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5)
이삭이 겪은 트라우마
1.
10여 년 전에는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40대를 가리켜서 ‘낀 세대’(in-between generation)라고 불렀다. 한국사회 여러 분야에서 맹활약을 벌이던 386세대에 밀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억한다. ‘낀 세대’가 기분 좋은 말일 수는 없다.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사이에 끼어서 제 역할 못하는 세대란 느낌을 주니 말이다. 내가 바로 그 세대다.
이삭을 가리켜 ‘낀 족장’(in-between patriarch)라고 부르면 그도 기분 좋을 리 없겠다. 그에 대한 전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양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훨씬 많은 아브라함과 야곱 전승에 묻혀 있으니 ‘낀 세대’란 이름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많은 구약성서 학자들이 이삭 이야기를 별도의 전승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분량이 작다고 무게감도 작은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전승을 관통하는 중심주제는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그 중에 후손에 대한 약속이 이삭에게서 성취됐으므로 이삭 이야기를 꼼꼼하게 읽어볼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난번 글에서 다뤘던 이야기, 곧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던 이야기(창세기 20:1-18) 바로 다음에 이삭의 탄생 이야기가 나온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야훼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야훼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사라가 임신하였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에게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삭이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분부하신 대로 그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보았을 때에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사라가 혼자서 말하였다. “하느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엄두를 내었으랴? 그러나 내가 지금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창세기 21:1-7)
오랫동안 기다렸던 약속의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치고는 너무 짧고 건조하지 않은가? 뭔가 곡절이 더 있어야 할 거 같지 않은가 말이다.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무작정 아들을 약속해놓고 중간에 그토록 우여곡절을 겪게 해서 ‘과연 약속이 지켜질까?’ 싶어 노심초사 가슴 졸이게 만들어놓고 그 약속이 성취된 얘길 이렇게 간단하게 하다니! 독자들로 하여금 노부부에게 한껏 감정이입하게 해놓고서 한다는 이야기가 “때가 되니 사라와 늙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고? 그게 전부라고? 뭔가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나올 걸 예상한 독자들을 실망시키는 싱거운 서술이다. 여기엔 분명히 모종의 의도가 있을 법도 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린 다만 어안이 벙벙할 뿐이고….
확실한 사실은 이삭의 탄생이 대부분의 부부가 경험하는 자연적인 과정과 달랐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된 특별한 사건으로서 그로 인해 하느님의 신실성이 확인됐다. 이런 일을 흔히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말이 나온 김에 ‘기적’이 뭔지 한번 따져보자.
기적이 뭔가? 사람들은 기적을 특별한 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걸로 정의한다. 자연법칙을 거슬러서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약성서에 ‘기적’이란 게 있을까? 기적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리킨다면 구약성서에는 기적이란 게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은 맘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 있지만 하느님에게 그런 일은 없다. 궁극적으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이 한 일이니 ‘기적’이란 게 있을 리 없다. 만일 있다면 하느님이 약속했지만 성취될 수 없을 것 같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걸 ‘기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따라서 이삭의 탄생은 ‘기적’이 아니라 실현되기 어려워 보이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된 사건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이삭이 태어나자 사라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웃음’을 주셨고 사람들도 그 얘길 들으면 자기처럼 웃을 거라고 말했다(창세기 21:6). ‘이삭’이란 이름도 웃음과 관계가 있다는 거다. 사라는 이 말을 만면에 웃음을 띠고 했겠지. 안 그런가?
구약성서에 ‘웃음’이란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올까? 사람이든 하느님이든 구약성서에는 웃는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온다. 그 때라고 웃을 일이 없었을 리 없는데 왜 그런지 구약성서에는 웃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웃음도 대개 환한 웃음이 아니라 조소에 가깝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분께서 네 입을 웃음으로 채워 주시면 네 입술은 즐거운 소리를 낼 것이니…”(욥기 8:21)나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나라 백성들도 말하였다. ‘야훼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일을 하셨다’”(시편 126:2) 정도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웃음거리’나 ‘비웃음’을 가리킨다(창세기 39:14; 열왕기상 9:7; 역대하 7:20; 29:8: 욥기 12:4: 시편 43:13; 79:34 등 참조).
그래서 사라의 웃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녀는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는 걸 몰래 들었을 때(창세기 18:12)와 이삭이 태어났을 때(창세기 21:6), 모두 두 번 웃었다고 전한다. 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 웃음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봤다. 구약성서에서 웃음은 인간적으론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새로움(newness)을 받아들였을 때 보여주는 행위라는 거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사라가 ‘웃었다’고 말함으로써 설화자는 아브라함 부부의 삶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줬단다. 그럴듯하지 않나?
