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 주는 편지(5)
불멸과 소멸, 자매들의 전쟁에 관하여
‘쁘레스뚜쁠레니’와 ‘나까자니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라는 소설에는 - 다른 얘기도 많이 나오지만 - 두 자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맏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당연히 맏딸이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제일먼저 구약성서의 장자(長子)의 권리를 둘러싼 끝없는 암투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선택(選擇)과 유기(遺棄)라는 인간문제의 근본적 조건이 아닐까 싶다.
너희가 읽어보면 알게 될 테지만, 구약성서의 장자 다툼은 대부분 차자(次子)의 승리로 끝난다. 그 기나긴 싸움의 역사는 한 형제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의 첫 번째 사람이었던 아담의 장자는 가인이지만 신께서는 차자인 아벨의 편을 들어주었다.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이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열납(받아들임)했다고 쓴다. 선택을 받지 못한 가인은 실망과 원망이 교차하며 얼굴빛이 변했다. 그의 흘기는 눈빛은 아벨을 정조준했다. 가인은 왜 자기를 더 사랑해 주지 않는 하나님(아버지)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 동생 아벨에게 분노를 품었을까? 기억해 두어라. 죽이고 싶도록 형제가 미워지는 이 피치 못할 실망과 원망에 관하여. 비록 가족의 역사 속에는 그런 경쟁과 시기가 비일비재하고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거기 길들여지기는 한다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7).
원인 제공자의 말씀이니 가인으로선 더욱 아프게 찌르는 책망이었을 게다. 그러나 또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가인은 문에 엎드려 걸려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죄에 걸려 넘어진다. 일부러 그랬을지 어쩔 수 없었을지, 분명한 것은 그가 원하는 죄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죄는 음모의 인격체(人格體)로 묘사된다. 그는 뱀이고 사단이고 마귀다. 그놈은 걸려 넘어뜨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자이고 음모를 꾸미며 유도하는 자이고 범죄를 실행하도록 부추기는 자이다. 가인은 자기 안의 음모의 인격자를 품게 된 후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다. 그는 잔인하게 동생을 살해했다.
일단 범죄가 실행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범죄자 자신에게 돌아간다. 죄에게 그것을 물을 수 없다. 이를 두고 ‘죄를 지으면 결국 지옥행’이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지옥을 자기에게 불러들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자기지옥에서 일생을 양심의 괴로움에 시달리며 보낸다.
동생을 죽이고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 없었던 가인은 길을 떠난다. 그는 형제의 피를 흘린 땅으로부터 버림받아 땅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인이 된다. 곧 자연과 편안히 일체가 되고 싶으나 자연이 받아주기를 거부해 땅에서 발이 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식물은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동물은 자연에 맨 몸으로 눕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집을 지어 거주한다. 신과 옷과 집은 자연에게 거부당한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자연은 그를 자기의 일부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땅에서 모든 것과 화해하려 발버둥을 치지만 땅은 그에게 가시와 찔레와 엉겅퀴를 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정(선택)을 받은 형제를 시기하여 그를 살해한 범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목한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다시 그 땅의 거절을 형제에 대한 착취와 동료에 대한 적대행위로 보상받으려 한다. 아벨들에 대한 가인들의 죽임과 땅(자연과 섭리)에 의한 가인들의 추방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땅이 모자란다, 돈이 모자란다고 변명하길 좋아하지만, 땅이 인간을 용서할 겨를이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리라.
