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꽃자리의 '종횡서해' 2015. 9. 16. 15:31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에로스의 묵은 정념을 일깨우는 일상적 에로티시즘이야말로 숨 막히는 현대문명의 두터운 금기를 성찰하고 그것을 과감히 위반하는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의 숨구멍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비평의 풀무질이다.”(7-8쪽)

 

“이 책이 성서의 해석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관점, 하나 됨을 갈망하는 인간의 꿈이라는 관점, 요컨대 생태적인 창조론의 관점을 좀더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9쪽)

 

1.

 

어깨 품이 넓은 비단옷을 입은 한 청년이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땅을 짚고 있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 드러난 그의 팔은 미끈하고 든든하다. 살짝 드러난 초록색 바지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눈은 황홀경에 빠진 듯 반쯤 감겨 있고,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다. 그는 연못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홀린듯 바라보고 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카라바조(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가 그린 나르시스의 모습이다. 나르시스는 자기 아름다움에 이끌려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죽고 만 비극의 인물이다. 그의 비극은 무엇일까? 그를 연모하는 다른 이들의 마음에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자족할 뿐 다른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비우지 않음으로 그는 신의 노여움을 샀다. 철학자인 김상봉 선생은 나르시스의 비극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르시스는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정신이다. 그는 언제나 홀로주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자기만이 주체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의 객체이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 속에서 모든 타자는 사물화되고 인식대상으로 정립되기는 하되, 결코 인격적 만남의 대상으로서 그에게 마주설 수 없다.”(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한길사, 21쪽)

 

누군가에게 매혹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동안 견고하다고 생각해왔던 자기 주체성의 성채는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 무너짐은 자기 상실로 이어지기보다는 자기 초월 혹은 자기 고양의 계기가 된다. 사랑이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안타깝게도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런 매혹 앞에 자기를 던지지 않는 것 같다. 매혹된 영혼이 되기보다는 스펙을 견주어보며 사뭇 안전한 길을 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보헤미안적인 작가 목수정은 "생물학적인 연애 충동마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조국의 심상치 않은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해 근심한 바 있다. 변형된 나르시스들이 비틀거리며 오가는 거리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나르시시즘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질적인 타자와의 하나 됨을 추구하는 에로스에 붙들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라는 말은 공론의 장에 등장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에로스라는 말이 발설되는 순간 사람들은 거의 즉각적으로 성애를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을 띠고는 금기 뒤에 숨으려 한다. 물론 호기심을 버리지는 못하면서. 성 담론이 넘치는 시대에 에로스를 소환한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 무모한 열정에 달려든 이가 있다. 빼어난 필력으로 성서 텍스트에 담겨 있는 숨은 뜻을 밝혀왔던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박사가 그이다.《성서의 에로티시즘》. 제목이 파격적이다. 기독교 성 정치학의 뿌리로 작동해왔던 ‘성서’와 금기시되어 왔던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가 ‘의’라는 소유격으로 엮여도 되는 것일까? 독자들은 궁금하다. 그런데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고은비의 그림은 외설스럽기는커녕 성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생명의 기운이 곰비임비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가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주목하는 것은 온갖 금기와 억압으로 점철된 오늘의 신앙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로스는 풍요의 신과 결핍의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고 때로는 결핍감을 느낀다. 결핍은 누군가에 대한 혹은 뭔가에 대한 그리움을 낳는다. 주로 ‘동경’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젠주흐트(Sehnsucht)는 ‘보다’와 ‘찾다’라는 말의 조합이다. 보고 찾는 것이야말로 동경 혹은 그리움이라는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동경을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와 활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본다면 에로스는 우리 삶을 추동하는 힘, 혹은 관계를 가능케 하는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성서에서 에로스적 표현이 가장 다채롭게 표현되고 있는 책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불리우는 아가서이다. 아가서가 신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은유이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표현이든, 노골적인 사랑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스캔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저자는 아가서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준다.

