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1)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取)하여 시위대(侍衛隊) 뜰에 있는 왕(王)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中)에 빠졌더라 왕궁(王宮) 환관(宦官) 구스인(人)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王)이 베냐민 문(門)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王宮)에서 나와 왕(王)께 고(告)하여 가로되 내 주(主) 왕(王)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에게 행(行)한 모든 일은 악(惡)하니이다 성중(城中)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왕(王)이 구스인(人) 에벳멜렉에게 명(命)하여 가로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三十名)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의 죽기 전(前)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王宮) 곳간(庫間) 밑 방(房)에 들어가서 거기서 헝겊과 낡은 옷을 취(取)하고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우며 구스인(人)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侍衛隊) 뜰에 머무니라”(예레미야 38:6-13).
성경을 눈물로 읽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다말고 나도 모르게 왈칵 뜨거운 눈물이 솟을 때가 있다. 말씀이 나를 만나는 순간이고, 내가 말씀을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목회의 여정을 되돌아볼 때,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독일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이런 게 선배들이 말한 피눈물인가 싶은 눈물을 참 많이도 흘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뜨거운 눈물을 닦을 때가 적지 않았다. 길은 쉽게 보이지 않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과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불 속을 지나는 것도 같고 맨발로 가시덤불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도 같은 시간, 눈물로 다가왔던 말씀 중의 하나가 예레미야였다. 그 중에서도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더욱 그랬다. 어쩌면 당시의 내 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협하면 얼마든지 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원하는 소리를 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전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말씀의 사람,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예레미야는 웅덩이에 빠지고 만다. 물웅덩이에 갇힌 것인데, 이제 예레미야의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왕이 허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물웅덩이에서 벗어난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 예레미야는 어떻게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비슷한 상황 속에서 괴로운 심정으로 말씀을 읽던 터라 더욱 마음을 담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왈칵 눈물이 솟았다.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물웅덩이에 물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웅덩이는 5월과 10월 사이의 갈수기를 대비해서 물을 저장해 두는 곳이었다.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는 아마도 6월이나 7월경이 아닐까 싶다. 예루살렘은 BC 587년 8월에 함락되는데,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힌 때는 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갈수기의 기간을 생각한다면 웅덩이에는 물이 절반쯤은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물이 없고 진흙뿐이었으므로 진흙에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진창 속에 빠지긴 했지만 물이 없어 진창에 빠졌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연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질 않았다. 물이 없는 진창, 필시 그것은 웅덩이에 빠지는 예레미야를 받는 하나님의 손이었다. 우연이란 하나님이 겸손히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입고 있는 옷과 같다고 하지 않나. 진창에 빠진 상황을 힘들어하던 내게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은 또 있다. 왕을 찾아가 예레미야에게 행한 일이 악한 일이라 항변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궁 내시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었다. 구스라면 에티오피아,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은 왕이 허락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나선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구스 사람이 나선다.
하나님은 지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움직여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를 건져내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그들이 침묵한다고 낙심할 일이 아니구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작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에벳멜렉은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의 한 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헝겊과 낡은 옷’이었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새번역), ‘해진 옷과 누더기’(성경)들을 챙긴다.
그것들을 밧줄에 달아 예레미야에게 내려 보내며 에벳멜렉이 소리친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 대고, 밧줄에 매달리십시오.” <새번역>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밧줄만 잡고 올라오다가는 놓칠 것이 자명했다. 낡은 옷을 허리에 두르게 하고, 그곳을 밧줄로 묶는다면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 그것이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이라 하기엔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허약하다. 도저히 그분의 손길이라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다시 확인하는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가 어려웠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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