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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 하려 하네

by 한종호 2015. 8. 21.

이진경의 지금은 사랑할 시간’(2)

 

그럼에도 삶에 대해 하려 하네

 

 

보통 사람들은 66년을 건강하게 산대요. 뉴스 통계에서 들었어요. 그거 듣고, , 다들 오래 건강하게 사는구나, 했어요. 저는 한 20년이었거든요.”

 

첫 만남이 있기 전, 도엽과의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건강한 기간이 66년이라는 것도, 그가 20년 정도 건강했다는 것도 그날 처음 들었다. 하지만 그 20년도 온전히 건강한 날수를 채운 것은 아니었다. 13살 때 오른쪽 눈에 양성 종양이 생겼으니 말이다.

 

한 사람의 병력이 약력처럼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거쳐 온 병의 역사를 보면.

 

도엽이는 생후 100일 때 망막모세포종으로 오른쪽 안구를 적출했다.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도 해 보았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오른쪽 눈을 적출함으로, 왼쪽 눈은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13살 때 의안을 한 오른쪽 눈 안쪽에 양성 종양이 생겨 수술을 했다. 6학년 때였으니까그는 그때 졸업식에 가지 못한 게 수술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땐 병원에 자주 다녀도 다닐 만했다. 다양한 지식들을 많이 아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병원에 관한 지식이나 의학 정보를 또래 친구들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독특한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의학 정보가 주는 자부심보다 육체가 주는 고통의 크기가 훨씬 더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21살에 코에 골육종이 발병한 것이다.

 

 

 

            어린 시절 오른쪽 눈에 의안을 한 도엽

 

 

 17, 그 무력함의 자리

 

아마도 도엽에게 인생에서 결단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다면 21살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선 어느 17일간의 기억일 것이다. 도엽이 21살이었던 201111월 말, 8시간이 넘는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허벅지의 살을 떼어 뇌막을 잇는 수술이었다. 수술 후 그는 17일간 허리에 관을 꽂고(수술 중 뇌막이 손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뇌척수액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요추 배액관이었다) 내내 누워만 있어야 했다. 자세를 바꾸지도 못했고, 살아 있는 목각 인형처럼 침대에 놓인 그대로 누워 있었다. 볼 수 있는 것은 천장뿐이었다. 수액으로 영양제를 맞으며 연명했다. 온몸,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것은 쉬 말로 표현될 수 없는 통증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프기만 한, 무력함의 자리였다. 17일이 지난 후 일어나 보라고 하는데 온몸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근육 강도가 현저히 떨어진 탓이었다. 그때 이후, 정말로 다시는 수술이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술만은 피하고 싶었다.

 

수술이 끝나자 이번엔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한 달에 한 사이클의 치료를 6, 그러니까 6개월에 걸쳐 받았다. 첫 달, 한 번의 항암치료가 있고 나서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한 뭉텅이씩 빠지는 머리카락. 결국 병원 아래층에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밀기로 했다. ‘남들은 군대 갈 때 머리를 민다는데 나는 이렇게 머리를 미는구나생각하니 거울을 보면서 웃음이 났다. 엄마는 머리를 미는 도엽의 옆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웃음은 그에게 최선의 방어이자 수용이었지만 엄마의 울음은 막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처럼 하루에 일만 개씩 떨어져 버리는 자식의 생기를 지켜보기엔 엄마는 힘이 없었다. 순간 정적을 대면하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항암주사는 한 번에 72시간 정도 맞았다. 21살의 젊은 암환자는 딱히 소속될 곳도 없어, 소아과 병동에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암병동에서 그는 온전한 성인도, 그렇다고 어린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소아과 병동에서는 아이들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어요. 거기 오래 입원하면 엄마들이 아예 집처럼 살림을 차리거든요그게 좀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뭐그분들도 어쩔 수 없었겠죠.”

 

아이들을 간병하는 엄마들이 의사들 험담도 하고 수다도 떨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나 보다. 스마트폰이나 TV를 크게 틀어 놓기도 했다. 아픈 아이를 계속 돌봐야 하는 고된 간병의 피로감과 병원에 갇혀 있는 갑갑함을 달리 어떻게 풀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몸이 아프면 촉수가 더 민감해지기 마련. 무던하고 성격 좋은 도엽이조차 항암치료 기간 내내 마주해야 하는 소란스러움이 버거웠다. 그러나 그분들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그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습관이 일찍부터 배어 있는 공감의 습성에서 난 것이었다.

