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너나 잘 하세요!”(1)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김민웅 오늘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진단을 하고, 어디가 돌파 지점인가를 고민하는 그런 자립니다. 각자가 종교를 대표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 이야기든 타종교 이야기든 다양하게 풀어보면 좋겠습니다.
김인국 한국의 종교 현실에 대해서는 ‘친절한 금자 씨’가 이미 결론을 내렸어요. “너나 잘 하세요!”라고. 누가 누구를 대속하고 구원한다는 말이냐 그런 것이지요.(웃음)
도법 얼마 전 제주도에서 정부가 유치한 세계자연보존총회를 했어요. 거기서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잘한 것으로 얘기했나 봐요. 시민사회가 이게 뭔 소리냐며 반발했죠. 시민단체에서 제게 와서 세계 종교계가 자연보존에 대해서 어떻게 보는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예요. 강정 문제를 갖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대서 내가 갔어요. 한국 사람은 거의 없고 외국 사람뿐이더군요. 내국인들은 통제를 했나 봐요. 외국인 중에서도 4대강 문제나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입국 거부를 당했다더군요. 저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생명이나 문화나 자연을 가장 치명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전쟁이다. 전쟁보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없다. 그런데 세계자연보존총회에서 전쟁의 조건을 확대하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떤 이유로든지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종교의 길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이를 어떻게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질문도 던졌어요. ‘역사적으로 무수한 전쟁이 종교 때문에 벌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역사적으로 종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 종교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유로든 자기 집단의 이기적 관점에서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건 이익집단이지 종교집단이 아니다. 이 문제를 성찰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 오늘은 점잖으신 분들이 이야기를 주제하니까 다음 이야기는 알아서 하세요.
김민웅 저들은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겠죠. 오늘날 한국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종교들이 말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오히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오늘의 종교들이 말해야 될 것을 말하지 않거나, 말하면 안 될 것을 말하고 있다면 자기 책무를 다하고 있지 않은 거죠.
‘표층 종교’인가 ‘심층 종교’인가?
오강남 종교를 하나의 유일체로 보지 않고 두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표층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심층 종교입니다. 표층 종교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하고, 심층 종교는 욕망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진정한 나와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절대 다수의 사람이 표층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로 심화되면 그런 문제들이 없어지고 종교가 본연의 일을 수행하게 되겠죠. 그게 아니기 때문에 만날 싸우는 거예요. 전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전부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 때문에 생깁니다. 저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이라고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표층 이슬람과 표층 기독교의 충돌이거든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은 더욱 아닙니다. 종교가 심층으로 심화되지 못하고 발달장애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죠.
김민웅 오 교수님께서 종교의 두 가지 양상을 구분했습니다만 도법 스님의 이야기를 갖다 붙이면 ‘표층 종교가 정말 종교야?’라는 질문이 됩니다. 표층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불러줘야 진상이 폭로되는 것은 아닌가요.
오강남 성숙한 종교와 미성숙한 종교로 표현할 수는 있겠죠. 미성숙한 종교도 종교니까. 그런데 미성숙한 종교가 성숙한 종교로 가면 세계평화나 인류의 행복을 높여 주는데, 미성숙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까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김인국 종교적 발달장애가 치유 가능한 장애입니까?(웃음)
오강남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믿음은, 어렵긴 하지만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 발달장애도 치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거죠.
도법 학문적으로 잘 몰라서 종교라는 말을 제 방식대로 풀어보면, 기독교는 어쨌든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잖아요. 불교는 법과 다르마(Dharma)가 시작과 끝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표층이냐 심층이냐’, ‘성숙이냐 미성숙이냐’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될 내용이 아닙니까.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가르치거나 그런 길로 가자고 하는 것이 종교의 본래 모습이라면, 그것과 맞지 않는 건 종교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오강남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거죠. 이기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그럽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편이고, 내 원수를 갚아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미성숙한 거죠. 부처님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 믿으면 출세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어서 제 원수를 갚겠다고 하더군요. 이런 경우도 표층이고 미성숙이죠. 그러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단계적으로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에만 달라붙어 있다면 문제가 되겠죠.
