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10)
인습을 벗어난 또 하나의 가족 룻과 나오미
구약에는 히브리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를 잘 봉양한 효성 깊은 이방 땅의 며느리 이야기로 알려졌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책 제목을 붙인 룻기가 그렇다. “신약성서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다면(누가복음 10:29-37), 구약성서에는 이것과 평행을 이루는 선한 모압인 이야기가 있다”라는 한 줄 평은 룻기의 성격을 단번에 낚아채준다. 둘 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 넘는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도전적이다. 더욱이 룻기는 남성 주인공들이 주류를 이루는 관례들을 침투해 들어간다. 오묘하게도 가부장적인 위계질서와 폭력성 짙은 참혹한 이야기가 끝나는(사사기 19-21장) 지점에서 시작된다. 밤이 깊어야 새벽이 찾아오듯 철저하게 절망해야 희망은 움터오는 것일까. 그렇게 룻기는 썩은 두엄더미에서 피어난 작은 꽃송이처럼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때는 사사들이 치리했던 시대였다. 어느 시점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흉년이 들어 유다 베들레헴에 사는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사해 동편 모압 땅(현재 요르단)으로 갔다(사사기 1:1). 베들레헴은 집(“베트”)과 빵(“레헴”)의 합성어 ‘빵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빵집에 빵이 없어 떠나야하는 상황이다. 더 먼 옛날 기근 때문에 선조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처럼(창세기 12:10),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처럼(41-47장) 베들레헴 출신의 한 남자가 생계 위협 때문에 이주해야 했다. 아버지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그의 아내는 나오미다. 아들들의 이름은 말론과 길룐 이었다(2절). 아버지는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이요, 어머니는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뜻이지만, 부부는 슬픔을 안고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아들들만 남게 되었다(3절). 이때 아들들이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자들과 결혼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자녀를 얻지도 못하고 죽는다(4-5절). 남편과 아들을 잃은 나오미의 삶은 자신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인생과 마주해야 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과 아들 없는 삶은 비극이며 수치나 다름없었다. 고대사회에서 후손이 없다는 것만큼 가혹한 형벌은 없다. 한 집안이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궁핍한 타국인 체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위태롭다.
때마침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 땅의 기근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6-7절). 그러나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어머니의 집”, 그러니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 나오미는 젊은 두 며느리에게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8절, 개역개정)라며 복을 빌어준다. “선대”(히브리말,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표현한 말이다(출애굽기 34:5-6). ‘은혜’, ‘한결같은 사랑’, ‘자애’, ‘인애’등으로 번역되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 ‘헤세드’를 두 며느리가 베풀었던가보다. 그래서 일까. 나오미는 이방인 며느리들이 보여준 ‘헤세드’를 여호와의 행동을 재촉하는 모범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오미는 친정을 왜 “어머니 집”이라고 했을까. 구약은 보통 친정을 “아버지 집”으로 표현하는데(창세기 38:11; 레위기 22:13) 나오미는 그러지 않았다. 구약에서 “어머니의 집”은 혼인과 관련된 맥락에서 발견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고 고향으로 종을 보냈을 때, 리브가는 우물가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건네준 선물을 받아들고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창세기 24:28). 그러니까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재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때문에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 “남편의 집”에서 위로 받기 원한다며 며느리들에게 입 맞추고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 높여 울기만 했다(9절).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우리도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로 가겠습니다”(10절)라고 말한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거듭 당부하며 끝까지 만류한다(11-12절). 나오미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와 운명에 놓인 젊은 며느리들이 안쓰러웠을 테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3절)라고 말하면서 마음이 몹시 쓰리고 아픈 것을 감추지 않는다. 격한 슬픔을 토로하는 시어머니를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은 다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꼭 붙들었다(14절). 룻은 시어머니의 계속되는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적인 시의 언어로 선언하듯이 말한다.
당신을 남겨 두고 돌아가라 재촉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당신이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습니다.
당신의 겨레가 나의 겨레가 되고
당신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며
당신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행하시고 또 행하실 것입니다
죽음만이 나와 당신 사이를 갈라놓을 것입니다(16-17절, 필자의 번역).
이 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젊은 여인이 늙은 여인에게, 모압 사람이 베들레헴 사람에게 한 말이었다, 그뿐인가. 모압의 신 그모스를 믿던 여성이 주 하나님에게 신의를 바치는 선언이었다. 맥락 없이 이 말을 듣는다면, 나이 어린 며느리가 나이 많은 시어머니에게 하는 말이라고 누가 생각할까. 룻의 말은 젊은 여인이 또 다른 남자에게 삶을 의탁하며 종속되는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를 해체시킨다. 급진적이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와의 만남과 결혼을 통해 후손을 얻는 가능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와 고향의 벗들을 떠나야하지만 흔들림이 없다.
룻의 선택 이면에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앞선 모범이 있었으리라. 나오미는 앞서 이방인 며느리들이 행한 ‘견고한 사랑’(헤세드)을 고맙게 여겼고, 하나님이 며느리들에게 ‘헤세드’ 베푸시기를 기원했었다(1:8). 나오미의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적인 삶과 사랑이 없었다면, 룻이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랐을까. 그렇더라도 룻은 나오미의 사랑을 능가한다. 둘 다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는 기구한 운명이었지만, 또 다른 젊은 남자가 아니라 늙은 여자를 선택한 룻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1:13)라고 했던 나오미의 비탄에 대해 하나님은 룻의 ‘헤세드’를 통해 응답하신 셈이다. 그렇게 룻은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를 실현하는 중재자였다.
예상치 못한 룻의 결단과 행동에 대해 누군가는 아브라함과 견줄만한 믿음이라고 칭송한 반면 어떤 이에게 룻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룻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도 없이, 복에 대한 약속도 없이 자신의 충절을 바칠 ‘성’(性)마저 바꾼 헌신의 사람이었다(필리스 트리블), 라는 격찬이 아깝지 않다. 하여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믿음과 사랑으로 인습을 넘어선 또 하나의 가족이야기다. 이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한편의 복음으로, 거룩한 책으로 우리에게 왔다. 때문에 두 여성의 이야기는 결국 다윗의 가계로(4:18-22),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서(마태복음 1:1-6) 민족적인 배타성을 뛰어넘는 구속 역사의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여자 어디 있나요? (1) | 2016.10.14 |
---|---|
다윗의 여자 조상 룻과 나오미, 가부장적인 질서의 해독제였다 (0) | 2016.10.04 |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폭력의 시대(2) (0) | 2016.09.06 |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폭력의 시대(1) (0) | 2016.08.30 |
일그러진 영웅 삼손의 여자들 (0) | 2016.08.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