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14)
유대인의 기도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큰 보자기 모양의 숄을 머리에서 어깨까지 두른다. 잘 살펴보면 보자기 아래 끝 부분에 술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술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찌찌트’라 하며, 찌찌트가 달린 보자기 모양의 숄을 가리켜 ‘탈릿’(기도보)이라고 한다. 정통파 유대인의 경우 결혼한 남자만 사용할 수 있으나, 보수파나 개혁파에서는 성인식을 마친 모든 유대인 성인에게 사용을 허락한다. 여자의 경우 기도할 때 탈릿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명문화시켜 금하지도 않는다. 정통파 유대인 여자들은 법으로 금하지는 않으나 탈릿 사용을 꺼리는 편이고, 그 외의 보수파나 개혁파에서는 여자용 탈릿을 따로 개발하여 사용하며 남자용에 비하여 그 모양이나 색상이 다양하다.
탈릿(기도보)의 구조와 용도
보통 가로 1.5미터, 세로 0.6미터 정도의 탈릿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가로 1.8미터, 세로 0.9미터 혹은 가로 1.8미터, 세로 1.2미터까지의 탈릿도 흔히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도보(탈릿)의 크기가 일정한 규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규정이 있다면 스카프가 아니라 숄을 두른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을 쉽게 감쌀 수 있는 정도가 기도보(탈릿)의 크기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반드시 탈릿을 두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기의 몸을 탈릿으로 감쌈으로써 기도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릿은 기도자를 외부와 차단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 탈릿을 사용함으로써 기도자는 쉽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 천의 재료는 무명이나 모로 만든 것이 사용되며 비단도 허용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섞어 짠 천은 금기이며 기도보의 재료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비단은 무명이나 모 어느 쪽과 섞어도 무방하다.
찌찌트(술)의 구조
유대인의 탈릿을 잘 살펴보면 아래 부분 네 귀퉁이에 술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술을 가리켜 찌찌트라 한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15장 37-41절에 근거하여 반드시 탈릿(기도보)에 찌찌트(술)를 단다. 술이 달리지 아니한 탈릿(기도보)은 단지 보자기일 뿐 탈릿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탈릿이 탈릿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찌찌트(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많은 유대인들은 성인식 일주일 전에 찌찌트가 달리지 않은 탈릿을 아들에게 선물하여 미리 그 사용볍을 가르친 후, 성인식 날에 찌찌트를 단 탈릿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다. 탈릿을 머리에서 어깨로 둘러 온몸을 감싼 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 13세의 유대인, 그는 비로소 하나님과 기도를 통하여 독립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을 그날부터 평생 행사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단순히 늘어뜨린 장식실로 보이는 찌찌트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찌찌트를 만드는 과정과 그 구조를 이해한다면 왜 유대인들이 찌찌트를 그렇게 중히 여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찌찌트를 만들어 쓸 것을 권장한다. 찌찌트는 탈릿 양쪽 끝단 네 귀퉁이에 부착한다. 탈릿의 아래 부분 양 쪽 끝에서부터 가로 세로 5cm 안쪽에서 수직선을 그어 만나는 점에 구멍을 뚫고 술을 단다. 오른쪽 양쪽 끝에 두 군데, 왼쪽 양쪽 끝에 두 군데, 모두 네 군데에 구멍을 뚫고 찌찌트를 단다.
술을 만드는 데 쓰는 재료(실)는 보통 유대인 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한 조에 16가닥의 실이 들어 있는데, 네 개는 길고 열두 개는 짧다. 먼저 할 일은, 긴 실 하나에 짧은 실 두 개씩하여 네 개의 조로 나누는 일이다. 긴 줄을 가리켜 ‘샴마쉬’라하며 아래의 설명과 같이 짧은 줄을 감는데 쓰인다. 찌찌트(술)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그림참조)
먼저,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이 겹매듭을 먼저 만든 후 긴 줄(샴마쉬)로 짧은 줄을 일곱 번 감아주고, 다시 겹매듭을 만든다. 동일한 방법으로 기 줄로 여덟 번 감아 주고 겹매듭을 만들고 다시 열한 번 감아 준 후 겹매듭을 만들고 열세 번 감아 준 후 마지막 겹매듭을 만든다. 다시 마지막 겹매듭을 만든 후 매듭 밑으로 여덟 가닥의 줄을 늘어뜨린다. 끝으로, 여덟 가닥의 줄을 한 줄로 정렬한 후 조금이라도 긴 줄은 잘라 내어 같은 길이로 마무리한다.
