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을(乙)의 지형학
-「조선지리소고」 1934. 3 -
김교신의 전공은 ‘지리 박물’이었다. 1927년 4월 함흥의 영생여자고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하여 이후 양정고등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송도고등학교까지 약 15년 간 강단에 섰다. 양정에서의 12년이 가장 긴 시간이었고, 늘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불온하다’는 눈초리를 받다 결국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되면서 교사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그에게서 ‘지리 박물’을 배운 학생들은 회고하기를 그저 딱딱한 지형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각 지역에 얽힌 조상들의 얼을 함께 가르쳤으며, 일제가 한글 수업을 금지했음에도 당당하게 조선말로 조선혼을 심어주셨다고 전한다. ‘무레사네’라는 모임을 통해 우리 강과 산을 학생들과 함께 탐사하며 땅에 스며든 민족정기를 느끼도록 애쓰기도 했다 한다. 지리 전공자로서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며 그가 남긴 짧은 논문인 「조선지리소고」는 그가 가르치고 싶었고 결국에는 세상에 내어놓고 싶었던 ‘조선의 정신’을 노래한 연가(戀歌)다.
우황 산세와 평야의 배열 균형의 미를 논할진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화에나 비할까, 뉴욕 부두에 높이 솟은 자유의 여신상에다가 비할까. 낭림산 머리 위에 하늘을 향한 좌완을 백두산 저편까지 높이 뻗치고 장산곶 끝까지 우완을 드리워 어루만지려는 듯, 우각의 태백산은 거제까지 굽혀 올리고 좌각의 소백산은 진도까지 뻗쳐 디딘 듯. 지구대는 허리에 잘룩하고 금강산은 가슴에 드리운 노리개인 듯, 몸을 가리운 능라(綾羅)가 동풍에 나부끼어 녹색 평야를 이루었으니 엷고도 가볍다. 선녀 바야흐로 구름 위로 솟아오르려는 자태인가 혹은 자유의 여신이 대륙을 머리 위에 이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형상인가.
나는 전공자가 아니니 김교신의 ‘한국 지형학’에 대해 학문적 판단을 할 재량은 없다. 또한 페미니즘적 잣대를 들이대어 ‘여성과 땅의 타자화’ 운운 할 생각도 없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내 마음에 박힌 것은 지배적인 식민사관 아래 한반도의 지형조차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시절에, 같은 지형을 저리 아름답고 찬란하게 응시할 수 있었던 김교신의 소망스러움이다. 왜곡이나 맹목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지형에 담은 소망이었다. 땅의 협소함이나 백성 수의 적음, 평야의 부족함과 산천의 작은 규모에 대해서는 부정보다 ‘달리’ 봄을 택했다.
대동여지전도 (소장: 숭실대학교 박물관, 연대: 1860년대(김정호 제작), 형태: 목판본, 보물 제850호)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해안선에 대한 묘사에서도, 온대지방에 위치하여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음에도, 김교신은 하나님께 감사에 감사를 더 했다. 아니, 실은 이미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시선이었다. 강수량이 빈핍한 까닭에 서양보다도 200여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발명할 수 있었고, 공중에 운량(雲量)이 희박한 까닭에 일찍이 천문학이 발달되었다며, ‘화를 복으로 이용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칭찬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지형론이 흥미롭다. 지정학적 결정론도 아니요 정신의 승리만을 외치는 관념론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우리의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이 땅에 살고 있음으로 해서 겪는 모든 일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복된 땅을 만들자는 주장이니 말이다. 김교신의 지형론은 소위 ‘반도론’이다. 반도로서의 우리 땅은 결코 대륙에 붙어 큰 외세에 의지해 살아야만 하는 비주체적 공간도 아니요, 섬나라 일본의 대륙진출 야망에 길목을 내어주는 도구적 공간도 아니다. 고대의 희랍-이태리 반도가, 근대 초기의 덴마크 반도가 가졌던 ‘소통의 활발함’을 상기시키며, 김교신은 근대 사상사에서 한반도가 갖는 지형론적 소명을 굳게 믿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는다. 겁자에게 안전한 곳이 없고 용자에게 불안한 땅이 없다고. 무릇 생선을 낚으려면 물에 갈 것이요, 무릇 범을 잡으려면 호굴에 가야 한다. 조선 역사에 영일이 없었다 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 없다. … 만약 눈을 돌려 정신적 소산, 영적 생산의 파악에 향한다면 반도에는 특이한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다른 사상이나 발명은 모르나 지고한 사상, 즉 신의 경륜에 관한 사상만은 특히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에게만 계시되는 듯하다. …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주집(湊集)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精素)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제국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이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 단짝이었던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를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스무 개의 시리즈 논문으로 <성서조선>에 실었던 함석헌의 한국사 풀이가 진행된 시점이 1934년 2월부터이니, 동인이요 편집장이었던 김교신이 함석헌이 주장하는 ‘고난의 메시아적 해석’을 함께 나누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함석헌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세계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어온 한국의 역사를 “세계사를 위해 대신 진 가시면류관”으로 표현했었다. 현재의 한반도는 “욕심투성이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이 퍼다부은 쓰레기들이 모여 들어오는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말했다.(『전집』 1: 73) 뜻 모르고 겪는 고난은 재난이지만, 악이 응집된 이 땅에서 이를 그치려는 정신으로 고난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이 고난은 “옥을 닦는 돌”이요 “세계를 구하는 힘”(『전집』 1: 303)이 될 것이라, 함석헌은 그리 믿었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다시없다”는 김교신의 선언이나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 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는 그의 당찬 소망은 함석헌이 믿었던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의 메시아적 선포와 맞닿아 있다.
한 마디로 김교신의 한반도론은 ‘을(乙)의 지형학’이다. 그러나 이유 불문 꿇어야하고 제 뜻은 없애고 강자에게 귀속되는 그런 ‘을’이 아니다. 김교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른 사상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는 질서에 대한 사상이라면, 이를 상상해내고 깨달을 인식론적 특권은 “가난하고 약하고 멸시당하고 유린당하여 생래의 교만의 뿌리까지 뽑힌 자들”만이 누리는 것임을!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삶의 자리가 ‘을’의 자리인가? 그렇다면 기뻐하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대에게 더 가까이 있다. 오늘날의 한국 땅이야 말로, 일찌감치 사라졌어야할 봉건주의적 잔재와, 사람을 갈아 끼우는 기계 부속품쯤으로 여기고 효용가치에 따라 쓰고 버리면서 이를 ‘고용 유연성’이라 이름하는 투자-금융자본주의의 폭력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어서 세속적 욕망을 포장하는 기업-교회들의 구조적 불의가 그야말로 ‘집약’되어 작동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더 이상 물러나 은둔할 공간도 없지 않나. 주저앉아 넋 놓고 당하면 재난이지만, 애통하고 연대하는 주체로 서서 이 비인간적이고 불평등한 현재의 시스템을 극복할 사상을 내어놓을 수만 있다면, 지금 우리들 ‘을’의 위치는 은혜다. 감사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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