김민웅 그건 단계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본질을 역전시킨 것이 아닌가요? 역사적이고 제도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기독교와 예수 운동은 다른 거죠. 종교의 가르침이나 실천이 현실과 긴장감을 일으키면서 현실을 해체하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동력을 가져야 되는데, 어떻게 요즘 종교는 거꾸로 현실의 욕망과 권력을 가지고 종교를 동원하는 방식이에요. 이런 얘기가 좀 진전되면 좋겠습니다. 개신교에 국한한 이야기를 하자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현실을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요구, 현실의 욕망을 위해서 성경 텍스트를 끌어다가 쓰는 방식으로 늘 관계를 만드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대형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대형교회 목회자로 제한 해 보면, 설교에서 동원하는 성경 텍스트의 본질을 해석해 들어가면 그걸로 스스로 비판받을 일이 너무나 많은데 적당히 꿰맞춰 탐욕을 조장하거나 옹호하는 설교를 해요. 성경 텍스트를 그런 방식으로 동원하는 시스템을 깨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일이 아닐까 싶어요.
오강남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도법 말씀을 많이 하셔야 하는 자리 같습니다.(웃음)
‘종교는 죽었다?’
오강남 텍스트를 어떻게 읽느냐는 것도 표층적으로 읽느냐 심층적으로 읽느냐가 문제가 되겠죠. 표층적으로 읽는 것은 나를 위해서 읽는 거예요. 내게 좋도록, 내 권력이나 금력을 위해서.
김민웅 자기를 위한 것이 좋긴 한데 자기의 무엇을 위한 것이냐가 규정되어야 하겠죠.
오강남 자기의 목숨을 위해서 종교가 돌아가는 거예요. 이쪽은 스님이 말씀하신 도라든가 법이라든가 원리 등이 중심입니다.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표층적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심층 종교는 타자 중심적으로, 실재적으로 또는 절대자적으로 봅니다. 김민웅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에서는 90퍼센트 이상이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읽고, 자기를 위해서 다른 텍스트들을 봅니다.
도법 그렇게도 해요?(일동 웃음)
오강남 그래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 발달에 따라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기가 되었거나 혹은 지났다고 보는 거죠.
김민웅 시기의 문제도 있겠지만 긴 역사로 보자면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심층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한 거잖아요. 이미 그때부터 심층적 본질이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은폐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과의 긴장된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데, 본질로 성경을 해석하자는 운동은 늘 소수파의 운동이었고, 대다수 종교들은 사실 “현세에서 많은 것을 챙겨 줄게”라는 약속으로 넘어가버리죠. 이 기만 행위를 어떻게 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도법 ‘예수는 없다’고 했듯 ‘종교는 없다’는 겁니까.(일동 웃음) 아니면 ‘신은 죽었다’고 했듯 ‘종교가 죽었다’는 겁니까.
오강남 객관적으로 보면 심층 종교가 옛날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이었는데 그 중에 진짜 예수님의 기본 정신을 알아 챈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예수님은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며 싸웠거든요. 이건 완전히 표층 종교죠. 예수님의 가르침이 퍼져가던 당시 대부분은 문맹이었어요. 문맹이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듣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는 속도도 늦었어요. 도마복음에 의하면 1천 명에 한 명, 1만 명에 두 명 정도가 심층에 들어갈 수 있어요. 요즘에는 문맹이 거의 없어져서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 전보다 훨씬 확대된 거죠.
김인국 표층에서 심층에로 진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도마복음이 이미 내다보았군요.
오강남 요즘은 스님이 쓰는 글이 인터넷에 다 나오고, 하버드에서 어떤 교수가 한 이야기도 다 나옵니다.
김민웅 도마복음에서 1만 명에 두 명이라면 그 다음에는 십만 명에 20명이냐? 이건 아니죠. 1만 명에 두 명이지만 십만 명에는 세 명일 수도 있거든요.
오강남 저는 그보다 낙관적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났는데 지금은 지도자들이 물꼬를 잘 틀어주고, 스님 같은 분이 일깨워주면 심층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뭄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볶듯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죠.
김민웅 한 마디 짚고 넘어갔으면 싶은데요,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문제가 되는 쪽의 세력도 역시 활용할 수 있는 무기와 장치와 조건이 좋아졌기 엄청 막강해졌어요. 우리의 이 일종의 선한 싸움이 오강남 선생님 말씀하시는 대로 그런 식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요? 보다 치열한 대결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한마디 추가합니다.
김인국 학교는 본성상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기관이라서 한 인간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아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국가가 학교를 열고 의무교육을 시행하면서 국가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대들라고 가르치지 않잖아요. 성직자 양성 과정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은 심어주지 않죠.