유대인 전통에 의하면 찌찌트의 술을 정렬하여 같은 길이로 맞출 때에 가위나 칼을 사용하여잘라 내는 것은 금물이며, 반드시 이빨로 물어뜯어 길이를 맞추어야 한다. 탈릿을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흔히 찌찌트의 어느 한 쪽이 먼저 닳아 술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에는 이빨로 긴 쪽을 수시로 물어뜯어 기이를 일정하게 맞추어야 한다. 가위나 칼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는다.
찌찌트의 의미
유대인들은 찌찌트를 만들 때 위에 제시된 모든 숫자를 어밀하게 지킨다. 실을 한 번이라도 더 가지도 덜 감지도 않는다. 모든 숫자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숫자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찌찌트를 만들 때 처음에 일곱 번과 여덟 번을 감아 준다고 하였는데, 일곱 번과 여덟 번의 합은 열다섯이다. 유대인의 숫자 계산법에 의하면 15라는 아라비아 숫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 중 요드 헤를 대표한다. 다음 열한 번 감아 준다고 하였는데, 11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 중의 와우 헤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일곱 번 감고, 여덟 번 감고, 열한 번 감는 이들 숫자의 합은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에 상응하는 숫자의 합과 같다. 이런 연유에서 찌찌트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찌찌트를 보는 유대인은 하나님을 생각한다. 다음에 열세 번을 감는다고 하였는데, 13이란 숫자는 ‘하나’를 뜻하는 히브리어 에하드를 대표한다. 따라서 이들 전체의 숫자를 히브리어 자음체계와 연결시키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문장 “아도나이 에하드”를 이룬다. 그러므로 찌찌트를 보는 사람마다 신명기 6장 4절의 쉐마를 연상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의 총합을 613개라고 믿어 왔다. 놀랍게도 찌찌트는 유대인 계명의 총합 613을 상징한다. 어떻게 그러한가? 찌찌트란 히브리어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풀 때 600이란 아라비아 숫자에 상응한다.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찌찌트는 여덟 개의 줄과 다섯 개의 겹매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숫자를 모두 더하면 613이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찌찌트를 보거나 착용할 때 그들이 지켜야 할 613개의 계명을 생각한다.
찌찌트는 탈릿에만 다는 것이 아니다. 탈릿에는 물론이요 평상복에도 달도록 되어 있다. 예루살렘이나 뉴욕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서 쉽게 찌찌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양복 할단을 살펴보라. 어김없이 늘어뜨린 술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모두가 찌찌트이다.
찌찌트의 목적
민수기 15장 37-41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ㄹ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찌찌트를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위의 말씀에 근거하여 탈릿이나 상의 하단에 세 가지 목적으로 찌찌트를 부착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기 위함이요 셋째로, 거룩하게 살기 위함이다.
