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 주는 편지(3)
자기를 사랑함,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사람이 살면서 직면하는 모든 경험은 그 사람의 인생의 내용이자 그에 대한 공부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인간은 자연 중에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을 때, 두 가지를 말한다. 갈대와 생각! 갈대의 생각은 흔들림이고 흔들림은 갈대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냥 갈대(흔들림, 생각)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다.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인간은 무의미한 생각들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들을 개관(槪觀, 생각)함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을 본다’는 것은 자각(自覺)이 일어났음을 가리킨다. 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하고 비취면 순식간의 그 안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을 ‘이해’라하고 ‘깨우침’이라 하며, 그 과정을 공부라 한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찾아온 생각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있고, 그 찾아온 ‘손님’과 얼굴을 대하고 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손님의 부류는 실로 다양하다. 무뢰한도 있고 폭군도 있고 달콤한 유혹자도 있다. 우리를 방문하는 이 손님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 비밀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신비롭다.
일러스트/고은비
손님 접대는 지나치지 않게 적절하고 정중해야 한다. 손님은 눌러 사는 식구가 아니다. 찾아온 소정의 목적을 마치면 방문객은 제 갈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회견을 마치지 못하면 침실에 응접실에 화장실과 마루와 마당에 눌러앉는다.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는 집안은 곧 마비될 것이다. 개중에는 아예 독재자처럼 주인을 내쫓고 왕노릇을 하려는 부류도 생길 수 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국민은 노예가 된다. 주인이 도망치지 않으면 배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생각하는 갈대는 흔들리면서 자각해야한다. 생각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러니 분별해야 한다. 생각과 분별, 이 둘을 한꺼번에 수행하려면 고도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개 어정쩡한 기술을 가지고 산다.) 사람이 기술을 완전히 익히려면 따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이 공부 또한 처음엔 정신을 차려 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철(性徹, 1912~1993)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항상)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지. 그것이 아직도 박혀 있거든.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이것이 내 생활의 근본자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더러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그래도 불교가 가장 수승(殊勝, 특히 뛰어남)합니다. 불교보다 나은 진리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불교를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 「법정(法頂) 스님과의 대화」중, 밀알, 1983.)
나는 여기서 성철이 말한 ‘불교’에 밑줄을 친 다음 그 밑에 ‘기독교’라고 써넣어 본다. (결국 같은 말인데 이런 말이 왜 필요한지 너희는 모르리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한다. 너희들도 벌써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장례식에 참례했었다. 허무하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례식이 끝나면 무의미한 인생을 계속 살기 위해 재빨리 무덤을 떠난다. 가장 오래 머물고 자주 찾아오는 사람은 고인을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말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이러한 기억 또한 생각의 한 방식이다. 애도란 헤아려보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철학자의 주장은 실천에 의해서만 진실로 증명된다고 말했다. 인생이 공허한 것이고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 주장하려면 그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곧 자살(自殺)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되뇌면서도 자살하진 않는다. (물론 이 나라에서는 하루에 40여 명씩이나 되는 자살자들이 있다. 누가 그들을 자살로 몰아대는 것인가? 이것도 곧 밝혀지리라.)
종교 재판정에서 스스로 내린 결론을 부인해야 했던 갈릴레오처럼 우리를 모순되게 나마 계속해서 살게 하고 자살하지 않게 하는 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를 발견치 못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용감한 인간들에 비할 때 도리어 비겁하고 비열하고 열등한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정작 자신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개인의 의식은 전체의 의식으로부터 온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서로에게 가해자이며 피해자인줄 알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의 위협을 받는지 알겠는가? 한 사람의 생각은 그를 둘러싼 전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의미에 관한 의구심을 낳는다. 오로지 죽음을 향해가는 삶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대답은 없다. 있는 것은 의구심이다. 따라서 생각해야 한다. 매순간 자신에게 찾아오는 생각을 자각함으로써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살아있는 방식이다! 그 자각 가운데 흔들려도 더 이상 흔들림이 없고 죽어도 더 이상 죽음이 없어진다. 이 말은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를 닦아 공중부양에 축지법을 쓰는 도사도 앓다 죽게 마련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니까 죽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처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신학(神學)’이라 부른다. 신학이 그의 삶을 만드는데, 상상해 보라. 그러한 신학이 그들의 생각(현실)과 얼마나 상관없는 생뚱맞은 것일지. 그들은 딴소리로 제소리를 덮는 사오정과 같이 자기세계 안에서 순진하긴 하다.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게 아니라 한 번 죽는다. 이미 죽음을 선고 받았으므로 벌써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 또한 신학이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살아있음의 의미가 될 것인가 하는 탐구가 나온다. 바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근원, 곧 나에게서 일어나는 이 모든 생각들의 출처와 행방을 연구하여 나의 생과 사의 근본을 탐구하는 일이 내 인생의 숙제이다. 내 <자서전(自敍傳)>의 주제는 바로 나다.
본래 이러한 생각과 공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생각 따로 공부 따로의 폐단이 생긴다. 즉 그가 쌓아올린 공부의 지식과 그의 의식적 현실이 서로 반(反)하여 극단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타인들은 외면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가까이 가서 렌즈를 들이대면 예상과 다른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냥 책상 앞에 앉아 고문서를 뒤지는 것으론 이 공부가 못된다. 곧 현실(사는 일 자체)과 더불어 항상 그 현실을 도구로 병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공부가 이 점을 일깨워 주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이라는 삶의 경험을 항상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지닌 공부로 여길 수 있고 볼 줄 아는 안목(眼目)이다. 거기서 공부가 시작된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 곧 자기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아내는 ‘유별난 관심’이다. 그러니 자기를 직시(直視)하고 직면(直面)하려는 사람은 먼저 침착하고 고요하고 용감하고 의연해야 한다. 완벽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흔들리면서 그래야한다는 말이다.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는 26세 때인 1854년 제정러시아와 오스만 터키간(間) 크림전쟁에 참전했다. 포탄에 동료들의 팔다리가 찢겨져 나가는 최전선 포대에서(그는 포병 장교였다) 그는 전쟁과 살육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묻는 공부를 했다. 그때 쓴 세 편의 중편소설(《세바스토폴 연작》)로 톨스토이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됐던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욕망과 탐심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경쟁과 시기 질투로 과목을 삼는다. 우쭐대고 들떠서 시끄럽고 방자하게 군다. 비교와 경쟁에서 오는 왜소함에 위축되어 절망한다. 부질없는 탐욕에 붙들려 원치 않는 분쟁과 쓸데없는 소란에 끌려 다닌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 자기를 사랑한다고 분투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나는 너희들이 무자각한 사람들 속에 뒤섞여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거기가 살아있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
Who has seen the wind?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I nor You:
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The wind is passing thro.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나도 당신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뭇잎 살랑거릴 때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you nor I:
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The wind is passing by.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무들 고개 숙일 때
그 곁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1830~1894)-
아, 이 모든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 줄 알았느냐? 너희도 거기에 한몫 가담하고 있느냐?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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