 

그렇게 6개월간의 항암치료가 끝났다. “고통은 제발 그를 한숨 좀 놓게 하라!” 시위하고 싶지만, 세상 밖이나 몸 안이나 시위가 먹히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암은 꿋꿋이, 자신은 살아 있노라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수술과 6개월간의 항암치료 후 3개월 만의 재발이었다.

 

더 이상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 수술이었다. 1년 동안 더 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겨우겨우 버텨낸 1년의 항암치료가 무색하게, 결국은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 수술을 할 때 의사선생님은 아주 모질고 거칠게, 모든 걸 다 제거해야 한다고, 적출해야 한다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래서 담당수술의를 바꾸기로 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배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좋다 해도 가차 없는 말들로 마음까지 절개해 버리는 사람에게, 도엽의 몸에 댈 그 차가운 메스를 다시 맡기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의 두 번째 수술을 맡은 의사선생님은 상냥하고 따뜻하게, 친절하게 그를 대해 주었다. 그는 그 의사선생님의 스케줄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 첫 번째 수술 이후 대략 만 2년 만인 20139월 두 번째 수술이 이루어졌다.

 

 

 

          올여름 친구들과 함께한 여행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것으로 치료는 완료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하면 완전히 나을 것이라 했다. 완치라는 단어는 곧이어 이어질 강력한 치료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의 유혹이자 희망이었다. 20141월 그는 무균실로 들어갔다.

 

항암치료가 폭탄급이라면,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은 핵폭탄급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예의 덤덤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은 고용량의 강한 항암 후 조혈모세포를 채집하여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이식하는 것이었다. 가슴에 삽입해 놓은 정맥관인 히크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항암보다 더욱 강한 고용량 항암인지라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몸 안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더군요. 저는 그래도 제 몸의 피를 이식한 건데도 그렇더라고요. 예를 들면침이 탕수육 소스보다 걸쭉해져요. 그래서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해요. 구토가 나고 입안 점막도 헐고, 계속 항생제를 먹으니까 설사를 하고. 하지만 저는 그나마 자가이식이니까 운이 좋았던 편이죠.”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는 그. 타가이식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덜 힘들 거라고 했다.

 

무균실에서 그의 몸은 온갖 기계 줄들과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식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약제들이나 항암제, 항생제 등을 주입하기 위해, 가슴 쪽 정맥에 삽입한 히크만이라는 관 두 개에 수십 개의 수액라인이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기분이었다. 수액라인이라는 액세서리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만큼 유쾌하게 그 공간의 무게를 덜어낼 상상물이 있을까.

 

주렁주렁 많은 장식들을 매달고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움직이기 어렵듯, 그 역시 침상을 떠나기는 어려웠다. 첫 수술 직후만큼이나 힘들었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그래도 괜찮았다고 한다. 첫 수술 때만큼 누워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TV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큰 진보로 느껴졌다. 게다가 타가이식을 하는 사람은 그 고통이 더할 거라고, 자기는 그 통증까진 모른다며, 그는 더하리라 짐작되는 고통 앞에 자신의 고통을 무릎 꿇린다. 또한 자신을 돌보는 엄마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보다 앞세운다. “저 때문에 엄마가 많이 고생하셨죠.”

 

인터뷰를 하며 내내 의아했던 것은 25살 젊은 청년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결국 왼쪽 눈마저 잃은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자가조혈모세포이식 후 3개월 만에 암은 재발되었고, 7개월 후인 작년 11월 결국 실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조차도 자신의 고통이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아프고 더 힘들 사람들을 생각했다.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 속에서도 웃음으로 가볍게 넘어가려 애쓰면서 자신보다 더 마음 아파할 가족들을 생각했다. 왜 그런 걸까.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있는 걸까. 억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압력을 견디지 못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튀어나왔을 텐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좋은 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의자를 바꿔 가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시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그 시인은, 어떤 시인의 시에서 의자를 많이 바꿔 앉은 것이 보이면 , 이 사람, 나보다 많이 생각했구나, 잘 썼구나하고 생각한다 했다. 어쩌면 도엽이는 좋은 시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쉬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일찍부터 겪어 왔지만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의자를 계속 바꿔 가며 삶을 바라보고 타인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에 대해 하고 응답하는 법을 어려서부터 다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투엔 투정이나 원망이 아닌 덤덤함과 받아들임이 시종일관 묻어나 있었던 듯하다.

 

이제 또 어떤 의자가 도엽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의자에 앉아 그는 삶을 바라보게 될까. 그 기다림을, 그 주시를, 나는 잠잠히 지켜보기로 했다.

 

이진경/EBS, KBS, CBS 방송작가를 거쳐, IVP 편집부에서 일한 후 현재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 EBS 다큐프라임 생사탐구 대기획 죽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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