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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욥의 아내는 악처였는가?

by 한종호 2016. 10. 27.

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13)

 

욥의 아내는 악처였는가?

 

구약성경의 등장인물들 중에 일부 성경해석자들과 설교자들에게 혹독한 평가를 받는 여성이 있다. 욥의 아내다. 남성 주류의 주일 설교 강단에서 사정없이 난도질당한 욥의 아내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욥의 아내를 “마귀를 돕는 배필”(아우구스티누스), “사탄의 도구”(칼뱅)로 여겼던 기독교의 위대한 선생들의 발언이 교회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 온 셈이다. 2년 전쯤이었다. 주류 신학의 안전한 테두리에 소속된 제법 큰 교회의 담임목회자는 설교 중에 욥의 아내를 세계 3대 악처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욥의 아내는 이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을까? 무명의 그녀가 했던 딱 두 마디 말, “그래도 자기 온전함을 굳게 지키겠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3:9) 문제가 된 이 말은 자자손손 신앙인들 입에 오르내리며 ‘악처’의 굴레를 벗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이 두 마디 말만으로 욥의 아내를 평가해도 될까. 이야기의 맥락과 욥기 전체의 신학적인 교훈에 비추어 자세히 읽고 짚어본다면 그녀를 향했던 과도한 비난은 거둬들이게 된다.

 

욥은 완벽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먼 옛날 우스 땅에 살았다. 우스의 위치는 에돔과 하란 어디쯤으로 추측되지만(창세기 36:28; 예레미야 25:19-21; 애가 4:21)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스라엘 밖의 땅이다. 욥기는 욥이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욥은 흠이 없고, 곧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악에서 떠난 자였다(1:1)라는 평가와 함께 그의 이야기가 시작될 뿐이다. 하나님은 그를 “이 땅에 그와 같은 자가 없다”(1:8)라고 극찬하실 정도였다.

 

욥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1:2),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3절). 그의 아들들은 생일마다 잔치를 열어 먹고 마셨다(4절). 욥은 자신의 경건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자녀들의 숫자만큼 번제를 드렸다. 혹시 모를 자녀들의 죄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5절). 자녀들의 감춰진 죄의 가능성까지 염려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설명할 길 없는 날벼락 같은 재난이 욥과 그의 가족을 덮쳤다. 욥을 묘사했던 네 가지의 경건과 똑같은 횟수의 재난이었다. 두 차례 강도떼의 약탈과 두 가지 기상현상(번개와 큰바람)에 따른 재난이었다. 칠천 마리의 양, 삼천 마리의 낙타, 오백 쌍의 소, 암나귀들이(1:3) 약탈당하고 종들과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1:13-19). 욥은 하나님이 베푸셨던 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의 완벽한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는가?

 

 

그 이유는 욥과 그의 아내가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늘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하늘의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주재하시는 천상회의에서 ‘사탄’(고발자)이 제기한 질문,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9절)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 사탄은 영리하고, 교활했다. 사탄은 욥의 마음의 동기를 문제 삼았다. 사탄은 욥을 자랑하는 하나님께 “당신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틀림없이 당신 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11절)라고 단언했고, 하나님은 사탄의 도발적인 말을 허용하셨다(12절).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욥의 신앙이 조건 없는 자발적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체 신실한 종을 고통 받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재앙 속에서 욥의 반응은 분명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해 애곡 의식을 행하고는 땅에 엎드려 예배한다(20절).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놀라운 균형 감각이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고백, “주신 이도 주님이시고, 취하신 이도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21절)라는 말로 고통의 본능을 누르고 정돈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 사탄이 하나님께 욥의 경건을 놓고 진정성을 제기했지만, 욥을 향한 하나님의 신뢰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공격수위를 높여 욥의 뼈와 살을 칠 것을 하나님께 요구한다. 사탄은 욥이 틀림없이 여호와를 저주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었다(2:4). 하나님은 욥의 생명만은 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주고 사탄의 도발적인 제안을 허용하셨다(6절). 발바닥에서 정수리 까지 온 몸에 종기가 나고, 극심한 가려움이 욥을 괴롭혔다(7-8절). 무슨 질병인지 알 수 없지만, 진물이 흐르는 상처, 부스럼, 통증, 피부가 벗겨지고 검어지고(13:18-20; 30:30), 고름에 번식하는 구더기들까지(7:5). 처참했다. 그는 도시 밖 오물더미 위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야 했다(8절). 잿더미와 깨진 항아리들이 나뒹구는 곳에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상태다. 그의 안락했던 삶과 신앙적 품위는 더 이상 없다. 욥은 말이 없다. 하늘도 말이 없다. 철저한 침묵의 상황에서 욥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킬 것인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절)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줄 아내의 말이었다. 욥의 온 생애를 통틀어 일상의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나누었을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돕는 배필’의 말은 의외였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세기 2:23)이었을 아내의 말은 강력했다. 이제 그만 경건함을 포기하라는 것일까? 남편 욥의 경건을 인정한 말 아닌가? 이 간결하고 결정적인 두 마디 말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석가들의 골칫거리였다.

 

하나님은 욥의 온전함을 자랑거리로 삼으셨지만(1:8), 욥의 아내는 남편의 고통을 직면하며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욥의 아내의 반응은 생략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그 많은 재산과 자식을 전부 잃고도 침묵했던 그녀가 자기 남편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겨우 두 마디 말을 했건만! 이 말 때문에 욥의 아내는 수많은 성경 해석자들과 설교자들에게 비난받아야했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우리는 욥의 아내가 한 말의 생략된 맥락을 상상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뼈와 살을 치도록 허용하셨을 때(2:5), 그 고통이 오롯이 욥만의 것이었는가. 욥의 아내가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남편의 모진 통증과 괴로움 곁에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고통을 격하게 옹호한 것이다. 사랑하는 열 자녀들까지 죽은 상황에서 남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나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신앙의 독자들이 욥의 고통만을 극대화하여 욥의 아내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주변화 시킨 것은 아닌가. 이야기 중심이 욥의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해석자들이 과도하게 그녀를 비난했던 것은 아닌가.

 

그녀의 말은 솔직하고 과감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녀의 말과 남편을 향한 연민은 신앙의 사람을 잔인하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었다. 욥의 아내는 욥의 친구들처럼 포장된 화려한 말로 본질을 가리지 않았다. 도리어 의인의 고통과 사심 없는 경건이 가능한가를 질문하고 성찰하도록 욥을 자극했다. 이후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과 7일간의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2:13) 죽기를 갈망한다(3:1-19). 죽음을 갈망하는 그의 언어는 친구들을 자극하여 논쟁의 불쏘시개가 된다. 욥은 불의한 자의 번성과 결백한 자의 고통의 현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들만의 안전한 신학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던 친구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3-31장). 이처럼 욥의 아내는 욥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 앞에서 분열하며 저항하고 질문하는 신앙이 허용된다는 것과 이른바 ‘정통신학’에 안주하지 않도록 도전한 도구였던 셈이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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