도스또옙스끼의 소설 《죄와 벌》은 인간 살해에 관한 영감 넘치는 작품이나 그 번역된 ‘죄와 벌’이란 말은 실감이 너무 모자라다. 러시아어로 《죄와 벌》은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쁘레스뚜쁠레니에 이 나까자니에)’라고 한다. ‘쁘레스뚜쁠레니에’는 ‘죄’로 번역되지만 이 죄란 단순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벗을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굴레를 연상시킨다. ‘나까자니에’ 역시 단순한 벌이 아니다. 그것은 형틀에 매어 벌거벗겨진 채 사지를 벌리고 금속의 형구에 찔리고 잘려서 죽어가는 형벌을 연상시킨다. 기억하거라. 성경은 한 인간에 대한 미움을 그에 대한 살인과 같은 범죄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다.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미움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깨우침에 있다. 깨우침이 있어야 그 다음 회개(획기적으로 길을 돌이킴, 방식을 바꿈)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이지만 장자의 권리는 이삭의 차지였다. 물론 그는 첫 번째 아내에게서 난 적자였고 이스마엘은 첩에게 난 서자였으니 시대적 정황상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스마엘 대 이삭 갈등의 역사는 현대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도와 무슬림까지 이어져 온다.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은 사실 그렇게 사이가 나쁜 형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형제가 함께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그들에겐 아직 유대 기독교도의 교리도 이슬람의 교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들은 대대로 서로를 경원했고 미워했고 적대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그들의 어머니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이삭의 어머니의 사라의 여종이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는 남편에게 하갈을 주어 아들을 낳게 한다. (사라는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천사의 전갈을 받았지만 믿고 기다리지 못했다.) 하갈은 여종에서 계승자의 어머니로 일약 신분이 상승하자 사라를 멸시했다. 사라는 두 번이나 하갈을 광야로 내쫓는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죽음직전 가까스로 아들을 지킬 수 있었다. 천사는 그녀에게 사라에게 돌아가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비웃음’이란 뜻이다. 천사가 아들을 낳게 되리라 전해주었을 때 사라는 장막 뒤에서 이를 비웃었다. 자신이 이미 여자의 전성기를 보낸 아무 낙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비웃음은 역설로서 야비한 비웃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믿기지 않는 축복에 대한 반신반의의 웃음이다. 아마도 그 웃음의 반전은 아이를 낳아본 부모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믿기지도 않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축복의 반전일 것이다. 세상에 너희 같은 딸들을 낳게 되리라고 (상상이야 했겠지만)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이삭 출생의 잔칫집 분위기 뒤편에는 이스마엘 모자의 진짜 비웃음도 있었을 것이다. 고립되고 잊혀져버린, 버림받고 불안한 모자의 장막에 이번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음모의 인격체가 찾아왔을까? 아마도! 그는 자기 친구들을 데려왔을 것이다. 미움과 슬픔과 원망과 저주라 불리는 아주 오래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어둠의 자식들을. 이스마엘은 그들을 친구삼아 자신의 불운한 청년시대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런 예언을 받았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창세기 16:12).
이삭이 선택받은 축복의 자연스런 계승자라면 이스마엘은 그것을 싸워서만 쟁취하는 유기된 인간이다. 싸우기 위해 그는 자신과 비슷한 동패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무릇 인생에서 친구라 불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은 대개 불운한 시절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친구였는지는 세월이 흘러간 뒤에야 알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우리들의 친구인 것이지 또 다른 친구를 나중에 가서야 만나게 될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 일이겠느냐. 새겨 유익이 되기를!
갈망과 절망, 흠모와 비탄의 변곡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장자는 에서였으나 장자의 권리는 쌍둥이 동생인 야곱에게 돌아갔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라고 기록한다(로마서 9:13). 왜 그랬을까? 나중에 두 민족이 된 이 쌍둥이 형제의 갈등도 그 결과가 천년 이상의 역사를 물들였다. 에서의 후예 에돔 족속은 수세기에 걸쳐 야곱의 후손들과 싸웠고,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 빌붙어 유대를 통치하던 식민지 어용정권 헤롯가문을 배출하기도 했다.
에서는 장자였고 전사였고 사냥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가 즐겨하는 사냥꾼의 특선 요리를 잘했다. 부모는 자주 자기에게 없는 탁월함을 가진 자식을 애인 대하듯 좋아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 이유가 반드시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는 순진하게도 자신을 너무 믿었다. 강력한 육체를 지닌 반면 정신이 빈약했다. 보이는 즉물적 욕구에 쉽게 굴복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에 무신경하고 경솔했다. 그는 부모가 원치 않는 여자들과 함부로 관계했고 두 번이나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아먹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붉은 죽(에돔)’이 되었다.
