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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한 걸음 속에 인생이 있다

by 한종호 2015. 7. 8.

김기석의 톺아보기(7)

 

한 걸음 속에 인생이 있다

 

 

삶이 암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흐르는 모래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아득한 무력감,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아스라한 공포가 밀려오면 세상은 아연 잿빛으로 변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호기롭게 지내던 시절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늪과 같은 시간이 시작된다. 그 계기는 다양하다. 예기치 않은 질병이나 사고, 이별의 쓰라림이나 실패가 가장 흔한 원인이지만 전혀 계기가 없는 경우도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게오르그 잠자처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한 자기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늪과 같은 시간을 거쳐 온 한 젊은이의 고백을 들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는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과 처절하게 맞서야 했다. 어쩌면 평생 다리를 절며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고통은 줄어들었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곳에서 찾아와 영혼을 거덜내는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할 때 댕돌같던 젊은이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어느 정도 회복되어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지날 때면 자기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못 견디게 싫었다.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시선이 낮아지자 크고 높은 것들이 그 존재 자체로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친구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느릿느릿 그들 뒤를 따라가는 동안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늦추자 침묵하고 있던 세상이 그에게 말을 건네 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사물들과 사람들을 다정하게 바라보자 어느 순간 무력감과 공포가 물러갔다.

 

예기치 않았던 사고는 그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게 해주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생을 원망이나 투덜거림으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무겁고 전망 또한 불투명했다. 이야기를 마친 젊은이는 망연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시련이 닥쳐올 때 믿음은 우리의 버팀목이고, 우리에게 버틸 힘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문제의 크기에 압도당하지 말라고, 큰 바위를 옮길 힘이 없거든 그것을 잘게 부수는 연습을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삶은 성심을 다해 내딛는 한 걸음으로 이루어진다고도 말한 것 같다. 우리가 걸어온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가 시간 속에 새겨놓은 흔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징표라는 말과 함께. 지금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바로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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