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4)
콘서트 나들이 울렁증
며칠 전 예술의전당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티켓을 처음 구매한 분이 갑자기 모 소설가 북 콘서트 사회 일정이 겹쳐 표를 후배에게 넘겼습니다. 저도 아는 그 후배 역시 연주회 당일에 메르스 긴급 대책회의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제게 왔습니다. 서울시향 연주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 가물거리고, 그날의 레퍼토리 중에 라이브로 쉽게 접할 수 없는 슈만의 ‘2번 교향곡 다장조’가 들어 있어 콘서트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그날의 서울시향 연주를 시청하지 못한 대다수 독자들을 앞에 두고 곡목 해설을 길게 하거나, 전문적인 연주회 비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럴 능력도 제겐 없습니다. 때문에 지난 6월 10일의 서울시향 콘서트의 음악평이 궁금하신 분은 전문 평론가의 글을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글은 서울시향의 6월 10일 연주회를 주제로 한 음악적 수다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콘서트 나들이 울렁증’이라 붙인 것은 아직도 클래식 콘서트에 가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중반엔 볼만 한 콘서트가 많지 않았습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이 없던 시절이었지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도 요즘처럼 매일 콘서트가 열린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호주머니 사정으로 좋은 콘서트 시청이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연주회 소식이 있으면 친구들과 무작정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갔습니다. 혹시나 약속이 펑크나 나서 어떤 사람이 티켓을 흔들어 보이며 “표 필요하신 분!”이란 소리에 저요, 라고 대답할 야무진 행운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혹시 맘 착한 국립극장 직원의 눈에 띄어 연주회가 시작되고 난 후에 슬쩍 들여보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 극장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입장하는 사람들만 쳐다보다가 터덜터덜 장충동 고개를 내려오던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음악을 공부하던 대학시절에도 콘서트를 자주 갈 순 없었습니다. 허구한 날 친구들에게 점심 얻어먹을 수는 없어서 200원짜리 에이스를 사서 연습실로 올라가 피아노만 두들기던 시절이었으니, 어떻게 콘서트 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결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교육 전도사이다 보니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저녁은 교회 프로그램에 묶여 콘서트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연주회는 대게 그런 요일에 열렸는데 말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의전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콘서트홀에서 요일 구분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매일같이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집 근처의 예술의전당은 저녁 콘서트는 물론 오후 4-5시 연주도 거의 상설화되었습니다. 음악당 소극장에서는 리사이틀이 열리기도 합니다. 토요일 오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유명 지휘자가 조직한 젊은 오케스트라의 신선한 연주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콘서트 못 가서 안달하던 시절엔 돈도, 시간도, 콘서트 일정도 모두 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다녀 온 클래식 콘서트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때보다 많은 여유가 생겼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는 콘서트 나들이가 뜸합니다. 제 음악 생활의 상당 부분은 연주회 밖에서, 그러니까 오디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오디오 생활에 익숙해진 탓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콘서트 나들이를 주저하게 만드는 여러 이유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 더 큽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쩌다 다녀오는 클래식 콘서트 중 좋은 추억으로 남은 연주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연의 질에 실망한 적도 없지 않지만 연주회장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핸섬하게 차려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더 불편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이 땅의 민주화나 어려운 사람들과의 연대를 거의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궁예처럼 콘서트홀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근사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나 이전의 활동을 뚫어볼 독심술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클래식 음악계와 마니아들이 우리 사회 문제와 관련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어느 정도 압니다. 엄혹했던 지난 30~40년 동안, 이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와 소수자 인권 신장에 클래식 연주자나 연주단체, 또는 음악대학 등에서 성명서나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동참했다는 소릴 저는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 문학계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대중음악계나 미술계에서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에 대해 단체의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만 거리로 나오거나 입장을 밝혔지요.