‘에돔’은 에서의 이름에서 따온 불명예스러운 비칭일 것이다. 에서나 그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리는 없다. 이는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둘러싼 이민족들을 ‘오랑캐’라 불렀던 것과 같다. 야곱의 후손들이 에서의 후손들을 ‘에돔’이라 부를 때마다 그들은 에서가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그 매매의 법적 효력을 상기시켰을지 모른다. 에서는 그때 이미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던 것이라는 뜻이다.
에서가 사냥꾼에 거친 들사람인 반면 야곱은 조용하고 과묵했으며 부모 곁에서 양을 치는 목부(牧夫)로 지냈다. 리브가는 그를 편애했다. 아버지가 형을 사랑했으므로 어머니가 동생을 더 아껴주었다는 것은 가족 간 감정 흐름의 질서상 이해가 가는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생인손이 더 아픈 법이다. 약한 자식, 못나가는 자식, 형편이 어려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편애는 균형을 맞추려는 자연의 자비로운 성품이다. 특히 어머니들이 그렇다. 물론 이러한 자비도 다른 자식들에게는 부당한 편애로만 보여 시기 질투의 빌미가 될 것이다. 또 그런 부모의 편애를 바탕으로 이른바 을의 갑질이 발생하기도 한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믿음직한 맏아들(그리스도)이 되랴?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이 이 같이 다르다는 것만을 기억해 두어라.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녀석’이라는 뜻이다. 어머니 리브가의 배에서 나올 때 야곱은 쌍둥이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이는 그들의 장래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형상이었다. 듣기에 따라 야곱이란 이름은 야비하고 비열한 뜻으로 들린다. 그는 두 번이나 형의 장자의 명분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다. 한번은 붉은 죽 한사발로, 또 한 번은 자신을 형인 것처럼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아버지의 마지막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가 즐겨하는 요리감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동안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형의 흉내를 냈다. 에서의 살갗을 꾸미고 목소리를 꾸몄다. 어머니가 그의 속임을 위해 형의 특선요리를 대신 만들어 주었다. 이삭은 의심스러웠지만 야곱에게 에서의 축복을 준다.
장자의 특권, 그것은 다른 형제들 보다 한 몫을 더 받는 재산상의 법적보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몫이란 남 보다 두 배를 받는 재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동격, 하나 됨을 의미한다. 신적 선택이자 영원한 불멸의 계보에 들어가는 되는 것이다. 그 선택과 유기는 일찍이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던 갈망과 절망, 흠모와 비탄의 변곡점이다. 선택된 자는 선택이 그의 운명이 되고 유기된 자는 유기가 그의 운명이 된다. 그랬기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기억해 두어라. 이 선택과 유기의 깊고 깊은 의미를.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처럼 에서도 야곱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야곱은 아벨과 같지 않았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야반도주한다. 그리고 무려 20년을 타향에서 떠돌았다. 그런데도 선택은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그 의미는 ‘신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비겁한 겁쟁이요 비열한 책략가였던 야곱은 형제의 발뒤꿈치나 붙잡는 보잘 것 없는 위인에서 신과 겨루어 이긴 위엄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누가 그것을 알아주랴. 자신만이 아는 것이다. 훗날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에서는 야곱을 용서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불완전했고 의심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는 여전히 장자의 권리에서 유기된 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에서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잃었을 때도, 야곱을 용서했을 때도, 용서한 후에도, 매양 어리석었다. 그는 도대체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선택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태도
야곱의 자식들에 관해서는 다 말할 수 없다. 아내가 넷에 아들이 무려 열두 명이다. 생물학적 장자는 르우벤이고, 실질적으로 장자 역할을 하며 아버지가 죽을 때 두 몫의 축복을 받은 건 요셉이고, 나중에 장자로 추존(?)된 건 유다였다. 구약을 읽어보면 몇 군데서 이 요셉의 자식들과 유다의 자식들 간의 역사전쟁이 계속됐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최후 승자는 다윗대왕을 배출한 유다지파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나 우스운가? 장자의 축복이란 두 몫은 대개는 그저 상징에 불과했음이니. 오늘날 부친의 유산을 놓고 벌이는 형제들간의 전쟁과는 사뭇 다른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무엇이라 분명히 규정할 수 없지만 무엇을 다툼인지는 능히 가늠할 수 있는 싸움이다. 선택 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는 명확히 갈린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말하자면 혈연의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전쟁이다.
