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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귀가 거룩해야 말씀이 거룩하게 들린다

by 한종호 2015. 8. 26.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9)

 

귀가 거룩해야 말씀이 거룩하게 들린다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葡萄)를 땀 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者)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葡萄) 따는 자(者)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警責)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割禮)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自己)에게 욕(辱)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예레미야 6:9~10)

 

오래 전에 번역된 성경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것은 그것을 번역할 당시, 즉 오래 전 하나님을 믿었던 이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다 하여도 성경에 담겨 있는 단어, 어감, 의미 속에는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한문과 우리말을 섞어 쓰던 시대의 이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독특한 의미와 느낌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 요즘 우리가 쓰는 말과는 어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9절만 보아도 ‘땀 같이’, ‘말갛게 주으리라’,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는 표현이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모르는 단어는 없지만 뜻이 선명하게 와 닿지를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 곰곰 생각하게 된다.

 

위에서 지적한 부분을 새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땀 같이’는 ‘따 내듯이’, ‘말갛게 주으리라’는 ‘샅샅이 뒤져서 끌고 갈 것이다’,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네가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 내듯이 적군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샅샅이 뒤져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니 아주 늦기 전에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포도가 누구에게 돌아갈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중요한 기로의 순간이다. 시간이 촉박하니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진다. 더 이상 미룰 겨를이 없으니 자주자주 손을 놀리라고, 어서 서두르라고 하신다. 서두르되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면 안 된다, 포도 따는 사람이 포도덩굴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당부는 이리도 간절한데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대답은 뜻밖이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10, 개역개정).

 

“제가 말하고 경고한들 누가 제 말을 듣겠습니까? 그들은 귀가 막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저를 비웃기만 합니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새번역)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성경)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으로 여긴다. 비웃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말씀을 전하는 이까지를 업신여긴다. 하긴 말씀을 업신여기는 마당에 말씀 전하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예레미야는 이미 체념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그 지경에 빠졌을까? 예레미야는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니, 일찍이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4:4).

 

포피를 베어내지 말고 마음 가죽을 베라고 하셨다. 잘못된 마음을 베어버리고 내게 속하라고, 너 자신을 내게 바치라 하신 것이다.

 

몸에 받는 할례가 할례의 전부가 아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받아야 할 할례가 있다. 귀다.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는 않는다. 들리기는 들려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알아듣지를 못하니 업신여길 수밖에.

 

듣는 것과 관련한 우리말에 ‘귀담아 듣다’와 ‘귓등으로 듣다’는 표현이 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듣는 태도와 마음에 따라 정말로 듣는지와 듣지 않는지가 달라진다. 사람이 볼 때는 모두 같은 모습으로 보여도 중심을 보시는 분은 얼마든지 그것이 분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 귀가 거룩할 때 말씀이 거룩하게 들린다. 귀가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벼락처럼 들려와도 시끄럽다며 업신여길 뿐이다.

 

그런데도 귀걸이로 치장할 뿐 도무지 할례와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귀라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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