 

“아가의 사랑이 추구하는 에로틱한 아름다움은 거친 타락의 현실을 가로질러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하나 됨이란 원초적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담대한 의욕에 잇닿아 있는 듯하다. 그것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다. 죽음과 소멸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전부를 불태우고자 하는 헌신의 열정이 에로스의 밑자리에 창조적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이다.”(185-186쪽)

 

‘인간의 하나 됨’을 회복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테마이기도 하다. 하와가 등장하기 전 아담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했지만 ‘홀로 있음’이 야기하는 고독 속에 유폐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타자의 존재가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그것으로 하와를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낯이 익은 동시에 낯선 존재인 하와를 보며 이런 노래를 부른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은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 낯선 타자를 보며 기뻐하며 경탄하는 아담의 모습이 이채롭다

 

저자는 이 고백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바람직한 관계를 읽어낸다. 인간은 뼈를 공유하여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서로를 지탱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뼈 중의 뼈’라는 말에 담긴 존재론적 요청이다. ‘살 중의 살’이라는 말에서 저자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당신의 요소들까지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포용하겠다는 의지”(18쪽)를 엿본다. 즉 낯섦을 적대감정으로 환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지평으로의 초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환대의 관계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하나 됨의 체험이다. 서로에 대한 경탄과 어루만짐을 통해 드러나는 이런 하나 됨의 의지를 저자는 에로틱한 것으로 명명하고 있다. ‘나’의 쾌락을 위해 '너'를 물화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타락한 성애와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영어로 구속을 뜻하는 단어 어토운먼트(atonement)는 ‘하나 되게 함’이라는 뜻으로 풀이 될 수 있다. 구원 체험이란 결국 소외가 극복된 상태, 등 돌림의 관계에서 마주 봄의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러한 하나 됨의 가장 완전한 예를 예수에게서 발견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이들의 공동체의 하나 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 하나 됨이야말로 인류가 지향하는 역사의 황홀경일 것이다. 황홀한 비의의 세계는 근엄한 율법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주려는 사랑을 통해 열린다.

 

 

 

2.

 

하지만 에로틱한 에너지는 역사 변혁의 동력이 될 수도 있고, 무자비한 파괴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로써 미학적 정치를 실천한 주인공”(218쪽)으로 에스더를 들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모에 의해 멸절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에스더는 ‘인형과 같은 장식적 위상’에서 벗어나 민족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다. 그때 그의 무기는 왕조차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이었다. 저자는 에스더의 그런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구원의 ‘때’를 위한 전위적 몸부림”(227쪽)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들 수 있는 사람은 테클라이다. 테클라는 ‘바울과 테클라 행전’이라는 외경문헌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급진성과 금욕주의의 메시지를 접한 후 테클라는 약혼조차 파기하고 바울을 따른다. 테클라는 바울을 향한 집요한 그리움을 드러내지만 금욕적이었던 바울은 한사코 그를 멀리한다. 나중에 테클라는 독립적인 주체로 서서 새로운 여성 리더십의 전범으로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테클라의 사랑 이야기는 그리움이 욕정의 에너지로 전락하지 않고 공적인 사명으로 승화될 수 있는 틈새를 확보하였다”(310쪽)고 평가한다.

 

에로틱한 에너지가 파괴의 원천으로서의 작용한 예는 살로메를 들 수 있다. 살로메는 관능적인 춤으로 왕과 고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무엇을 청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왕의 호언에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 했다. 살로메의 “에로틱 에너지는 파괴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선악의 경계를 허물며 일거에 의인을 비참한 사지의 그늘로 처박는다.”(245쪽) 오늘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에로틱한 에너지는 이처럼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는 에로티시즘이 숭고한 비극으로 귀결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정념을 주체할 수 없었던 삼손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영웅이라기보다는 반(反)영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거룩한 소명과 이국적인 여성의 몸에 의탁하여 고독을 달래려는 속된 에로스적 열망 사이에서 흔들린다(100쪽). 그는 에로스의 덫에 걸려 머리털을 잘리우고 눈조차 뽑히는 수모를 당한다. 그런 후에야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 죽음을 통해 소명을 이룬다.

 

차정식 박사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근친상간의 문제도 우회하지 않는다. 성경은 근친상간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한다(레위기 20장). 그런 짓은 ‘망측한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창조한 주체와 피조된 객체 사이의 질서를 혼란케 만드는 전복적 위반"(45쪽)이라고 설명한다. 유전학적 이유에서든, 문화인류학적 이유에서든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은 ‘세상의 도리’로 공유된 원초적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도래할 미지의 위험에 대한 공포가 작용한 결과”(47쪽)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드물기는 하지만 근친상간을 용인하거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소돔성의 멸망 이후 산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롯과 그의 두 딸의 경우도 그 중 하나이다. 롯의 두 딸은 세상 풍속대로 결혼한 남자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여 취하게 한 뒤 차례로 아버지 곁에 누웠다가 아이를 잉태했다. 성경은 그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고 건조하게 보도한다(창세기 19:30-38).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도 위반의 경계를 넘음으로써 생명을 이어가게 된 이야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겠다. 다말은 자식을 얻어 남편의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에 따라 신전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맞아들였다. 저자는 다말의 선택을 딱딱한 제도와 법규, 그리고 “억압의 금기를 넘어 관계의 정의를 이룩하는 지경으로까지 뻗어가는 매우 희귀한 사례”(69쪽)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가 근친상간 자체를 용인하자는 이야기가 아님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3.

