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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하나님의 칼을 맞으려는가

by 한종호 2016. 5. 19.

하나님의 칼을 맞으려는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하는 말은 그가 매우 선량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사람은 법이 없다면 어디 보호받을 데가 없어 곤경에 처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뭔가 석연치 않다. 왜인가? 그건, 법이 선량한 사람들, 약자들을 보호한다는 전제가 서 있을 때 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법이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놓고 그 권리를 박탈해버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본다. 법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법도(法道)가 아니 법도(法刀)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법의 탄생은 언제나 권력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법은 그 권력자의 이익을 지켜내고 그에 저항하는 이들을 족쇄에 걸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들먹인다. 그가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라고 했으니 그만한 철학자가 인정한 국가의 법은 그 내용이 악하더라도 공공의 질서를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왜곡되었다. 악법도 법이라는 것은, 법이 다 모두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법에는 악법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법이라고 다 존중하고 선하며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악한 법에 의해 그 고명한 철학자가 타살당하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철학자를 죽이는 법, 문제를 제기한 지식인을 죽이는 법, 그건 악법이라는 것이며 그걸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들으니 목숨을 걸었던 것 아닌가?


악법을 정당화시킬 때 소크라테스의 권위는 이용하면서, 그가 치른 희생의 의미는 슬며시 지나친다. 이래가지고서는 법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악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며 인류의 스승에게 칼을 겨눈 법은 더더욱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악법은 왜 악법인가? 그것은 그 법이 그 사회의 기득권자, 권력자, 강한 자의 이익만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법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무너진다. 법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벌 회장들에 대한 사면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법은 차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실과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법은 돈과 권력의 기초 위에 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만 봐도 이는 입증된다.


근대사회는 과거 봉건시대처럼 권력자의 자의대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법치(法治)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권리가 법으로 보호되고 자의적 정치행위가 이로써 제동이 걸린다고들 믿는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법치는 인치를 위한 법체계일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이 인류의 역사다. 약자의 권리를 지켜내는 법이 애초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기득권 질서를 강화하는 법으로 인한 억압과 희생에 반발하고 저항해서 일어난 운동과 사건들이 그 법의 성격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이 근대의 역사를 열어간 과정이었다. 하지만 근대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이루어내는 법을 성숙시켜온 것은 아니다. 권력자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법에 의한 약자의 보호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더 크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법을 만드는 권한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민주주의적인 법이라고 나온 미국의 헌법도 그 제정자들이 노예소유주들이었고,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갖는 것을 최대한 제약시키려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법의 역사와 법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른바 실정법이라는 것은 일단 어떤 것이든 현실의 기존질서로 되어 있는 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만들어 낸다. 양심상 잘못된 것을 알아도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바로 그거다.


이런 와중에도 사법부가 양심적 판결을 내리면 이에 대한 공세가 시작된다. 양심과 현실적 법체계 사이의 싸움도 전개된다. 이른바 법 감정이라는 이상한 용어도 동원된다. 철저하게 법관의 양심, 양식, 법에 의한 판결을 대중들의 법 감정으로 평가하고 난도질 하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 권력자의 마음에 드는 판결은 언제나 옳고 그래서 법을 지켜야 한다, 법질서가 중요하다, 하면서 그렇지 못한 것은 국민 법 감정 운운하면서 꺾으려 드는 것이다.





법(法), [물(水)이 흐르듯(去 ) = 法] 가게 하라


법은 어떤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봉건 시대의 법이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지 못하며, 새로운 기술 환경의 발전이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적 변화는 구시대의 법을 옳다고 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이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새로운 소통 기구가 나오면서 민주주의의 보다 폭 넓은 소통 공간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마저도 한국 정치에서는 선거법 운운으로 검찰의 단속 대상이 된다. 법이 얼마나 현실에 못 따라가는 구닥다리인지 입증 해주는 예이다.


법(法)이라는 한자를 봐도 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물(水)이 흐르듯(去 ) = 法] 가라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양식과 시대의 요구를 담아내라는 뜻이 그 안에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요구하는 현실에 있다. 이걸 거스르면 그건 법이 아니라 거꾸로 그걸 배반하는 역(逆)일 뿐이다. 참으로 요상하게도 사법부의 판결에는 칭찬할 만한 것 말고도 일반 상식을 깨는 논리가 횡행하는 느낌이다. 절차는 문제가 있으나 결정사항은 위법은 아니다, 라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있다.


