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5)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往來)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萬一) 공의(公義)를 행(行)하며 진리(眞理)를 구(求)하는 자(者)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城)을 사(赦)하리라”(예레미야 5:1).
좋아하는 노래 중에 ‘내가 찾는 아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가사도 곡도 모두 예뻐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맑아지는데,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넓은 세상 볼 줄 알고 작은 풀잎 사랑하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내일 일은 잘 모르고 오늘만을 사랑하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내 마음이 맑은 때나 얼핏 꿈에 볼 수 있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 노래 불러 주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빈 주머니 걱정돼도 사랑으로 채워주는
워~ 흔히 없지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매일 볼 수 있지
인권이형 성원이형 창원이형 훈이형 진태도
워~ 볼 수 있지 예~ 볼 수 있지
워~ 모두 다지 예~ 모두 다지
내가 찾는 아이는 따로 있는데 그런 아이는 흔히 볼 수 없다며 노래를 이어가다가, 끝부분에 이르러 주변에 있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내가 찾는 아이는 매일 볼 수 있다고, 실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내가 찾는 아이라며 노래를 마친다. 세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그 한 사람을 찾아보라 하신다. 도대체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서둘러 찾으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찾고 있는 한 사람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이다.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새번역)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공동번역)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성경)
하나님이 한 사람을 찾으신다니 그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일까 싶은데, 뜻밖에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믿음의 투사나 영웅을 찾는 것이 아니다. 흠과 결점은 손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결점의 사람도 아니다.
한결 같이 바르고 올곧게 사는 사람, 그래서 믿음직한 사람, 어찌 보면 하나님이 찾는 사람치고는 너무 시시하고 밋밋하게 보일 만큼 평범한 사람을 찾고 계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서둘러 찾으라는 것일까? 그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사하다’, 곧 ‘용서하다’를 뜻하는 히브리 동사 <살라흐>의 주어가 구약성서에서는 야훼 하나님뿐이시다. -박동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을 찾으면 한 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찾는 한 사람이 뜻밖인 것처럼, 한 사람을 찾으면 한 성을 용서하겠다는 것도 뜻밖이다. 천칭 저울에 한 사람과 한 성을 올리면 이내 한쪽은 가라앉고 한쪽은 번쩍 들릴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성은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한 쪽은 가볍고 한 쪽은 중하게 여겨진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이 찾는 한 사람만 찾으면 한 성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을 당한다(창세기 18장).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이 땅을 명망 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하여, 결국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를 쏟아 붓고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키는데, 그 또한 그렇게 하는 사람 한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에스겔 22:30-31).
오십 보 도망간 놈이 백 보 도망간 놈 보고 비겁하다 말하기는 쉽다. 중심과 방향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는 세상, 그럴수록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된다. 한 사람에게 한 성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안일하게 살아서도 안 된다. 한 도시가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다수가 아닌 한 사람을 찾아, 그가 사는 성을 용서하신다.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다. ‘너에게’라 하지 않으시고 ‘집’이라 하신다. ‘집’이란 그가 속한 공동체를 말한다. 한 사람의 변화가 그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인정하며 축복하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님은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평범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데,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고,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른’(2) 비범한 사람들뿐이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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