클래식 마니아들을 보며 가장 황당했던 일은 푸르트벵글러란 지휘자가 1942년 히틀러의 53회 생일 전야에 열렸던 축하 콘서트 음반이 국내에 수입, 발매되었을 때입니다. 그 연주회에는 히틀러와 그 측근들이 총출동하였고, 콘서트를 메운 대다수 청중은 제복을 입은 고급 장교들이었습니다. 우측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대형 깃발 ‘하겐 크로이츠’가 걸려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반 출시에 대해 클래식 마니아들이 “교주님 만세!”를 외치는 듯한 환호 일색의 온라인 반응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더군요. 몹시 역겨웠습니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좋고 푸르트벵글러란 지휘자를 좋아해도 그렇지, 하루에도 수만 명의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내 죽게 만든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축하 연주에 어떻게 저렇게 열광할 수 있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으니 연주회장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핸섬하게 차려있는 사람들, 특히 콘서트홀 로비에서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하면서 교양을 즐기는 분들을 보며 제 시선이 고울 리 있었겠습니까.
서울시향의 이전과 달라진 풍경은 연주 시작이 10여 분 남았는데 미리 자리를 잡고 소리를 내는 단원들이 보였다는 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최고 교향악단에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단원들이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 약간 놀랐습니다. 이류나 삼류 오케스트라에서는 종종 보았지만 일류 오케스트라에선 좀처럼 보지 못한 풍경이었거든요. 그런 광경은 휴식 시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호른을 연주하는 외국 연주자가 일찍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소리를 내더군요.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콘서트에는 의아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연주회였는데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8명이 아니라 6명이었더군요. 아무리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스케일이 큰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 연주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6명인 오케스트라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실내악단이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연주 인원이 보통 때보다 훨씬 작습니다. 하지만 지방 음악대학 콘서트가 아니라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에서 콘트라베이스가 6명만 출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바순과 오보에를 비롯한 목관악기들은 거의 4관 편성(목관 악기가 각 파트마다 4명)이었기 때문에 콘트라베이스는 8명이 아니라 9명이나 10명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때문인지 1층 D열, 그러니까 거의 정중앙에 위치한 제 자리에서도 서울시향의 중저음은 적잖이 답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슈만 교향곡 2번 스코어에는 튜바가 없는 걸고 기억하는데, 이날 연주회에서는 어쩐 일인지 튜바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슈만의 교향곡 2번 동영상을 여러 개 봤지만 튜바가 연주하는 장면은 없었거든요. 이것이 지휘자의 선택이었을까요? 그 또한 모르겠습니다.
이날 연주회에서 제일 신경이 거슬리는 것은 금관 파트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서울시향 시절에 비해 현제 단원들의 실력이 월등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거기 있었습니다. 지휘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연주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그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실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반대란 사실을 말입니다. 실력이 없는 단원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설 때 어떤 연주자는 오버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크게 내면서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지요. 하모니가 중요한 합주나 합창에서 이런 행위는 결코 연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날 서울시향을 객원 지휘한 독일 출신의 콘스탄틴 트링크스는 정명훈보다는 한 수 아래입니다. 나이도 연주경험도 말입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 사람들이 서울시향 단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금관파트가 저는 좀 나댄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정명훈이 지휘를 했더라도 금관 파트가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큰 소리를 펑펑 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맡고 난 뒤 일취월장한 파트가 제1바이올린이란 사실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저도 이번 콘서트 나들이에서 그 점을 확인했습니다. 서울시향을 처음 지휘한 트링크스는 좀처럼 연주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청중의 박수를 유도했습니다.
지휘자들은 특히 그날 중요한 솔로를 담당했던 연주자나 한 파트를 따로 일으켜 세웁니다. 이때의 파트는 목관이나 금관일 경우가 많습니다. 제1바이올린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박수를 유도하는 지휘자는 드뭅니다. 저는 아예 그런 지휘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콘서트홀에서건 DVD나 블루레이 영상물에서든 말입니다. 그런데 트링크스 지휘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제1바이올린 파트의 팀워크가 지휘자 보기에도 매우 좋았던 모양입니다.
