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32)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1)

- 정말 소돔은 그래서 심판받았을까? -

창세기 19:1-11 에스겔 16:49-50

 

 

동성애와 한인교회

 

개신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냥 적당히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동성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단칼에 ‘죄’라고 규정합니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 전체를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성적 지향에 근거한 차별을 금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지난 6월에 연방대법원이 동성 간의 결혼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후로 한인교회들이 그 결정에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있습니다. 또 3월에 미국장로교(PCUSA)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결의를 했다고 해서 한인교회들이 줄줄이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실제로 탈퇴한 교회는 몇 안 되지만 이런 현상은 장로교뿐 아니라 다른 교단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자회에서도 남미와 아시아인 여러 교회가 이 때문에 교단을 떠났습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동성결혼뿐 아니라 동성애 자체를 반대합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주제를 설교에서 진지하게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설교나 성경공부 때 여러 번 언급했지만 맘먹고 얘기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 문제가 정말 한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한인교회들은 이 문제를 ‘순교의 각오’ 또는 ‘십자군 정신으로’ 반대하고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지만 한인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뜨거운 이슈는 아닙니다. 유독 개신교회만 들끓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유독 한인들 가운데 동성애자 숫자가 적어서 그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한인이라고 해서 동성애가 적겠습니까. 동성애자의 비율이 인종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10% 정도가 동성애자라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동성애자는 상당히 많으며 그 비율은 인종과 무관합니다. 그러니 분명히 한인 중에도 다른 인종들만큼 동성애자가 있을 겁니다. 다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쉬쉬하며 감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워서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속으로 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달 25일에 금요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성애 세미나를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남가주에서는 처음일 겁니다. 미국 한인교회 중에서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이라 자랑스럽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한인교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과 다음주일에 성서가 동성애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세미나를 하기 전에 성서가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세미나 때는 이를 정리해서 작은 책자로 만들어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려고 합니다.

 

소돔은 정말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나?

 

대부분의 한인기독교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동성애를 ‘죄’라고 단정합니다. That’s it! 그걸로 끝입니다. 더 생각해볼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시므로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합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만하면 그래도 뭔가 생각하는 편에 속합니다. 단숨에 죄라고 단정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는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제가 동성애자인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걸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바꿔야 회개한 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그가 이성애자로 바뀌어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은 하시지만 그가 ‘구원’ 받으려면 이성애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동성애를 반대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최종병기’는 성서입니다. 성서가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건 사람에게 나온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고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럼 성서는 정말 동성애를 죄악시할까요? 언뜻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성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성서구절들을 잘 읽어보면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잘 읽어보면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하나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쪽과 인정하는 쪽의 주장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그르다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그 판단은 여러분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설교에는 낯선 방식이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Lot leaving Sodom, Nuremberg Chronicle (1493)

 

동성애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본문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입니다. ‘소돔’이란 말에서 ‘항문성교’를 가리키는 ‘sodomy’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니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야훼가 파견한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이 그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소돔의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롯의 집으로 몰려와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상관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요? 이 부분을 직역하면 “우리가 그 남자들을 알아야겠소.”(we may know them)가 됩니다. 히브리어 ‘알다’라는 동사 ‘야다’에는 ‘성관계를 갖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들을 내놓으라며 그들을 ‘알아야겠다’고 말하니 이는 분명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롯은 “여보게들, 제발 이러지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라면서 애원했지만 그들은 듣는 척도 안 헸습니다. 그래서 롯은 무리의 주장보다 더 엽기적인 제안을 합니다.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라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손님을 환대하고 그들이 피해당하는 걸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딸들을 욕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무리에게 내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비극적인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벼락을 맞아 멸망당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들이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소돔 사람들이 동성애자라서 심판받았다고 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봅시다. 롯의 집에 몰려온 무리는 이성애자였을까요, 동성애자였을까요? 남자를 내놓으라고 한 걸 보면 동성애자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롯이 이들에게 자기 딸들을 내주겠다고 제안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성애자였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롯은 이들의 성적지향을 오해하고 쓸데없는 제안을 한 걸 테니 말입니다. 혹시 이들은 양성애자였을까요? 이론적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그 많은 무리가 모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였을까요? 그런 사람들만 몰려왔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따름입니다. 제 생각이 여러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 얘기를 읽을 때 어떻게 가장 먼저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냐는 겁니다. 동성애나 이성애보다는 ‘강간’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나그네를 ‘강간’하려고 몰려온 무리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강간’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갖는 겁니다. 이는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의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인권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입니다. 롯의 집에 몰려든 무리는 타지에서 온 나그네들을 강간하겠다고 모여들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동성애’나 ‘이성애’가 아니라 가장 먼저 ‘강간’을 떠올려야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기서 ‘강간’이 아니라 ‘동성애’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 머릿속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이는 살인사건이 났는데 살인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사용한 무기가 미국산인지 중국산인지를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에스겔은 다르게 말한다!

