생상스, 비제 등 프랑스 음악가들의 작품을 꽤나 많이 녹음을 했고, 그 중에 몇몇 음반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정명훈이 지휘한 리스트 음반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검색을 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음반이 없다고 콘서트에서 리스트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정명훈의 음반은 독일, 이태리, 프랑스, 러시아 등 크게 편식이 없고, 시대도 고전시대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합니다. 때문에 정명훈의 음반에서 리스트의 음반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다소 의아합니다.
정명훈은 리스트가 싫은 것일까요?
저로써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가 아는 바는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프란츠 리스트 음반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이고, 제가 기억하는 바는 몇 년 전 국립 오페라단이 해체 위기에 몰려 절박한 도움을 청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한 일입니다.
백보 양보하여 당시 그를 찾아갔던 사람들이 약속 없이, 그것도 심야에 불쑥 찾아간 결례 때문에 그날의 서명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매너가 문제였다면 이후에라도 거리로 내몰린 음악가들을 위해 서명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명훈은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이 땅의 가난한 음악가들이 당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리스트는 달랐습니다. 1848년 2월에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을 때 그는 바이마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괴테와 실러로 유명한 바이마르는 리스트 당시에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 도시였습니다. 그는 1848년의 혁명적 상황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선 리스트는 4중창과 남성합창을 위한 <노동자의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이 노래의 독일어 제목을 보니 ‘아르바이트…’로 시작되더군요.
이때 바그너는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지명 수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상착의를 그려 넣은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던 일은 유명합니다. 이때 리스트는 드레스덴 경찰서까지 달려가 바그너를 구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바그너가 스위스로 피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해 8월에 바그너는 답방 형식으로 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에 왔습니다. 바이마르의 시각에서 보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너무 불온하고, 게다가 여자관계까지 복잡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바이마르 행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싶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 중에는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리스트는 3개월 후인 11월 12일에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바이마르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탄호이저> 오페라의 전곡 상연을 주장했습니다. 돈 문제가 깨끗하지 않은 바그너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가 손을 내밀 때마다 도왔습니다. 그 때문인지 바그너는 1876년의 바이로이트 축제 때 순례객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믿어준 분이 저기 앉아 계십니다. 저분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내 음악을 한 음표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다의 다정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정명훈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음악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음악계 한편에선 그가 순결한 그의 이미지 뒤에서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놓고 흥분하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작년 연말과 올해 초 서울시향 대표와의 갈등을 통해 그의 문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긴 했지만 말입니다.
리스트는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때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가라고 음악 이야기만 하고, 사제라고 영적인 이야기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리스트는 <노동자의 합창>을 쓴 꼭 10년 뒤에도 독일 교원협회에 남성합창 한 곡을 헌정했습니다. ‘제 10회 전 독일 교원집회 개회 축하노래’를 작곡한 것입니다. 1850년대의 유럽은 ‘지독한 반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교원협회 창립을 축하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리스트가 몰랐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리스트는 위험을 감수했을까요? 이덕희가 잘 말한 것처럼 그에게 음악이란 “세계를 포용해야 하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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