다행이다 싶은 건 서울시향 단원의 성비 구성이었습니다. 지금 대다수 대한민국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여성 천국입니다. 이는 세계 오케스트라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1842년에 창단되어 세계에서 가장 실력과 전통을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은 1997년에서야 여성 단체의 항의와 시의회에 압력에 굴복해서 하피스트 안나 렐케스를 정식 단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하프 연주가 들어가는 곡이 매우 적기 때문에 사실상은 여성 단원이 없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한 2003년 미국 공연 때는, 현지 여성 단체와 시민단체의 항의 시위를 걱정, 빈 슈타츠오퍼에서 2명의 여성 단원이 순회 연주에 동행했습니다. 빈 필하모닉의 지금 사정은 그때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2011년에는 여성 악장이 임명되었고, 현재 총 4명의 여성 단원이 활동하고 있거든요.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던 빈 필하모닉이 더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원의 80-90퍼센트를 여성 단원으로 채우고 있는 대한민국 오케스트라는 빈 필하모닉에 비해 매우 진보적이란 의미일까요? 저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 아이들 중 왜 유독 딸들만 음악을 전공을 많이 시킬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대한민국 오케스트라가 여성 천국인 이유에 대한 답이 얼추 나옵니다. 21세기의 한국 오케스트라의 구성원 중 대다수가 여성이란 사실은 우리 사회 지도층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전한, ‘음악은 광대나 하는 짓거리’라는 생각일지 모릅니다. 만약 그게 옳다면 대한민국 오케스트라가 여성 천국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아직도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요.
물론 저는 현대 오케스트라가 여성과 남성 비율을 50대 50으로 구성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에는 여성이 유리한 악기가 있고 남성에게 유리한 악기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관악기, 특히 금관 악기에서는 절대적으로 남성이 유리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든 음악에서 파워가 중요하진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파워보다는 예술성과 테크닉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말러나 브루크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연주력이 뛰어나더라도 파워가 없다면 이들 작곡가의 스펙터클하게 매우 연주 시간이 긴 작품을 끝까지 연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스포츠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대결을 동등한 조건이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어떨까요? 저는 스포츠와 유사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남성 단원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를 볼 때마다 늘 심사가 복잡했던 이유는 이런 현상을 결코 정상적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시향 콘서트 나들이에서 서울시향의 금관 파트가 거의 남성으로 구성된 점, 그리고 전체 남성과 여성 단원의 비율이 3대 4였던 점은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입니다. 서울시향의 남녀 구성 비율이 다른 오케스트라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합니다. 아쉬웠던 점은, 정명훈이 지휘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서울시향의 전석 매진을 구가하던 예전만 못해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1층의 많은 좌석이 텅텅 빈 것입니다. 빈 좌석은 오케스트라 뒤의 합창석도, 2-3층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서울시향 연주가 늘 성황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다른 상황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주 콘서트홀을 자주 찾는 것입니다. 누가 이 점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민이 자주 콘서트에 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클래식 음악회 티켓 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이지만 대한민국의 콘서트홀이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결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실이 세계에 너무 많이 알려져서 일부 연주자들이 내한 공연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일류 오케스트라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연주회를 열면 티켓 한 장 값이 몇 십만 원입니다. 서민이라도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는 적금을 부어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개월 동안은 음악 없이 살다가 1년에 한 두 차례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저 오케스트라를 사람들이 왜 세계적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날 연주되는 음악을 충분히 알고, 다른 연주 단체의 음악을 자주 접하며 변별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몇 십 만원씩 주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가는 일이 저는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같은 곡의 서로 다른 연주를 충분히 익히는 것이 자신의 음악 생활을 훨씬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 경제적 수준에 맞는 오디오를 장만하고 일상생활 속으로 클래식 음악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음악 생활이 전제될 때에만 돈을 저축하여 어렵게 찾는 콘서트에서 듣는 음악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제까지 쓴 정도의 분량이 더 필요하지 싶습니다. 콘서트홀에서 듣는 라이브 음악의 차이와 오디오를 듣는 라이브 음악의 차이를 누구나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다음의 과제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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