 

그러면 소돔의 ‘죄’에 대해서 다른 성서구절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오늘 읽은 에스겔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내 눈 앞에서 역겨운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는 그들을 없애 버렸다.

 

에스겔 예언자는 소돔의 죄에 대해 말하면서 ‘동성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교만’과 ‘자기들은 배부르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죄’를 말합니다. 그 죄가 하나님에게 역겨웠다는 겁니다. 물론 소돔 사람들이 동성애의 ‘죄’도 저질렀는데 에스겔 예언자가 그걸 간과했거나 무슨 이유로든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열거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돔이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구절만큼은 진지하게 읽어야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소돔의 죄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선택해서 강조하고 자기 생각에 반하는 구절은 없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라고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마태복음 10:12-15).

 

여기서 예수님은 ‘영접’ 또는 ‘환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와 무관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환대하지 않는 사람들’ 얘길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셨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나그네(여기선 복음 전파자)를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느 편의 해석이 옳은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함’과 동성애

 

다음으로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읽을 차례인데 그 전에 먼저 읽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1-2).

 

야훼가 거룩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훼가 거룩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계신 걸까요?

 

히브리어로 ‘거룩하다’는 말은 ‘카도쉬’입니다. 이 말은 ‘분리하다’ 또는 ‘구별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성결하다거나 장엄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이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야훼 하나님이 거룩하듯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듯이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 곧 다른 종족과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를 마치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이 거룩하다는 말은 그 날이 다른 날들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엿새와는 다른 날이란 뜻입니다. 또 성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미크다쉬’입니다. 이 말은 ‘카도쉬’에서 파생된 말로서 ‘거룩한 곳’이란 뜻입니다. ‘미크다쉬’의 뜻은 단순합니다. 성전이 성결하고 왠지 모르게 거기 들어가면 엄숙해지는 신비한 곳이란 뜻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장소들과 ‘구별’되고 ‘분리’된 곳이란 뜻입니다.

 

이런 전제를 갖고 레위기와 신명기의 동성애 구절을 읽어야 합니다. 먼저 레위기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다(20:13).

 

두 구절은 분명히 동성애를 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의 구절은 그걸 ‘망측한 짓’이라고만 불렀지만 뒤의 구절은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망측한 짓’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토에바’는 그보다 훨씬 강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어성서는 ‘abomination’으로 번역했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역겹다’거나 ‘가증스럽다’ 정도가 맞을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는 규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제 이 규정들을 잘 읽어봅시다. 우선 이것이 금하는 바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입니다. 이성 간의 ‘사랑’과 ‘성행위’가 같지 않듯이 동성 간의 사랑과 성행위도 같지 않습니다. 전자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 구절을 포함해서 성서가 금지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입니다.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는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얘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단순한 ‘우정’ 관계가 아니라 ‘동성애’ 관계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지만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걸 우정으로 보는 반면 인정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좌우간 레위기 규정은 동성애 일반이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규정들은 여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뿐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여성과 여성의 성행위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여성 간에 성행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구약성서는 그것은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금지하지 않으니까 해도 됐을까요? 여성 간의 성행위는 역겨운 짓이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동성애와 관련 있는 구절이 신명기에 또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절은 신명기 23장 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

 

성매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장이긴 하지만 그만큼 성매매의 역사가 오래 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창녀’나 ‘남창’은 성매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 받고 몸을 파는 사람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어를 알아야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창녀는 히브리어로 ‘카데샤’이고 남창은 ‘카데쉬’입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두 단어 모두 ‘거룩하다’는 뜻인 ‘카도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곧 이들 모두 성전 또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광야 유랑 후에 들어가 살게 된 가나안은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여럿 있었지만 대표적인 신이 바알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 신전에서 제사드릴 때 충분한 비와 풍요로운 결실을 기원하면서 남자 제사장과 여자 제사장이 성관계를 가졌답니다. 성행위가 결실을 맺게 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겁니다. 이때 성행위하는 제사장이 카데쉬와 카데샤입니다. 물론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보상을 받았지만 이는 성매매와는 달랐습니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들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곧 가나안의 제사풍습을 따르지 말고 거기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보다 더 넓고 깊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레위기에 있는 동성 간의 성행위 금지 규정은 이스라엘의 ‘거룩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하므로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므로 바알종교의 남녀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규정들은 동성애에 대한 금령이 아닙니다. 동성 간에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반대하든 인정하든 상관없이 성서가 금하는 게 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기에 몇 구절들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떻습니까? 구약성서는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설교 서두에 ‘경고’했는데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읽어보고 동성애에 관한 성서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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