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8)
이카로스를 그리며
석양에 비낀 해가 유난히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은 올해도 역시 엄벙덤벙 설미지근하게 살아왔다는 자책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알차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 여행자인 우리는 마치 버릇인양 현재를 누리지 못한다. 세상은 요란한데, 마음은 고적하기만 하다.
16세기의 벨기에 화가인 브뤼겔의 <이카로스의 추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화가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프 삼아서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해를 화폭에 담고 있다. 미노스 왕의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밀랍으로 이어붙인 날개를 달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던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다가갔다가 밀랍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만 바다로 추락하고 만 인물이다. 어쩌면 신화는 신의 세계를 넘보는 인간의 욕망이, 그 과도한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뤼겔의 <이카로스의 추락>
그림 속의 이카로스는 바다에 처박힌 채 두 다리만 버둥거리고 있다. 그런데 세상 참 무심하지. 이카로스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어부는 낚시질에 여념 없고, 목동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먼 데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에 떠 있는 범선조차 물살 위를 미끄러지며 태평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해의 위치이다. 마땅히 화면의 중앙 높은 곳에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어야 할 해가, 한 사람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까무룩 넘어가려 하고 있다. 그림 전체의 톤은 밝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신산스런 삶의 무게가 절로 체감된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했던 코헬렛의 마음이 절로 느꺼워진다. 누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오불관언의 태도를 취하는 세상은 무서운 세상이다.
역사란 친밀함을 향한 다가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은 점점 낯선 곳으로 변해간다. 실존주의자들의 느꼈던 고향상실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부릴 곳이 없어 방황하는 이들이 많다.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 보아도 마음의 정처를 잃은 발걸음은 허둥댈 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명품으로 치장해 보아도 마음의 스산함은 가릴 수 없다. ‘나 아무렇지도 않아’, 짐짓 명랑하게 말해보아도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는 좀처럼 스러지지 않는다. 육체가 아닌 정신에도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일까?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시대이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안보. 어디를 보아도 상서로운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
일전에 텔레비전을 통해 몽골의 차탕 마을이 소개된 것을 보았다. 그들은 커다란 뿔을 가진 순록을 좇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의 리듬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해 뜨면 일어나 순록을 몰고 나가 일하다가, 해 지면 누워 잠을 잔다. 풀과 이끼류를 따라 순록이 이동하면 그들도 게르를 걷어 순록의 뒤를 따른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제 더 이상 순록을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 차강노루 호수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자기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순록의 등에 관광객들을 태워주면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순록은 이제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다. 차강노루 호숫가의 순록들은 달리지 못한다. 엉금엉금 걸을 뿐이다. 하늘을 보거나, 질주하지 못하도록 뿔과 앞다리를 끈으로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순록의 눈이 참 슬퍼보였다.
하늘을 볼 수 없는 순록,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자유로운 질주는 불가능하다. 하늘을 볼 수도 없다. 하늘을 잃는 순간 삶은 엄청난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이카로스처럼 비상을 꿈꾸는 불온한 사람이 그리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는가? 창공이 아닌 다른 하늘은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다가섬을 통해 열린다는 사실을. 비록 무거리 같은 존재라 해도 하늘을 여는 기쁨을 맛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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