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16)
밧세바는 강간당한 것인가, 유혹한 것인가
“모호하게 보이는 것들에서 우리는 뭔가를 깨달을 수 있다”라고 말한 자끄 라깡의 한 마디처럼 모호함은 텍스트 해석의 실마리가 되곤 한다. 모호성은 일상 언어와 과학의 영역에서 환영받지 않지만, 문학의 옷을 입은 텍스트의 모호성은 독자를 미묘한 언어게임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예컨대 다윗의 드라마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큰 문제였던 이른바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에서도 모호성이 포착된다. 단 한 절만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사무엘하 11장 전체 맥락에서 왕의 권력을 남용한 다윗의 일방적인 강간행위는 아니었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다윗의 간음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암몬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폭력의 상황 가운데(10장; 12:16-31) 다윗의 궁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전쟁 상황,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궁에 머물러 있었다. 온 이스라엘 군대는 랍바를 에워싸고 전쟁 중이었지만(11:1), 다윗은 저녁 시간 침상에서 일어나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2절). 왕이 전쟁터에 군사들을 보내놓고 한가로이 저녁 산책하는 모습은 불안하고 불길하다.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있어야 할 왕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직무유기다.
옥상을 거닐던 중 다윗 왕의 눈에 들어온 한 여인, 그 여인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2절).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본다. 심부름을 다녀온 사람이 “그녀는 엘리암의 딸이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아닙니까?”(3절)라는 질문형식의 답변을 한다. 다윗이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힌 셈이다. 우리아는 다윗의 37명의 용사 중 한 사람이고(23:39), 엘리암 역시 다윗의 용장이었다(23:34). 다윗은 밧세바의 신원을 확인하고도 그녀를 호출한다.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4절, 개역개정).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4절, 새번역).
개역개정과 새번역의 미묘한 차이는 문장의 모호성을 반영한다. 히브리 문장의 동사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다윗이 주도하는 형태다. 다윗은 여자에게 전령들을 보냈다. 그가 그녀를 취했고 그녀는 그에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그녀와 함께 누웠다(4절). 두 명 이상의 전령이 다윗의 명령에 따라 밧세바에게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왜 왕의 호출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 채 명령대로 다윗에게 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밧세바의 저항이나 불복종의 묘사는 없다. “정을 통했다”라는 번역은 둘의 합의된 성관계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목소리 없는 밧세바의 수동적인 태도와 대조되는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과 왕으로서 강제력 행사의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격과 모호성의 긴장이 있다. 밧세바의 수동적인 태도와 정황에 해석자들이 관심을 두었다면 다윗을 강간범으로 고발하지 않았을까?
해석자들은 밧세바의 자리로 이동하여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상상해보려 하지 않았다. 왕의 지위가 요구하는 강제력과 명령을 받는 밧세바의 복종 사이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없는가? 몇몇 해석자들처럼 이 여인이 저녁 시간에 목욕하고 있었던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가? 밧세바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목욕하고 있었던 것인가? 한 여자가 목욕하고 있고, 왕이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다윗을 볼 수 없다. 그녀는 단지 누군가에 의해 관찰 당했을 뿐이다. 본문은 그녀의 의도와 감정을 단 한 줄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욕을 유혹하려고 추파를 보내는 행위처럼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다. 이것은 목욕하는 여성을 남성의 성적인 도발을 자극하려고 유혹한 것처럼 죄를 덮어씌우려는 의도다. 이러한 해석은 밧세바를 가부장적인 위계질서의 틀 안에서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동시에 여성을 향한 ‘동료인간’으로서의 연대의식이 결여된 차별적인 태도다.
밧세바가 목욕한 것을(2절) 생리로 인한 부정한 기간이 끝나 정화하는(4절) 제의적인 정결예식이라는 해석은 접어두자. 또 다른 문제가 이 여인의 임신에서(5절) 시작되니까. 11장에서 밧세바가 처음 소개될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실명이 아니라 “그 여자” 혹은 “우리아의 아내”로만 불린다. 다윗 왕의 지위와 권력 앞에서 밧세바의 목소리는 없다. “내가 임신했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뿐이었다. 그녀 역시 다윗처럼 사람을 보내 임신 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아의 아내로서 다윗과 동침한 위험성을 감지한 대처다. 동시에 그녀의 임신은 다윗의 범죄행위를 드러내는 증거다.
밧세바의 임신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자신의 충실한 장군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밧세바와 성관계를 갖도록 책략을 짜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다윗은 밧세바의 뱃속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처럼 위장하여 죄를 은폐하려 했지만, 우리아는 다윗의 숨은 의도를 좌절시켰다. 우리아는 왕에게 장군님과 모든 군대가 벌판에서 야영중인데, 어찌 집에 가서 먹고 마시고 아내와 동침할 수 있겠냐며 그럴 수 없다고 했다(11절). 다윗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죄를 감추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자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칼에 맞아 죽도록 요압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을 선택했다(15-17절). 그는 은밀하게 비열했다.
밧세바는 자기 남편의 죽음이 다윗 왕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근거한 것을 모르는 상황이다. 우리아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다. 이 여인은 다윗의 아내가 되고, 아들을 낳았다. 저자는 다윗이 저지른 일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라고 평가했다(26-27절).
다윗의 죄악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여 간음했고,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어도 우리아의 죽음을 사주했다. 때문에 11장의 본문은 다윗의 행위를 비난하지만, 밧세바를 비난하지도 죄인 취급하지도 않는다. 간음은 행위 대상자인 남녀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밧세바가 아니라 다윗에게만 죄의 책임을 돌린다. 왜일까. 저자는 이 사건을 왕의 권력과 지위를 남용한 성범죄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아내를 바라보는 욕망을 비난해야지 벗음을 상상하게 하는 밧세바의 목욕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이유는 없다.
신앙과 신학적 교훈이 담긴 본문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의 모호성에서 질문하며 사유할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면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에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부담과 책임은 무엇일까. 다윗은 권력을 남용한 왕으로서 품위를 잃었고, 마음의 법정인 양심을 버렸으며,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는 교훈의 증거가 되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더라도, 성경은 그의 도덕적인 죄를 덮어두지 않았다. 이 맥락에서 우리 시대의 ‘목회자 성윤리’ 의식도 따져볼 일이다. 목사의 영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가 의혹제기로만 끝나거나 피해 여성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도록 공동체의 책임의식이 절실하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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