브뤼그만의 장점은 이런 통찰에 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인 구약성서 학자다. 그는 생존하는 구약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책과 논문을 쓴 사람들 중 하나다. 그런데 주석의 관점으로 보면 그는 가끔 확실한 근거를 대지 않고 주석의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어 비판받곤 한다. 하지만 구약신학자로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번득이는 영감과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 성서학자에게 찾아보기 어려운 ‘아래로부터’ 성서를 읽는 시각을 옹호한다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주석학자와 설교자의 중간 어디쯤 자리 잡고서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2.
이스라엘의 다른 족장들과 비교하면 이삭에게는 특징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처럼 떠돌아다니지 않았다. 도망치거나 쫓겨난 적도 없다. 아브라함은 야훼의 지시를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약 9백 마일이나 되는 길을 걸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했고 가나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야곱 역시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이 사는 밧단아람까지 먼 길을 가야 했다. 요셉도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갔으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먼 길을 여행한 셈이다. 이에 비하면 이삭은 붙박이 정착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같이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지구 전체가 한 촌락이 된 시대에도 미국에는 한평생을 태어난 주(state) 바깥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삭의 붙박이 삶이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다른 족장들이 특별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다.
둘째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야훼가 처음부터 이삭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야곱은 선택할 필요 없이 열 두 아들 모두를 열 두 지파의 조상으로 축복했다. 하지만 이삭은 달랐다. 여럿 중 하나 또는 일부를 선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여러 자식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다.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건 다른 사람을 버린다는 얘긴데 그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홀로코스트 영화 같은 걸 보면 자식들 중에서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있다. 선택되지 않은 자식들은 죽는 경우 말이다. 이것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만 죽이는 짓이 아니다. 선택 받아 살아남은 사람은 물론이고 선택해야 했던 사람까지 모두 죽이는 잔인한 짓이다.
셋째로 이삭 이야기에서 ‘선택’과 더불어 등장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히브리어로 ‘아하브’)이란 말은 구약성서에서 이삭과 관련되어 처음 사용됐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이었고(창세기 22:2), 이삭은 리브가와 음식을 ‘사랑했다’(창세기 24:67; 27:4, 9, 14). ‘사랑’이 이삭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게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모종의 ‘선택’을 해야 했다는 사실과 ‘사랑’이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너무 막연하고 그걸 확인해줄 텍스트적 근거가 없긴 하지만 사랑은 어차피 선택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게다.
간접적으로나마 리브가를 향한 이삭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이삭은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아내가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야훼께 기도하였다”(창세기 25:21). 여기서도 우리말 성서는 의역을 했는데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이삭은 자기 아내를 위해서 야훼께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임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가 된다. 그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한 게 아니라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는 거다. 여기서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본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기원후 11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학자 라쉬(Rashi)는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바에타르’가 기도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강하고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뭔가를 청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라는 거다. 요즘 말로 하면 ‘마구 들이대는 기도’라고나 할까, 그는 아내를 위해 대충 기도한 게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기도했다는 말이다. 이삭이 기도한 내용이 뭔지는 텍스트가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와 같은 무언의 기도가 중언부언 말 많은 기도보다 더 강렬하고 간절할 때가 있다. 안 그런가?
3.
시간을 거꾸로 돌려 모리아 산 장면으로 가 보자. 앞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야훼에게 제물로 바치려 한 사건을 아브라함 입장에서 읽어봤는데 이번엔 바쳐질 뻔했던 이삭 입장에서 읽어보자.
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가는 사흘 내내 궁금했을 거다. 장작과 불씨는 있는데 제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이다.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무니다. 그가 “그건 하느님께서 손수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대답에 수긍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의 대답에 수긍할 수 없었을 거다. 아버지와 단둘이 제단 위에 섰을 때까지도 말이다.
아버지가 자기를 묶었을 때(아케다) 이삭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생각해본다. 그때 그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다고 추측하는데 그만하면 상당히 성숙했을 때고 힘으로는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었던 때다. 이때 아버지 나이가 110살은 넘었을 테니 말이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이삭이 이때 이미 번제물이 자신임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묶었다고 한다. 부지불식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그랬다는 거다. 이제 그의 몸에서 자유로운 부분이라곤 눈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칼로 내려치려는 순간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봤단다. 이때 그의 눈에 천사의 눈물이 떨어졌다는 거다. 몇 초 후에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에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알려줄 바로 그 천사 말이다. 천사는 말없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이삭이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게 하필 이삭의 눈에 떨어졌다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나중에 이삭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져서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구별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된 게 천사의 눈물 때문이란다. 어떤가? 어이없어 할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럴 듯하다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유대인들에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에 분명하다. 텍스트적 근거는 빈약하지만 어떻게 그리 얘길 잘 만들어내는지, 감탄할 때도 가끔 있다.
