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십계명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에서 탈출한지 석 달째 되던 초하룻날 그들은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시내 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산기슭에 진을 치고 몸을 정결하게 씻고 옷도 깨끗이 빨아 입고 부부관계도 갖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계명을 받을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 달리 모세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이 직접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다른 모든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줬지만 십계명만은 직접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거다. 십계명이 다른 계명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십계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열 계명을 모두 외우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걸 전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이가 좀 되는 사람은 십계명을 세실 B. 드밀 감독이 연출하고 찰톤 헤스톤이 모세로, 율 부리너가 파라오로 출연한 1956년 영화 <십계 The Ten Commandments>를 통해 친숙해졌을 거다. 아무래도 글자보다는 영상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니 말이다. 나도 어렸을 때 본 이 영화의 여러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래저래 사람들은 십계명을 알고 있다.
“이봐, 우린 이 얘기를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하네!”
1980년대 말 어느 날, 폴란드 어딘가에서 한 변호사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봐. 크리스토프, 우린 이 얘기를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하네.” 이 말은 크리스토프 피에시비치(Krzysztof Piesiewicz)가 크리스토프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ślowski)에게 했다는 말이다. 이후 둘은 의기투합해서 몇 달간 두문불출, 영화대본을 썼는데 그게 한 시간짜리 영화 열편으로 이루어진 <십계명 The Decalogue>이다. 키에슬롭스키는 훗날 <베로니크의 이중생활 The Double Life of Veronique>과 ‘칼라 삼부작’ <블루> <화이트> <레드>을 감독해서 거장의 반열에 들어갔지만 그때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천국, 연옥, 지옥 삼부작을 구상하던 중 1996년에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영화는 한 편이 각각 한 계명씩 다루는데 계명을 세는 방식이 교단마다 다르다. 유대교 식, 가톨릭 및 루터교 식, 개신교 및 성공회 식과 정교회 식이 그것이다. 유대교 식은 탈무드 전통을 따라서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를 첫째 계명으로,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우상을 만들지 말라.”를 합쳐서 둘째 계명으로 헤아리고 나머지는 개신교 식과 동일하다. 가톨릭과 루터교 식은 성 어거스틴의 전통에 따라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우상을 만들지 말라”를 합쳐서 첫째 계명으로 시고 마지막 계명을 둘로 나눠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를 각각 아홉째와 열째 계명으로 센다. 개신교와 희랍정교회, 영국 성공회는 널리 알려진 대로 세는데 영화는 가톨릭과 루터교 방식을 따른다.
영화가 가진 장점 중 하나는 십계명을 하느님 편에서 보지 않고 사람 편에서 본다는 데 있다. 곧 계명을 준 하느님의 뜻이 뭔지를 묻기보다는 계명을 받아서 그걸 지키든 어기든 왜곡하든 무시하든 간에 거기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중심으로 얘길 풀어간다는 말이다. 필자도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하,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무릎을 쳤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화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계명을 직접 설명하거나 설교하려 하지 않는 점이다. 영화를 잘 보지 않으면 어떤 계명을 다루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예컨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와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루는 첫 편엔 ‘하느님’과 ‘종교’에 대한 얘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와 계명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영화와 각 계명의 관계는 임시적이고 시험적이다. 영화는 각 계명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그 만큼만 계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계명과 일상의 관련성을 찾아내지 못하면 계명과 영화의 관련성도 찾아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 되겠다. 영화는 계명을 직접 표현하지 않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계명이 눈에 띄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란 말이 되겠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바르샤바의 한 고층 아파트다. 등장인물들도 아파트 주민이거나 관련자들이다. 감독에게 1980년대는 세계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때다. 사회주의 체제는 흔들리고 마르크스주의도 종교도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그는 여러 나라를 여행한 후 세계가 비슷한 병을 앓고 있음을 목격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가? 정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고 토로한 적이 있단다. 영화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녹아있다. 그는 십계명에서 세계가 앓는 병을 치유할 길을 찾으려 했던 거다. 그래서 《크리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십계명 시리즈 Krzysztof Kieslowski's Decalogue Series》라는 책을 쓴 크리스토퍼 갤보우스키(Christopher Garbowski)는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들 존재의 세세한 부분들을 초월하고 싶어 하는 의식적이거나 반의식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고 썼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야망, 돈, 성공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물들어 있지 않다. 영화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고 인물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보다는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질문에 그치지 않고 답을 찾고 싶다
이 글은 영화와는 관점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영화의 관점을 수용하면서 하느님이 십계명을 통해서 사람에게 뭘 바라는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는 문제만 던져주고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게 답을 주기보다 더 깊고 긴 여운이 남길 수 있긴 하지만 나는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기 바란다. 곧 하느님 편에서도 바라보려 한다는 뜻이다. 내가 찾아낸 답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기반으로 독자 자신의 대답을 찾기 바란다.