 

저자는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매음 혹은 음녀의 사회학에 대해서도 예리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음녀를 꾸준히 요구하는 남성 가부장체제의 남근주의가 어떻게 여성들의 생명을 착취하고 파괴했는지 여러 학자들의 논거를 끌어들여 정리하고 있다(281쪽). 신전창녀들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적 의례의 외피를 입고는 있지만, 신전창녀들은 수줍은 매음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종교기관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했다는 사실도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포르노그래피의 수사학을 차용하여 에로티시즘의 도발적 창의성을 짓밟는 경우이다. 저자는 그러한 예로 에스겔 16장과 23장을 든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조국의 현실을 극단적인 성욕에 사로잡힌 음녀가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빗대 말했다. 저자는 이 대목을 매우 불편해한다.

 

“왜 패망한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 성욕의 자유를 당당하게 추구하고 향유한 건강한 여성의 자유로 빗대어졌는지, 그녀의 몸에 피어오르던 에로틱한 에너지의 활성화가 어찌하여 음탕한 방종의 낙인 가운데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지 본문의 행간에 질문의 싹조차 엿보이지 않는다.”(205쪽)

 

에로틱한 에너지가 가장 아름답게 승화된 예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은 예수가 식사를 하고 있던 자리에 등장하여 눈물로 그의 발을 씻겨주고 머리털로 닦은 연후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다. 이 광경은 인습에 찌든 이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외설적으로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예수는 여인을 만류하지 않는다. 어떤 ‘사무침’의 정서가 그들을 이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저자는 지극한 열정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다만 그녀는 가장 치열한 자신의 신체 언어로써 예수를 속속들이 만나고 싶었고 자신의 극진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 표현의 진정성을 옹호하면서 그 몸짓 언어를 수락했다. 한 영혼의 가식 없는 서비스를 남세스레 여기지 않고 최대한 즐김으로써 예의를 표했다.”(263쪽)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도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렇게 해석한다. “복음 전파의 사명이 사명을 위한 사명이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으로 우리의 몸을 통해 구현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복음도 그 본연의 목적에 부응할 수 없다는 우려의 전언이다.”(266쪽) 어쩌면 이 대목이야말로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의 욕구와 ‘욕망’을 금기의 경계 밖으로 추방해버린 신앙 혹은 신학이 오늘의 기형적인 기독교를 낳은 것이 아닐까? 삶의 아름다움을 항유할 능력을 거세해버리는 순간, 삶은 축제가 아니라 고역이 된다.

 

4.

 

차정식 박사의 안내를 따라 성경의 세계 이곳저곳을 탐사하는 이들은 한편으로는 후련함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숨기고 싶은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드러내고 싶은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자기 욕망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매끈한 텍스트로 읽는 이들은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금서 목록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주름 잡힌 텍스트임을 어렴풋이나마 눈치 채고, 그 주름 사이에 깃들어있는 서사성에 귀 기울이려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성경과 더욱 깊이 만나게 될 것이다.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해체하는 기능을 한다면 차정식 박사의 이 책 또한 에로틱하다 할 수 있다. 근엄한 이들이 그어놓은 금기의 선을 마구 넘나들기 때문이다. 신학자의 책은 흔히 읽기 어렵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렵지 않다. 저자의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독서의 리듬을 방해하는 단어 배치에 놀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도 어떤 자리에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아우라를 드러낼 때가 있다. 차정식 박사의 글이 때로는 너무 화려한 듯 싶어 불편할 때도 있고, 중층적인 문장 구조가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쓸 수 있겠는가?

 

《성서의 에로티시즘》을 통해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국교회 혹은 한국사회에서 경청된다면 우리는 좀 더 에로틱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른다. 글을 마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카라바조의 다른 그림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을 떠올린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핍박을 받던 시절 유딧은 “저들의 오만을 이 여자의 손으로 깨뜨리십시오”(유딧 9:10) 하고 기도한 후 술에 취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렸다. 카라바조는 바로 그 장면을 화면에 담았다. 섬뜩하다. 유딧의 서늘한 칼날이 목에 닿는 느낌이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도취적 나르시시즘이 과잉 범람하면서 자본의 힘에 굴복하는 오늘의 현실(87쪽)에 유딧의 칼날이 닿을 수 있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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