김민웅 선생이 누구냐에 따라서.(웃음)
김인국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머리만 좋지 문제의식이 통 없는 사람들이 대개 강단을 지배합니다. 그렇게 급진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성경 자체도 일찌감치 지배자들의 연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저항의식을 불온하게 여기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서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사목자도 드물 수밖에 없고요. 그리고 불이익을 당하기 일쑤고요. 이런 시스템에선 심층 종교로 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오강남 밑에서부터 일어나야죠.
김인국 이런 것은 책에 실을 수 없는 얘기인데!
도법 그런 게 어디가 있어!(일동 웃음)
김인국 천주교 신부들 8할은 <한겨레>나 <경향>을 볼 겁니다. ‘조·중·동’ 보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은 다 ‘조·중·동’ 봐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도법 난 힘없어도 ‘조·중·동’ 보는데!(일동 웃음)
김기석 김 신부님이 발톱을 숨기시고 주교가 되십시오.
오강남 트로이 목마가 되셔야 되겠네요. 처음부터 나는 트로이 목마다 그러면…
김인국 신학교 다닐 때 공부가 그렇게 재미가 없었어요. 왜 그랬는지 나중에 알겠더라고요. 어느 시대나 어느 종교나 교리는 가르치지만 진리는 안 가르쳐요. 그래서 다른 공부만 주로 했죠.
도법 신부님들이 <한겨레>나 <경향신문>만 본다고 했죠? 우리는 그 동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김인국 가톨릭의 경우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태아를 어엿한 인간으로 봅니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라고 말하거든요. 이만한 인권의식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사형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혁신적이죠. 사형제를 반대하잖아요. 그런데 인권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존중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 조만간 죽기로 예정된 자에 국한시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해요.
종교의 파시즘
김민웅 김기석 목사님은 현장 목회를 하시잖아요. 저도 현장 목회를 한 20년 했는데요. 현실과 대치하며 현실을 세뇌하는 모든 장치들을 끊임없이 해체해 나가야 하는데, 교인들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해서 평안하고 싶어 합니다. 좀 달콤한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지도자 문제도 있지만 교인들에게도 그런 욕망이 있죠. 그래서 종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김기석 제가 종종 이런 지적을 받습니다. “세상이 너무 살기 힘든 데 교회 와서도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일전에 어떤 모임에 가서 요즘 힐링이 대세인데 나는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김민웅 여기서도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힐링 이야기를 했어요.
김기석 그렇군요. 누구나 다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전부 내 삶 안으로 통합해서 살았지요. 요즘은 누구나 힐링을 얘기하다보니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힐링 장면을 보고 있게 되니까 끝나면 더 외로워합니다. “내 얘긴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뭐 이렇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이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낳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얘기를 하는 자리에 SBS 사장이 있었어요. 저는 <힐링 캠프>를 SBS가 만드는지도 몰랐거든요.
김민웅 그 분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웃음)
김기석 그 분이 힐링 말고 다른 좋은 말이 없겠냐고 묻더군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고, 전통적으로 종교에서는 공감이란 말을 쓰는데 나는 그게 좋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했어요. 자본주의가 학습시킨 이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잊어 버렸죠. 그러다보니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합니다. 좀 전에 대학교수 한 분을 만나고 왔는데 자기 클래스에 들어오는 학생들 가운데 자신을 배타주의자로 밝힌 친구가 40명이라고 하더군요.
김민웅 배타주의자가 어떤 의미로 쓴 말이죠?
김기석 예수 이외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죠.
오강남 어느 신학교인가요?
김기석 신학교가 아닙니다. 일반 대학의 기독교학과입니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포용주의적 입장을, 다른 한 명은 다원주의적 입장이었다고 해요. 4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왜 이럴까 생각해 보니까 다른 삶을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 같더군요. 요즘 대학생의 15퍼센트가 우울증이라네요. 휴학하고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삶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유하는 주체가 되어서 자기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들에겐 심층적 종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날 확 붙잡아주었으면 좋겠는 거예요. 얘들에겐 모호하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인생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 그러니 이런 모호함을 받아들여야해’라고 하면 못 견뎌요. 걔들에겐 “넌 사유 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할게. 너는 순종이나 해!”라고 이야기해 주는 지도자가 매력 있는 거예요.
김민웅 파시즘의 토대죠.
김기석 파시즘이죠. 요즘 한국 기독교는 철저히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 당시에도 희망이 없었죠. 비유하자면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은 백향목의 나라였습니다. 모든 나무 가운데 가장 우뚝한 나무들만이 훌륭한 나무로 인정받았죠. 예수는 전혀 새로운 상상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자 풀이 밭에 떨어지면 땅을 황폐하게 하기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었는데 예수는 그런 겨자 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얘기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죠.