십계명에 대한 글은 엄청나게 많다. 거기에 또 하나의 글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각각의 계명은 너무도 지당하지 않은가. 부모를 공경하라거나 살인하지 말라거나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등은 하느님과 무관하게 너무도 지당한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우린 실제로 이 지당한 계명을 매일 어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법이 의심할 바 없이 옳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우린 이 법을 매일 어기고 있다. 우리는 인생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지금 우린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 대해 성찰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누군가 십계명 얘기를 해주기 바라는 것 같다.”
십계명은 법이 아닌 근본정신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한지 석 달째 되는 달 초하룻날에 시내 산기슭에 진을 쳤다. 하느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서 백성들과 언약(covenant)을 맺겠다고 선언한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3-6).
십계명은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 십계명의 현재 형태는 출애굽 당시의 그것이 아니라 그 후의 오랜 세월을 거친 발전과 변형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의 제도적 삶이 어떻게 달라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사회구조와 신앙공동체로서 제의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준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십계명의 형태에 이사야, 아모스, 미가, 호세아 등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형태가 어느 시기를 반영하든 십계명의 뿌리는 출애굽 사건이라는 데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십계명의 연대(年代)와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학문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으니 거기에 너무 신경을 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우리네 삶속에서 갖는 의미와 역할이겠다.
십계명을 흔히 법(law)이나 계명(commandment)으로 부르는데 거기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선 ‘법’이라면 어겼을 때 따르는 처벌이 명기되어 있어야 하는데 십계명에는 그게 없다. 처벌 조항이 없는 법이 어디 있는가. 다음으로 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다스리고 규제할 뿐 생각과 마음까지 다스리려 하지 않는데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탐심을 금함으로써 규제의 범위를 사람의 내면으로 확장한다. “네 이웃의 아내와 집을 탐내지 못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것을 ‘법’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십계명은 뭘까? 법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것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근본정신이다. 하느님 백성이 생명과 자유, 해방과 평등의 공동체를 유지하도록 하는 토대가 되는 근본 질서다. 곧 하느님 백성의 대헌장 또는 독립선언문 같은 것이란 얘기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훗날 이스라엘로 불리게 될 히브리 노예들은 출애굽사건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들어준 야훼 하느님의 의지와 힘과 카리스마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그래서 야훼는 십계명을 주기 전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한 거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자신은 출애굽 사건을 일으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신이란다. 왜? 도대체 왜 야훼는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켰을까?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그들로 자유롭게 살게 하려고? 아니다! 야훼는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그들 맘대로 자유롭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출애굽 사건은 거짓 신을 예배하고 섬기며 정의롭지 않은 사회 안에서 억압당하며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참된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하려고 야훼가 일으킨 해방과 구원의 사건이었다. 타의에 의한 속박에서 풀려나 자발적으로 참된 하느님을 자유롭게 섬기며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일으킨 구원사건이란 얘기다. 곧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사건이었다.
사람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일까“ 사람은 무한한 자유를 누릴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을까? 사람은 발달된 과학의 소산을 공정하게 사용할 지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나? 그렇다면 한쪽에선 식량이 밑에서부터 썩어 가는데 다른 쪽에선 하루에 수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걸까? 이런 상황을 보면 사람은 어디든 속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문제는 어디에 묶이고 누구에게 속박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거짓된 신을 믿고 예배하고 불의한 질서에 속박되는가, 아니면 참된 신을 믿고 예배하고 정의로운 질서에 속박되는가의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십계명은 이와 같은 공동체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정신이요 근본질서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맘몬 신을 섬기는 오늘의 세계에서 세상질서에 거스르며 살라는 반문화적 삶(a counter-cultural way of life)에로의 부르심이 되겠다. 이런 전제 위에서 다음 글부터는 열 가지 계명을 하나하나 읽어 보자는 거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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