천사의 지시 덕분에 이삭은 살아남았다. 이때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 사건은 이후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 손에 죽을 뻔했던 엄청난 트라우마를 갖고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오랫동안 이 점이 궁금했지만 만족스럽게 설명해주는 글이나 매체를 만나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아비바 고트리프 존버그(Avivah Gottlief Zornberg)라는 유대인 학자가 쓴 《The Murmuring Deep: Reflections on the Biblical Unconscious》(2009년)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이 아케다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을 읽을 때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보니 그녀는 《The Beginning of Desire: Reflections of Genesis》(1995년), 《The Particulars of Rapture: Reflections on Exodus》(2001년) 등도 책도 썼다.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그녀는 성서 이야기를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시각으로 읽는다. 중세 유대교 학자들의 해석도 간간히 소개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소개해보겠다.
존버그는 아케다 이야기에서 ‘생존의 수수께끼’(enigma of survival)라는 화두를 꺼낸다. 이삭은 살아남았지만 아케다가 남긴 트라우마는 엄청났을 터이다. 트라우마는 외적인 폭력에서만 오는 건 아니다. 그에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됐다는 거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영적 혼란에 빠진다. 하느님의 약속의 아들인 그가 죽을 뻔했다. 그것도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아버지에 의해서 살해당할 뻔했던 거다. 그게 실행됐다면 하느님의 약속은 깨져버린다. 그러니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에서부터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어떻게 날 죽이려 할 수 있나?’를 거쳐서 ‘내가 약속의 아들이라더니 하느님이 어떻게 날 번제로 바치라고 명할 수 있었을까?’에 이르기까지 그의 머리는 엉킨 실타래 같이 복잡했을 거다. 존버그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total incomprehensibility)이 그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았을 걸로 보고 그걸 ‘생존의 수수께끼’라고 불렀다. 살아남았으나 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기에, 선택됐지만 왜 선택됐는지 이해할 수 없기에 그게 트라우마가 됐다는 이야기다.
천사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휴, 다행이다. 그럼 그렇지, 하느님이 자신이 하신 약속을 깰 리 있나….’ 라고 생각하며 안도했을까? 그보단 어안이 벙벙하지 않았을까?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자신에게 물었을 게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그는 평생 이 질문을 반복해서 물으면서 살았지만 대답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이삭이 무대에 다시 등장한 때는 리브가를 만났을 때였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 하나를 나홀이 사는 성에 보내서 며느리 감을 물색하게 했다. 파견된 종이 거기서 아브라함의 며느리요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나서 데려오는 이야기가 무려 61절에 걸쳐서 적혀 있다(창세기 24:1-61). 왜 이 얘길 그토록 상세하게 전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튼 이삭은 그때 “브엘라해로이에서 나와서 네겝 지역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창세기 24:62). 그곳은 임신한 하갈이 사라를 피해 도망치다가 천사를 만난 곳이다. ‘브엘라해로이’란 이름도 하갈이 지었다는데(창세기 16:7-14)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the well of my living God who sees me)이란 뜻이다. 두 사건이 같은 곳에서 벌어진 걸 우연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 ‘우연’이란 게 어디 있나? 매사에 뜻이 있지 않은가.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4.
이삭은 ‘업적’이라고 부를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모리아 산 사건 이후 그가 한 일이라곤 아버지가 짝지어준 리브가와 결혼한 것(창세기 24장), 나이 예순에 쌍둥이 아들을 낳은 것(25:19-26), 흉년이 들어 그랄 땅에 내려가 살다가 그곳 왕 아비멜렉이 자기를 죽일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26장), 눈에 어두워서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그를 축복한 것(27장), 야곱이 에서에게 죽임 당할까봐 그를 처남에게 보낸 것(28:1-5), 그리고 죽은 것(35:27-29)이 전부다. 이러니 그를 ‘낀세대’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겠다. 그의 생애에는 대단한 사건사고도 없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얘깃거리도 없었다. 그의 전승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다른 족장들에 비해 극히 빈약하다. 이것이 모리아 산 사건의 트라우마와 무관할까? 그렇지 않을 거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고대 유대교학자들은 이 막연함을 어떻게든 메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천사의 눈물 때문에 이삭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이야기도 거기서 나왔다. 단순히 그가 늙어서가 아니라 천사의 눈물 때문에 그의 눈이 어두워졌고 이것이 그의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거다. 그 이후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점점 어두워졌고 생존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혼란은 더욱 깊어졌다는 거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라는 질문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야곱을 에서로 오인한 것도 단순실수가 아니었을 거라고 존버그는 추측한다. 하루는 이삭이 에서에게 자기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맛난 음식을 가져오면 그걸 먹고 에서를 맘껏 축복해 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에서는 신이 나서 사냥하러 나갔는데 얄궂게도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리브가가 엿들었다고 했다.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사랑한 리브가가 말이다. 그녀는 야곱에게 염소 두 마리를 잡아오면 자기가 이삭의 입맛에 맞게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 그걸 아버지에게 가져가서 형인 척하고 축복을 가로채라고 지시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은 그녀에겐 해당되지 않나 보다. 모자가 합심해서 이삭을 속이기로 했다는 거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다가는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지 않겠냐면서 그답지 않게 내키지 않아 하자 리브가는 그 저주는 자기가 받을 터이니 걱정 말라고 야곱의 등을 떠밀었다. 이 정도로 빗나간 모정은 막장 드라마 감 아닌가.
