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의 혐오(嫌惡) 본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경에 혐오 본문이 있는가?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조장(助長)하는 본문이 있는가? 있다. “진멸(殄滅, 헤렘)” 본문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을 칠 때를 모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이 그를 우리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우리는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온 군대를 쳐부술 수가 있었다. 그 때에 우리는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다(신명기 2:33-34).
이스라엘이 바산 왕 옥을 칠 때를 두고도 모세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우리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전멸시키고, 모든 성읍에서 남자 여자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전멸시켰다(신명기 3:6).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칠 때 일을 전하는 여호수아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여호수아 6:21).
이스라엘이 가나안 북방을 칠 때도 여호수아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성들에서 탈취한 노략물과 가축은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차지하였고, 사람들만 칼로 쳐서 모두 죽이고, 숨쉬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여호수아 11:14).
이런 기록을 다 열거하자면 너무 길다. 구약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신명기,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상,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 에스더기 등에서 이스라엘이 자행(恣行)한 진멸(殄滅 annihilation/ extermination)의 역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 나는 캠퍼스 안에서 아랍 친구들에게 아랍민족이 왜 이스라엘을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하느냐고, 어리석게 물었을 때, 한 아랍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먼저 이스라엘을 증오한 것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오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어린애까지 다 학살한 역사 기록은 우리 아랍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다 학살했다. 그것이 그들의 경전 히브리어 성경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네가 배우러 왔다는 그 구약에서 너도 얼마든지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 신도에 따라서는, 생명을 진멸하라고 하는 그 본문마저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이성적 판단은 보류한 채,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는 그런 본문들을 그대로 긍정하고, 실천하는, 혹은 실천을 계획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마저 구약의 진멸(殄滅, 헤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단학살과 인종청소 같은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탈출 이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자행한 집단학살은 유대교의 원죄다. 11-13세기 십자군의 이슬람 학살은 기독교의 원죄다. 21세기 IS의 만행에서 이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세 종교에서 유래한 혐오와 폭력은 세 종교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바울은 로마서(1:29-30)에서 인간이 지닌 스무 가지 악을 나열한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증오, 능욕, 교만, 자만, 제악도모(諸惡圖謀),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 떠난 상태에 그대로 버려두실 때 이런 악덕이 노출된다고 바울은 본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그의 저서 <악의 꽃> 서문 “나의 독자에게”에서 너나없이 인간이란 우둔, 과오, 죄악, 탐욕, 강간, 독약, 비수, 방화 등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마치고 아직 눈물도 마르기 전에 다시 진창길로 뛰어든다고, 인간의 두개골 속에는 수백만 마리의 악마의 무리가 회충처럼 빽빽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인간의 내면은 승냥이, 표범, 사냥개, 원승이, 전갈, 독수리, 뱀 등 가증스런 짐승이 우글거리는 밀림이라고, 자기 글을 읽을 독자들마저 “위선자들”이라고, 인간의 선한 의지는 사탄의 대결에서는 늘 진다고 절규한다.
예수가 밟은 땅이 바로 이런 사람들과 이런 종교들이 가득 찬 곳이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재림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의 왕국일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하면서, 사람이 역사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예수는, 사탄의 승리가 기록되는 것 같은 역사에서 사탄의 패배를 실증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함을 보여주는, 약속의 징표(徵標)다. 예수 승천 후 지난 두 천 년기는, 사람과 함께 있는 임마누엘 하나님과, 사람의 영성교육을 담당하는 보혜사 성령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신뢰를 쌓도록 깨우쳐 온 역사다.
혐오본문은 자기책임 하에서 읽고 결단할 일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 안에 있는 혐오 본문에 관해서는, 먼저 독자들이 자신에게 묻고, 자기책임하(自己責任下)에 결단할 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 인간에게 주신 지혜와, 예수의 부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책임 있게 읽고, 깨닫고, 결단할 일이다.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율법 조문을 찾으려 하지 말 일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성경 독자들은 각자 알아서 순종해야 할 말과 순종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고 있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그런 것을 가려낼 지혜를 주신다(욥기 28:27-28). 사람이 환영하기만 하면 사람과 동거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길을 인도하신다(이사야 8:8).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이 친히 사람 되어 오셔서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가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약속해 주셨다(요한복음 14:16).
혐오 본문을 어떻게 읽을까? 예를 들어 본다. 출애굽기의 계약법은 “무당(sorcerer)을 살려두지 말라”고 한다(출애굽기 22:18). 신명기법은 “복술자(卜術者”(diviner), “길흉(吉凶)을 말하는 자”(soothsayer), “요술(妖術)하는 자”(enchanter), “진언자(眞言者)”(sorcerer), “신접자(神接者)”(spell-caster), “박수”(consulter of ghosts or spirits), “초혼자(招魂者 necromancer)” 등을 다 “무당”의 동류로 보고, 사회에서 제거할 것을 명한다(신명기 18:10-11). 그러나 이런 명령이 비록 기독교 경전에 적혀 있다 하더라도, 지금 기독교인 중 누가 기독교 이름으로, 혹은 성경말씀이라고 하여, 무당이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살해하는가? 과연 누가 이러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살생부를 작성하고 살생 계획을 작성하는가?(각주1)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는 견지에 서 있는 이들마저도, 기독교의 유일성은 주장할지언정, 타종교 박멸을 위한 선전포고는 하지는 않는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출애굽기 안의 계약법은 여호와숭배 이외의 다른 종교는 다 말살하라고 한다(출애굽기 20:22). 오늘날 누가 기독교 외에 타종교를 말살하려 하는가? 기독교인 중에는 한국에서 이슬람 포교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불교를 우리나라에서 박멸해야 한다는 기독교는 아직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 기독교인의 양식(良識)은 그런 무모한 짓을 허용하지 않는다.(각주2) 훼불사건이 있긴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한국교회 쪽에서는 잘못을 사과해 온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안에서는 종교들끼리는 전쟁을 하거나 순교역사를 기록할 것 같지는 않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성경 독자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성경을 읽으면서, 거의 자동적이라고 할 만큼, 이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와 거부해야 할 메시지를 이미 구분하여 선택을 하고 있다.
이슬람경전 코란 안에도 혐오 본문은 있다. 그러나 IS의 폭력이 마치 그 본문에 따른 실천이라고 본다면 단견이다. 테러리스트의 폭력이 그 본문에 대한 순종이라고 판단하거나, 그 폭력이 그들의 신앙적 결단이라고 보는 것은 그들과 관련된 종교에 대한 비난일 뿐이다. 혐오 본문을 거부하는 반 혐오 본문에는 불복하고 혐오 본문에만 순종하는 테러리즘을 이슬람의 신앙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그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합법화하거나, 폭력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으로서,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역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주1) 딴 길로 잠시 벗어나 쉬어가면, 우리의 주제와는 무관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마술(魔術)이나 요술(妖術)은 이미 종교의 영역을 떠나 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도 오늘날 요술(妖術)쟁이나 마술사를 위험한 종교나 미신과 관련시켜 문제 삼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회에 같ㅇ 생각해 볼만한 것이 있다. 김영훈의 생각줍기 (Cartoon Allegory) NO/473 “속이는 것은 같지만,/ ‘마술’은/ 미소 짓게 하고/ ‘사기’는/ 피눈물 흘리게 한다....// 마술은 믿지 않고, 사기는 굳게 믿기에 얻는 효과다...” (<한겨레신문> 2016년 6월 6일자 26면) 주2) 하나님의 과격성(過激性)과 사람의 양식(良識)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마당을 달리하여 더 논의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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