찌찌트는 유대인의 삶에 깊이 밀착되어 있다. 누구든지 윗도리를 입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윗도리를 입으면 윗도리에 달린 찌찌트도 함께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가는 곳에 찌찌트도 함께 간다. 그가 어는 곳에 있든 간에 자기옷단에 달린 찌찌트를 보게 되며, 찌찌트를 볼 때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 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기억하게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게 되며, 결국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살기 원하는 유대인의 소망을 찌찌트에 관한 그들의 규정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낮에는 반드시 찌찌트가 달린 옷을 입어야 하며, 기도할 대는 반드시 찌찌트가 달린 탈릿(기도보)을 두르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릿을 입는 법
기도하기 전에 유대인은 먼저 탈릿을 머리로부터 어깨에 두른다. 진실하게 온전히 하나님께만 전심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유대인의 소원은, 탈릿을 입으며 기도를 준비하는 유대인의 모습에 잘 나타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탈릿을 두르기 전에 먼저 시편 104편 1-2절을 음송하며 그 의미를 묵상한다. 묵상이 끝난 후 탈릿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엄위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복되도다. 하나님의 입재여! (요드 헤)의 하나님과 (바브 헤)의 하나님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이스라엘의 이365개의 나의 혈관이 613계명의 상징인 찌찌트의 빛으로 감싸입니다.”
이와 같이 음송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온몸과 마음으로 기도를 준비한다. 그의 모든 뼈마디가, 모든 혈관이 하나님께 집중된다. 탈릿을 두르기 전 탈릿을 앞으로 활짝 펼치며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복되신 이여, 주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여,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성별하신 이여,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우리를 (탈릿의) 찌찌트로 감싸라 하시나이다.”
이때 기도자는 자신의 온몸이 계명으로 보호되는 순간을 기대하게 된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때 탈릿의 꼭대기 부분에 입을 맞추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다음, 탈릿을 뒤로 돌려 머리부터 덮어씌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탈릿을 두르는 자가 완전히 탈릿으로 감싸여져서, 외부로부터 차단되며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도자는 다음과 같이 음송한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친절이 얼마나 귀하신지요. 사람이 당신의 날개 아래서만 피난처를 구할 수 있나이다. 그가 당신의 전에서 기름진 것으로 충족되며 당신의 기쁨으로 음료를 삼나이다. 당신과 함께함이 생명의 샘이요 당신의 빛 안에서만 우리가 볼 수 있나이다. 당신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친절을 베푸시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를 보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음송한 후 비로소 탈릿을 어께에 두르고 온몸을 감싼다.
예배 시 착용하는 탈릿
유대인들은 아침 예배(샤하릿)나 추가 예배(무싸프)에 탈릿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통 오후 예배(민하)에는 인도자만 타릿을 입는다. 어떤 이들은 샤밧(안식일)의 저녁 예배나, 그 밖의 절기 예배 때도 탈릿을 사용한다. 유대인들은 예배드릴 때 항상 쉐마를 낭송한다. 쉐마 낭송 전에는 반드시 기도 순서가 있다. 이때 모든 기도자는 찌찌트의 술을 하나로 모아 한 손가락에 감싸 쥔다. 이는 지구의 네 모퉁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상징하며, 기도자는 다음과 같이 낭송한다.
“축복과 평화를 신속하고 빠르게 지구의 네 모퉁이로부터 우리에게 허락하옵소서.”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대로 찌찌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쉐마의 선포를 상지한다. 이 찌찌트의 술을 하나로 모아 쥐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 되심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유대인에겐 쉐마를 낭송하는 동안 찌찌트라는 말이 언급될 때마다 찌찌트에 입을 맞추는 전통이 있다. 어떤 유대인들은 찌찌트란 단어가 음송될 대마다 네 번씩을 입을 맞추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네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쉐마의 마지막 문구를 낭송할 때 모든 회중을 자기의 찌찌트에 네 번 입을 맞춘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 계명을 지키며 살겠다는 믿음의 표시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 가면 탈릿을 머리부터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몸을 앞뒤로 흔드는 이유는 온몸으로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며, 어떤 이는 소리를 지르며, 어떤 이는 속삭인다. 공통점이 있다면 누가 와서 쇠를 질러도 모를 정도로 기도에 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유일까? 탈릿을 머리에 쓸 때 기도자는 외부의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작은 보자기에 불과한 탈릿, 그러나 탈릿을 머리에 두를 때 탈릿 안에서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탈릿 안의 세계, 이는 하나님을 만나는 세계이다.
최명덕/건국대학교 교수, 조치원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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