하지만 이삭이 어디 그리 만만한 사람이던가, 그는 음식 가져온 이가 누군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기도 했고 그의 피부를 만져보기도 했으며 “네가 정말로 나의 아들 에서냐?”라고 재차 묻기도 했다(창세기 27:18, 20, 21).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을 만져보니 그것은 에서의 손이었으니 눈이 어두운 이삭이 혼란스러워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누군지 확실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음식 가져온 이를 축복했다. 우린 그가 누군지 알지만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이삭이 속아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축복한 이야기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누군가를 ‘축복’하는 행위가 뭘 의미하는지부터 풀어야 한다. 그것은 기도나 청원과는 다른 무엇이었을까? 기도나 청원은 그걸 받는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다. 기도하는 이가 계속 매달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느님을 강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축복이 그것과 같은 거라면 굳이 아버지를 속여서까지 취하려 했던 이유가 뭘까? 아버지는 속여도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축복’에는 기도나 청원엔 없는, 하느님을 강제할 수 있는 마술적 효과 같은 게 있다고 믿어졌을까? 죽기 전에 한 번은 그런 효과를 발휘하는 게 축복이라고 믿었나? 우리에게는 헛웃음만 나오게 할 이야기지만 말이다.
야곱이 음식을 가져와서 “아버지!” 하고 불렀을 때 이삭은 “내가 여기 있다(Here I am)!”라고 대답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실행하는 동안 하느님, 이삭, 천사가 각각 그를 불렀을 때 그가 했던 대답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였다. 그런데 이번엔 이삭이 아들의 부름을 받고 똑같이 대답했다. 이게 흔히 사용된 대답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리아 산 사건과 축복 가로채기 사건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삭은 정말 야곱을 에서로 잘못 알고 축복했을까? 대체로 그렇다고 말들 하나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음’ 또는 ‘생존의 수수께끼’ 같은 혼란 가운데서 누군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축복한 게 아닌가 싶다. 이해할 수 없는 인생과 수수께끼 같은 생존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축복받는 이가 에서든 야곱이든 그건 하느님의 뜻이고 눈 어두운 자신은 축복하는 걸로 할 일 다 했다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삭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야곱을 축복했다. 본래 축복받아야 할 아들은 에서였으니 야곱을 축복한 건 그의 의도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난 후에도 그는 자기가 한 축복을 취소하거나 타인에게 옮길 수 없었다. 의도치 않은 사람에게 축복이 갔지만 그래도 그는 축복이 성취될 걸 알았다. 그뿐 아니라 에서도 그거 알았으니까 그토록 통탄해 마지않았던 게 아니겠나. 그는 급기야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삭은 진실을 알고 나서 “크게 충격을 받고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더듬거렸다”(27:33)고 했다. 내게는 이 표현도 범상해 보이지 않는다.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해도 축복이 남에게 간 것도 아닌데 그토록 충격을 받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을까? 에서만 아들이고 야곱은 아들이 아니란 듯이 말이다.
이 일이 축복의 수혜자가 바뀐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삭의 무의식 속에서 모리아 산의 트라우마를 끄집어낸 사건이라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하느님의 약속을 담지할 자기가 하느님에 의해 죽어야 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그의 영혼/무의식에 남긴 상처가 축복이 잘못 전해졌음을 알았을 때 되살아났기 때문에 이삭이 그토록 큰 충격을 받아 부들부들 떨었던 게 아닌가 한다는 이야기다.
이삭, 그는 누구인가? 겉으로 보기엔 이스라엘 족장들 중에서 가장 평범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이삭이다. 하지만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살았던 사람일지 모른다. 그의 고뇌는 사람의 영혼/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족장들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 이해와 설명이 가능한데 그의 경우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삭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짧은 게 아닐까? 그래서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 더 열심히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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