그런데 왜 성경의 장자다툼은 대부분 차자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신의 선택이 자연적 서열에 따른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준다. 누가 신의 선택을 받게 될는지는 신만이 아시고 결정하신다. 그것을 명확히 일깨워주기 위한 방식이 차자의 뜻밖의 승리라는 것이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오로지 강조에 있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이 차자라 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해석이다.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자연히 차자에게 돌아간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연적 서열로서 가장 먼저 태어난 맏이에게 신적 선택이 돌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이 구약성경이라 할 때, 그것을 생활의 교범으로 삼았던 그들 유대인들 개개인의 가정에서는 어땠을까? 이런 태도들이 우리 한민족만큼이나 유난스레 족보를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을 낳았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폐단(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디모데전서 1:4). 그러나 한 부모 밑에 태어난 한 형제(자매)간의 장자다툼이 모든 인간쟁투의 기본단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선택받은 자가 되는 것. 선택받은 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버려진다는 의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택받은 자는 이미 선택 받은 것이고 버려진 자는 벌써 버려졌다는 것. 거기로부터 선택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태도가 나오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만든다.
하늘의 맏딸이 되거라
쿤데라는 두 자매의 인생을 통해 선택과 유기, 불멸과 소멸의 인간쟁투의 주제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야망에 의해 굴절되기는 하지만 결코 변개되는 것이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서가 야곱을 추방시키지만 아벨과 야곱의 장자의 선택이 취소되지는 않는다. 쿤데라의 《불멸》에 등장하는 여동생 로라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대신 끝없이 언니 아네스의 뒤를 쫓는다. 그녀의 모든 선택은 언니의 선택과 결부되어 있다. 옷, 액세서리, 취미, 전공, 제스쳐, 남자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끝없이 언니를 탐한다. 그것이 결국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나 언니에게는 그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의 유산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깨닫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네스를 자신의 정신적 분신으로 여긴다. 소설에 보면 아버지는 실제로 아네스에게 비밀리에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선택된 장자의 두 몫을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네스는 자기에게만 남긴 아버지의 비밀유산을 동생에게 나누어 주려 하다가 그만둔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니셨던 개인적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건 나눌 수 없는 재산이다.
살면서 절실히 깨닫는 것은 ‘사람은 이렇게도 다르구나’하는 절망인데 거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들)의 전투가 개입된다. 그러나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이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어떤 패자들을 보면 내가 승자도 아니면서 승자처럼 통쾌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만만찮게 많지만) 때로 오래도록 시달린 누군가에 대한 기대를 마침내 완전히 포기하고 나면 의외로 용서가 선선하니 쉽다. 그러나 그런 누군가를 축복해줄 수는 없었다. 그건 용서의 문제는 아니지 싶어서다.
굳이 기독교적 교의가 아니라도 인간사의 무수한 선택과 유기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이다. 너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시달린 뒤끝이 통쾌하지만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일생을 특정한 타인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경쟁심으로 살기도 한다. 유기된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그 원망과 미움으로 스스로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럴 경우 그 대상이 된 상대자는 수많은 곤혹과 의혹을 거듭하지만 점차 이러한 무의미한 전쟁에 질리게 마련이다. 결국 이러한 싸움에선 물러나는 길 외엔 해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잊지 마라. 선택된 사람은 선택의 싸움에서 이미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진정한 맏아들은 스스로 일체감 속에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이어간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예정이란 실제로는 신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유기된 인간의 고집스런 집념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딸들아, 두렵구나. 나는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을 위해 기도한다. 너희의 하늘을 우러르거라. 아빠의 첫째, 둘째, 셋째가 아니라 각자 그 하늘의 맏딸이 되거라. 너희는 무엇보다 이 세상에 가득한 자매(형제)들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되거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주는 비밀한 한 몫을 더 가진 딸들이 되어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보물은 여전히 보물이다. 그 가치를 경솔히 여기지 마라. 하나님의 진정한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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