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1)
가을이 홀로 산책하는 소리
가을 바람이 창문 넘어 허공을 그득 채우더니 이내 흔적없이 방을 비웠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존재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뜨겁던 여름의 기억은 이렇게 소멸되어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력하게 추방당하고 만 것 같은 여름은 또다른 여름을 준비하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어떤 계절에도 승리와 패배는 없습니다. 각기 자신의 할일을 열심히 하면서 머물러 있다가 홀연 종적을 감출 뿐이지요. 그래서 계절마다 우리는 그리움을 간직합니다. 그런 애틋함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세월은 이야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풍경을 그려나가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어가면 몸은 쇠해지기 마련이고 몸이 쇠하면 영혼조차 흔들립니다. 그러나 초월에 대한 의지는 우리에게 상상을 넘는 기력을 부어주곤 합니다. 현실이 견고하게 짜놓은 성곽은 우리에게 안전판이기도 하지만 탈출하지 못하도록 만든 감옥이기도 합니다. 이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 안에 그대로 자신을 길들이며 사는 것은 동물원에 갇힌 맹수가 되는 길입니다.
사자의 심장을 반으로 쪼개는 수술을 하고, 독수리의 날개에 보이지 않는 징을 박고, 표범의 다리에 돌을 달아 놓은 자들의 속셈을 무심히 지나치면 우리의 자화상이 동물원에 걸린 알림판이 되고 맙니다.
모든 탈출과 모든 용기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두려움을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는 ‘이력서 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이력서는 짧아야 하는 법…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 시킬 것…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입할 것…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다물어야지…”
이런 식으로 정리되는 인생은 자신에게도 이미 기만입니다. 시간은 어떤 때에는 자비이며, 어떤 때에는 냉혹함입니다. 시간은 어떤 때에는 기회이며, 어떤 때에는 굳게 문이 닫힌 독방입니다. 시간은 어떤 때에는 축복이며, 어떤 때에는 알 수 없는 공포입니다. 시간은 어떤 때에는 감사이며, 어떤 때에는 지독한 지루함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입니다. 우리 몸과 영혼에 소각할 수 없는 무늬가 됩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길 것인가는 결국 나의 선택입니다. 독방에 갇혀서도 자비를 누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축복을 누리면서도 지루하다고 탄식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스쳐 지나는 밤하늘에 자신의 미래를 이끄는 별을 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도시에 세워진 무수한 인공의 등대들이 장막처럼 가리고 있는 우주의 신비에 마음을 열고 사는 일은 이제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건 돈이 되거나 지위가 되거나 권력이 되는 일과 하등 인연이 없어서입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도리어 우리를 현자로 만드는 비밀임을 알아차리는 이는 계절마다 자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오판이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짙게 화장한 모습에 현혹당하지 않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가을바람처럼 창문 넘어 그대의 방을 채우고 이내 비워도 여전히 남아있는 내가 되는 감격이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그리워지길 기도합니다.
그런 기억들이 이 가을, 더욱 깊게 내 몸의 그리고 내 영혼의 편지로 기록되어가기를 태초의 갈망처럼 피어 올리기를 빕니다. 가을이 홀로 산책하는 소리가 저만치 적막처럼 다가옵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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