김민웅 그것도 자기 밭에.
예수가 보여준 상상력
김기석 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끈덕지게 살아야 했던 민중들에게는 ‘이 고통 속에서 살아남자. 그리고 이 속에 새들이 날아오게도 하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새로운 나라를 상상하게 만들었어요. 그 꿈에 공감되었던 사람들이 아주 소수였지만 말입니다. 김민웅 목사님이 제게 던져 준 질문이 딜레마입니다. 교회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게 별로 없어요. 교회 안에는 표층적 종교에 침윤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아를 넘어서는 삶의 상상이 잘 안 됩니다. 표층 종교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겨자 풀 천국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저희한테는 상상력을 회복시켜주는 일들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상상력이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잖아요. 이 능력이 다 깨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시대의 종교에 가장 필요한 것이 상상력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삶은 이렇게 구성되는 거야”라고 할 때 “나는 이렇게 살래”라고 말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것이 희망의 징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웅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아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얘기는 대안적 삶이 손에 잡힌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종교가 불리한 지점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사람들은 교육, 언론, 방송에서 자기도 모르게 다양한 방식으로 자아상을 그리는 연습과 훈련을 매일 강요당하고 있어요. 종교가 그만큼 감당해야 할 폭이 더 넓어진 거죠. 그런데 종교마저도 거기로 빨려 들어가니까 더 어려워진 거죠. 요즘 젊은 세대들이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좀 어처구니없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과거에 비하면 결코 혹독한 세월이 아니거든요. 아이들을 너무 유아적으로 취급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도 옛날에 고생해 봤는데 너는 지금 이것 가지고 그러느냐”는 파시스트들 흉내를 내자는 게 아닙니다.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 목사님께 말씀하신 상상력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직면한 현실을 바른 가치를 가지고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력을 건강하게 길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면서 사회 전체가 마마보이와 마마 걸 모드로 돌아가는 이것도 큰 문제라는 겁니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대안적 가치를 선택할 용기가 안 나는 거죠. 이미 주어진 것 안에서도 낙오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애들에게 그것은 낙오라는 차원이 아니라 네가 세운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그 가치가 자기 삶이 될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필요해요. 쉽진 않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으니 “용기를 같이 내보자. 동지들도 있어.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고 얘기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젊은 세대를 자기의 새로운 꿈과 비전에 따라 돌파하는 주체세력으로 길러내지 못하는 것도 큰 책임이란 생각이 들어요.
오강남 엄마가 문제인 것 같아요.
김민웅 아버지는 문제가 없구요?(웃음)
오강남 아버지는 존재 자체가 이미 없잖아요. 엄마가 학교 선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학생 자녀의 등록과 수강 신청에 페이퍼까지 써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애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가 고민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애들이 마마보이가 되다 보니까 조금만 뭔 일이 있어도 흔들리고, 자기 생각보다는 절대적인 힘에 끌려가는 것이 훨씬 쉬운 거예요.
김인국 목사님들께 여쭙습니다. 그리고 스님도 들으시고 한 번 대답해 보시지요. 김기석 목사님은 예수가 보여준 상상력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살려내느냐에 따라 교회의 장래가 달라진다고 하셨는데요. 예수의 상상력을 키우고 나누는 목회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잘 되던가요?
김기석 된다고 얘기하면 교만이구요. 공동체 전체가 그렇게 하는 건 힘든 일이죠. 저희 교회에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던 친구들이 그만두고 평화운동단체나 시민운동단체로 옮겨서 헌금도 안 합니다. 교회에서 오히려 보태줘야 합니다.(웃음) 이런 친구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우선 고마운 일이죠.
도법 성공했네요.
김기석 좋은 직장 다니던 아이들이 1년 동안 전쟁 난 나라에 가서 봉사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변산반도에 있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친구들도 많아요.
김민웅 아이들을 조용히 망치고 계시는군요.(웃음)
오강남 21세기의 종교는 심층적이지 않으면 의의가 없어요. 젊은이들이 독선적이고 파시즘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심층 종교가 주는 시원함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제가 원숭이 잡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요. 구멍에 손을 집어넣은 원숭이가 손을 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질 못합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를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꼼짝을 못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손을 펴라는 말을 못하는 거예요. 펴기만 하면 시원함이 있는데 말이죠.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까지 별의 별 것 다 해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당신 속에서 쉼을 얻기까지는 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가 그 시원함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건 제도적으로는 안 됩니다. 조그만 운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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