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 마당(35)
박근혜, 오염된 카리스마
대통령 박근혜는 자신이 대단히 강단 있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민주사회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독선의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시대적인 연좌제라고 생각했는데, 독재자의 딸 독재자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독재 권력은 당장 승세를 쥐고 있는 듯 하지만 그 말로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지금 그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영향력, 권위 있는 지도력, 그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힘, 그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그리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이 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분들이 있었던 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이 많이 변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학식이나 인품, 또는 그 비판정신이나 윤리적 순결함, 자기희생 등이 존경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은 이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이룬 성취,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의 척도가 되어가다 보니 과거에는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분들도 이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취급 받는 사태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세태는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자신의 장래를 어떤 모델에 맞추어 살아가려는가가 이로써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부자 되세요”, “성공 하세요.” 등의 인사는 우리 사회가 무엇을 그토록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지요. 사람들은 어떤 사회적 가치, 역사적 의미,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뭐냐는 쪽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과정은 어떤지 따지지 않고 재력으로 성공한 사람을 높이 떠받들면서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마는 거지요. CEO 출신이 지도자가 되면 모두가 잘 살게 된다, 국가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 식의 논법은 한 사회와 국가가 어떤 윤리적 가치, 역사적 목표를 가지고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기대와 가치는 우리 사회에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의 낭비와 자연의 훼손, 그리고 경박한 물질적 가치관의 팽배 등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또 어떤가요? 민주주의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경제정책의 실현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역사에서 제대로 조명되고 존경받는 인물은 누구인지, 그런 문제는 우리사회의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정부 여당의 온갖 거짓말과 궤변은 진실의 은폐, 실종, 억압의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사회적 논의를 배제한 우격다짐과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오만, 독선은 파시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걸 확신으로 내세워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통치능력으로 착각하고 있기조차 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군까지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교육의 군사화까지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파시즘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하늘이 내린 능력과 은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영향력이나 권위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매우 특별하게 그 사람에게 주어진 타고 난 능력과 권위, 영향력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에서는 주로 대단히 강력하고 폼 나고 그럴싸한 권위나 지도력, 또는 개인적 매력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가령 배우 최민수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과 결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보스 기질의 품성을 느끼게 되는 이미지 때문일 것입니다. <십계>와 <벤 허>의 주인공 찰톤 헤스톤도 그런 카리스마를 가진 연기인으로 기억들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가 여전히 적지 않은 이들에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추앙되고 있는 까닭도 그에게는 보통사람들이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그 어떤 강력한 권위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진정한 카리스마는 누군가를 위에서 압도하고 군림하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품성을 진정한 카리스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카리스마를 떠올려보면 카리스마라는 말이 현실에서 얼마나 잘못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카리스마를 연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만과 위선, 그리고 위장이 있는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늘이 한 개인에게 특별한 능력과 은총으로 내리는 카리스마는 결코 그 사람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힘이 아닙니다. 그걸 통해서 이 세상에서 힘없고 억울하며 그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라고 허락된 능력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카리스마는 위압적이거나 군림하려 들거나 자기 과시에 치우치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늘이 내린 진실한 카리스마는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겸손합니다. 사랑이 풍성하고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낮은 곳에 임합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기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자기희생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성공과 욕망을 향해 줄달음치는 그런 지도력이 아니라, 역사의 뜻을 묻고 욕망이 아니라 진리와 평화, 정의와 생명을 향해 모두를 이끄는 그런 권위와 힘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은 권력, 재력, 학식, 인맥, 출신배경 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한없이 낮아져서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이를 치유하고 생명의 능력으로 채우기 위해 나설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이 카리스마를 오염시키고 오해로 가득 차게 만드는 세상의 논법을 거부하고,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이루어내는 카리스마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감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카리스마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주어지는 사랑과 희생의 능력입니다. 새로운 미래는 그런 지도력을 가진 카리스마에서 태어납니다. 역사의 진실을 뭉개고 그 위에다 조작된 역사를 덧칠하면서 만드는 카리스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입니다. 거짓은 모래 위에 짓는 집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 듯 하게 보여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무너짐이 더욱 심합니다. 그래야 어느 것이 진짜 제대로 된 집인지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는 거지요. 우리는 그걸 역사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진실은 그런 것이니까요. 진정한 카리스마는 진실과 한 몸입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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