한 때, 컨닝은 문제가 있으나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든지, 사법고시 대리시험은 문제가 있으나 그렇게 해서 합격한 것은 불합격 취소할 수 없다,는 등 이런 식의 해괴한 논리에 대한 풍자가 잇따르기도 했다. 법조계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먹칠한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정의 문제는 결과에 그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며, 문제가 있으면 원상복구가 원칙이다. 부당한 해임에 의해 직책이 복구되자 이에 대해 직위는 인정하나 권한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이 해당기구에 의해 나온 경우도 있다. 권한 없는 직위라는 것이 있었는가?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법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이러다가는 과정의 가치를 우습게 아는 사회가 될 뿐이다. 법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능멸당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누가 법을 지키려 들겠는가? 법을 지키는 자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다. 법은 가급적 피하고 볼 일이 된다. 그러다가 문제가 되면 권력에 의탁해서 법망을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최근 일판만파로 번지고 있는 ‘정운호 게이트’가 그 단적인 예가 아닌가. 이게 오늘날 한국 사회가 마주하는 법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유능한 자는 누구이겠는가?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최대한 강화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건 강자들이다. 그러니 약자들은 날로 이 법에 의해 희생제물이 된다. 법은 원성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대화로 풀어나갈 일도 죄다 법으로 풀려고 한다. 그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려주니까.


정치도 법, 경제도 법, 사회문제도 법, 하면서 법 만능주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법은 성찰의 능력이 없다. 법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법은 이미 그 법 탄생의 과정적 요구에 의해 그 법 해석의 권한이 약자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기에 법정에 들어서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이미 상당히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 내용은 둘째 치고 정당한 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법의 이름을 내걸고 윽박지르고 그러면서도 ‘법대로’ 집행하겠다는 소리가 쨍쨍한 오늘의 법 현실이 ‘법이 무어냐’고 몰아 세운다. 왕과 양반들의 봉건왕조시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해방 이후 거듭된 군사독재정권의 통치가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민은 법과 멀어지게 되었다. 현 정부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가까이 하면 다치는 법은 여전히 칼이었고 칼자루는 권력이나 돈,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들이 쥐고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법이 표방하는 이상과 현실이 이렇게 다를 때, 우리는 법의 근본 가치인 정의와 평등을 곰곰이 색각하게 된다. 흔히 사회에서는 ‘법대로’ 죽이고 처벌하면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죽으면 언짢아” 하시고(에스겔 18:32),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같이 아무런 힘이 없어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을 들어올려(누가복음 1:52 참조) 실질적인 평등을 이루어주신다.


하나님의 칼을 맞을지 모른다


이제는 참으로 이 나라에 ‘법을 세워야’(아모스 5:15) 할 때이다. ‘덫’이나 ‘함정’처럼(호세아 5:2), 칼처럼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는 법들은 모두 없애야 한다. 아울러 그 아래에서 누려 온 기득권과 특권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한다(이사야 59:3-15). 앞서 언급했듯이 물이 흐르듯 사회 곳곳에 흘러가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고 강한 자들의 힘을 억제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는 ‘생명의 법’(에스겔 33:15)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법의 으뜸을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마가복음 12:29-31) 정의가 서고 평화가 그 뒤를 따를 것이다(시편 85:13).


만약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예레미야 2:8)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림 없이 법을 칼처럼 휘두른다면, 우리는 또다시 ‘질서유지’란 명목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씻기지 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그러다 하나님의 칼을 맞을지 모른다(에스겔 22:14-21).


그렇다면 성서는 이에 덧붙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한다. 거할 곳이 없는 나그네를 돌보라고 한다. 이게 법 정신이다. 하나님의 법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권리를 지켜낼 수 없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이 법의 출발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이걸 알지 못하고 자기들 위주로 법의 정신을 해석한 자들이다. 그래서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멸시했고 죄인으로 몰았다.


나사렛 예수는 이러한 법 현실에 대해 분노했고 저항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만들어 놓고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기회도 봉쇄해 버리고 만 것에 대해, 이건 아니라고 일갈하셨고, 이걸 바로 세우지 못하는 한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가슴 아파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법은 약자들의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고도 멀쩡하다. 그 피눈물을 보고 애통하는 법조인들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법은 그렇게 해서 권력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사회에서 법은 최소한 원칙이다. 서로 상생하면서 잘 살아보려면 상대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고 차별적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게 법의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걸 거꾸로 뒤집어야 법 정신이 된다. 그로 말미암아 현실은 법조문의 위압적 지배 아래 숨죽인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하는 말이 있다. 법이라면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과 그 본래적 권리를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절규다. 그런데 법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이미 법이 아니라 불법이다. 합법적 불법이다.


권력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불법화시킨다. 그 반대는 합법화 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봐야 할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권력과 재물,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사안 사안에 대해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는가에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이미 법이 아니라 법을 가장한 기득권 전략에 불과하다. 이걸 깨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 지켜내고 그 사회가 약자들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노력을 체계화하는 법이 있을 때 우리는 그걸 제대로 된 사회라고 부른다.


예수시대에 왜 그리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강했는가? 그건 법을 내세워 인간을 능멸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법을 자신의 기득권 도구로 보는 자와, 법을 약자들의 권리로 보는 이 시각의 대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서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이들은 그 답이 자명하지 않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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