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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1)

by 한종호 2016. 6. 8.

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1)

출애굽기 11:1-10

 

제임스 존스와 인민사원

 

제임스 워런 존스(James Warren Jone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31년 미국 대공황 중에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종교적으로 오순절파 기독교에, 사회정치적으로 책을 통해 배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는 1954년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하느님의 성회(the Assembly of God) 교회에서 설교하는 걸로 목회경력을 시작했는데 인종평등과 통합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그의 메시지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급진적이었으므로 그를 받아주는 교단이 없었답니다. 다행히 제자회 교단(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이 그를 목회자로 받아줘서 1960년에 그는 이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당시 제자회에는 회중교회 전통이 강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안 받은 사람도 안수해줬습니다.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와 그의 교회는 다른 민권운동 단체들처럼 엄청난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965년에 다른 인종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캘리포니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살았습니다. 개인재산과 부동산 등을 모두 공동소유로 하고 말입니다.

 

제임스 존스는 처음엔 ‘정통’ 기독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그대로 살려고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도들이 교주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데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알려지고 언론에 노출되면서 시끄러워졌고 결국 1974년에 존스와 일부 교인들은 아프리카 가이아나에 약간의 땅을 구입해서 그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점점 더 미국사회에 적대적이 됐습니다. 성서의 하느님도 ‘하늘 하느님’(sky God)이라고 부르며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폐쇄적인 ‘사교집단’이 되어간 겁니다. 그는 신도들에게 신앙에 대한 충성심과 절개를 ‘자살’로 입증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이들은 존스의 명령에 따라 1978년 11월 18일에 어린이 276명과 성인 638명 모두 914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 자살했습니다. 이들이 세계를 엄청난 충격에 몰아넣었던 인민사원(Peoples Temple)과 짐 존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종교가, 그것도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짐 존스가 누구이고 뭘 어떻게 했기에 9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이때 죽은 276명의 아이들은 어른들, 대개 부모들이 억지로 아이들의 입을 벌려 독약을 들이부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찰스 킴벌(Charles Kimball)은 《종교가 악으로 변할 때》(When Religion Becomes Evil)란 책에서 종교가 악으로 변하게 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 중 제 관심을 끈 것은 ‘절대적 진리 주장’(absolute truth claim)과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입니다. 절대적 진리 주장은 나만 옳다, 나만 진리를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얘기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맹목적 순종은 교주 또는 절대자의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복종하는 걸 가리킵니다. 킴벌은 이럴 때 종교는 악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교주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잘못이란 사실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바른 종교지도자는 신도가 자기를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서게 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보다는 신도가 스스로 서도록 돕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자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태도는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내 신앙을 타락시키고 사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순종은 물론 좋은 가치일 수 있지만 거기에 ‘무조건’이란 말이 붙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신앙이 뭡니까? 종교가 뭡니까?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절대자와 소통하는 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겁니다. 대화의 목적은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 또는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아하, 하느님은 이렇게 생각하시는구나. 하느님은 내게 이런 걸 바라시는구나!’라고 깨닫는 것이고, 하느님은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바라는지를 알아가면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겁니다.

 

신앙은 그 어떤 올바른 진술에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자라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를 주관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스스로 제사를 주관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으며 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그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순종이 무조건 좋다는 뜻은 아니란 뜻입니다. 더욱이 ‘맹목적’인 순종은 더욱 나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맹목적’이라면 거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소통이라고 했는데 다른 모든 소통도 마찬가지지만 하느님과 신앙의 소통을 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맹목적인 부정이나 무조건적 거부가 바람직하지 않듯이 맹목적 인정이나 무조건적 순종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요. 맹목적인 부정과 맹목적인 긍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인 거죠. 신앙에서 무조건적 순종은 맹목적인 부정만큼 위험합니다. 그것은 유혹하는 ‘악마의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설령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야훼 하느님과 짐 존스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겁니다. 저도 그 점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짐 존스가 자기 신도들에게 명령했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하실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명령을 지금 여러분이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물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고 모두 하느님의 음성일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무조건 그렇다고 전제하고 얘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느님의 명령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실행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해도 사람 죽이는 짓은 절대 안 하겠습니까? 저는 할지 안 할지 결정하기 전에 일단 하느님에게 따져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맞느냐고, 왜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다음 하느님의 명령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저는 그래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불이익을 당한다면 어떨까요? 가나안에 정착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게 자기들에게 유리했지요.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만일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제가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 명령을 따를까요? 아니면 아무리 하느님의 명령이라 해도 남을 죽일 수는 없으니 불복종의 벌을 달게 받을까요? 저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상 닥쳐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성서에는 이사야처럼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라고 하느님께서 사람을 찾으셨을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순종한 사람도 있지만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소돔 성을 살피러 가시는 하느님께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이집트로 내려가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명령하신 하느님께 모세가 그랬듯이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주님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저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 중에는 아간처럼 징벌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권력을 이용해서 범해서 결국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겁니다. 이 계명은 왕이라고 해서 어겨도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를 감추려고 밧세바의 남편인 충직한 장군 우리야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의 죽음의 책임은 그가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법이 정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와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죽었습니다. 이것도 이해 못할 일이지만 그건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땔감 하러 나갔다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죽임당한 사람(출애굽기 31:15; 민수기 15:32-35 참조)과 비교하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다윗은 자기의 정욕을 채우려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해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가나안에 정착하려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야훼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벌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서에서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일을 상상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게 대량학살의 문제이므로 적어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 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지켰을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대량학살이 벌어졌을까요? 신명기 7장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당신들을 이끌어 들이시고 당신들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당신들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셔서 당신들이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당신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합니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마십시오.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당신들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마십시오.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당신들의 아들이 주님을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사르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1-6절).

 

이 구절에는 ‘쫓아내다’와 ‘전멸시키다’라는 동사가 혼용되고 있습니다. 쫓아낸다면 전멸시킬 수 없고(전멸시킬 필요 없고) 반대로 전멸시킨다면 쫓아내는 게 말이 안 되지만 그 점은 여기서 따지지 않겠습니다. 좌우간 야훼 하느님은 가나안의 일곱 종족을 멸절하라고(또는 직접 멸절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3장은 이 명령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완수됐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를 잘 읽어보면 이 명령이 ‘완전하게’ 수행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라합을 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줘서 여리고가 무너질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어린아이까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처음부터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겁니다. 이에 반해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헤렘의 법을 어긴 아간은 죽임을 당했고 노략물도 모두 야훼께 바쳐졌습니다(7장). 눈에 띠는 것은 가나안 종족의 일원인 기브온 사람들이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고 살아남은 사건입니다(9장). 이들은 가나안 종족의 분파였기 때문에 헤렘의 법에 따르면 모두 멸절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것도 속임수를 써서 말입니다.

 

신명기 7장에 따르면 가나안 종족들이 모두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들이 살아남으면 그들의 꼬임에 빠져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종족이 소수라도 살아남으면 이스라엘은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래서 몰살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비록 소수지만 이들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섞여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그날부터 “회중을 섬기고 제단을 돌보는 종으로 삼아서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일을 맡게 되었다.”(9:27)고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랬다고 했으니 적어도 여호수아서가 기록됐을 때까지는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가나안 종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가나안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같이 살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27-35절). 이 대목은 살아남은 가나안 종족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명기 7장은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종족을 멸절하지 않고 그들의 신을 따른다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벌어진 일은 어땠습니까? 위에서 봤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족을 완전히 몰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곧바로’ 멸절당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망했지만 그것은 6백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받은 대량학살의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릴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처벌도 신명기 7장에 선언한 대로 이뤄지지도 않았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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