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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성탄 메시지, 카이사르냐 그리스도냐

by 한종호 2016. 12. 25.

성탄 메시지, 카이사르냐 그리스도냐

- 누가복음 2:1~20 -

 

가이사 아구스도

 

“이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명을 내려 호적 하라 하였다.”

 

「마태복음」(2:1)은 헤롯의 시대로 시작되고 「누가복음」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로 시작된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아래로 이어진 유대인의 족보를 소개하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제자인 누가는 아브라함을 거슬러 아담까지 족보를 거꾸로 끌어 올려 창조주 하나님까지로 소급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주제인 세계비전적 복음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거지만 약간의 세계사 공부를 해보자. 이 공부의 목적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복음이 이 인간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하는 점을 짚어보려는 것이다.

 

가이사 아구스도(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 63~서기14)는 ‘존엄한 자 카이사르’라는 뜻이다. 가이사는 로마의 군인정치가 카이사르 장군(Gaius Iulius Caesar, 기원전 100~44) 가문의 성(family name)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나오는 그의 영어식 이름은 줄리어스 시이저다. 이 사람의 이름이 나중에 황제를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된다. 러시아의 ‘짜아르’, 독일의 ‘카이저’가 다 카이사르(케사르)의 음역이다. 오늘날까지 유럽의 나라들이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삼색기를 쓴다든가, 가령 미국처럼 국가 문장에 쌍두 독수리가 들어가는 등등의 기원이 다 이 사람 카이사르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가문의 고유한 명칭, 한 개인의 고유명사가 ‘세계의 지배자’ ‘천하의 황제’를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되었을까?

 

로마는 본래 귀족공화정 체제의 국가였다. 원로원이라는 대의 입법기구가 있고 호민관(집정관)이라는 선출직 행정가가 있어 국가를 이원화해서 다스렸다. 그러다 국가가 팽창함에 따라 군인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는데 그 최고 정점에 이른 인물이 줄리어스 시저였다.

 

세계의 민주주의 진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나라를 꼽으라면 누구나 프랑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1789년 세계최초의 시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부르봉 전제 왕권의 마지막 황제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다. 관성에 의해 태어난 그대로가 태초부터 이어져왔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이것이 세계사 최초의 민주주의 시민혁명이었다. 민주주의, 시민 개개인이 최고의 입법기관 곧 주권자가 된다는 것은 황제와 왕으로 상징되는 소수기득권 세력의 영구집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의 자리가 합법을 넘어 신성불가침적으로 영구 보장된다는 것은 기득권 귀족들의 권리도 그와 같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누구는 귀족 금수저로 누구는 노예 고용살이 흙수저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정치는 물론 사회 문화 철학 예술 더 나가 교회 성경 복음 설교까지 모든 인간의 활동이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연대와 협력과 부역이 된다. 그러므로 비록 루이 16세가 자물쇠와 열쇠를 만드는 소박한 취미를 가졌고, 마리앙뜨와네뜨를 비롯한 황후의 측근들(문고리와 십상시 수석 실장 위원장 등) 민간인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에 대해서 흰 눈과 같이 결백한(결재만 해주고 써 준대로 읊어댄) 벌거벗은 임금님일지라도, 이 황제를 단두대로 보냈다는 것은 인류역사상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대사건인 것이다. 왕은 그리스도가 아니니 한번 죽으면 부활할 염려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도시들은 ‘민회(agora, ekklesia, apella, comitia)’라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도 그 이상을 이어받았다. 여기에 타격을 가한 사람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Magnus 기원전 356~323)이다. 정복자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그리스 헬레니즘문명의 수호자로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이 문명을 전파했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운 간다라 미술 같은 문명 접촉의 영향으로 불국사의 석굴암에 까지 그의 정복사업과 헬레니즘의 그늘이 드리워져있으니, 얼마나 신비롭고도 무서운 일인가. 이 알렉산더가 정복왕이 됨으로써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황제, 그러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제국, 그러한 제국의 기틀과 규범으로서의 세계가 완성되게 된다.

 

마치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대의를 지킨답시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정복전쟁으로 유럽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듯이, 황제를 죽인다고 황제가 되고자하는 인간의 야망까지 죽일 수는 없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의 무덤은 큰 바위가 무덤을 누르고 있도록 해놓았다고 한다. 다시는 이러한 독재자가 무덤에서 부활하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민주주의의 의지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독재자가 다시 나오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각성이다. 독재가 부활하는 모판은 시민들의 망각, 둔감, 정치가들과 기득권의 선전선동에 의해 유행병처럼 한 인간을 지나치게 숭배하고 그에게 기대하는데 있다.

 

줄리어스 시저가 정복전쟁으로 인기가 치솟고 세력이 커지니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려는 공화파와 카이사르를 추종하는 제정파가 대립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은 공화정을 파괴하고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조금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한편, 선전전과 협박을 통해 원로원을 장악하며 황제로 가는 길을 닦아간다. 결국 공화파들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음을 깨닫고 그를 암살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할 때 남겼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그러나 사실 역사는 그 말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줘야 마땅할 것이다. “카이사르 너마저도” 라고.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공화파와 제정파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그 승리는 막강한 군벌을 형성한 제정파에게로 돌아간다. 제정파의 3명의 우두머리가 임시로 권력을 삼분하는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되는데 거기서 최종 승리하여 로마의 제1대 황제가 된 인물이 가이사 아구스도다. 가이사 아구스도(본명은 옥타비아누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여동생의 외손자로 아들이 없는 카이사르의 양자 자격으로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자가 된다. 아구스도는 레피두스를 실각시키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침으로써 삼두정치를 끝내고 원로원에 의해 독재권을 부여 받는다. 이때 원로원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 아우구스투스(AVGVSTVS)다. 존엄한 자. 그 누구도 그의 존엄을 범접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프린켑스(Princeps)라 불렀는데 그 뜻은 제1번 시민이라는 의미다. 원로원에서 제1번으로 발언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죽자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로마는 지상 유일의 신의 아들 곧 살아있는 신으로써 신성불가침의 프린켑스가 다스리는 제정 귀족사회가 된다. 그리고 이 의미는 프랑스대혁명으로 전제왕권과 귀족 기득권이 무너질 때까지 세계의 지배원리가 된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곧 모든 독재 권력과 영구 세습집권의 기득권이 하나님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부여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체제에 대한 거부 및 반대는 신에 대한 반항으로 처벌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호적

 

단독 지배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독제체제가 안정되자 천하에 호적을 명한다.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 사단의 충동질로 인구조사를 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역대상」 21) 왜 하나님은 인구센서스를 싫어하셨을까? 왜 성서의 기록자는 다윗의 인구조사를 사단의 충동질이라고 규정했을까? 이 기록은 하나님이 인구 조사를 싫어하셨다는 이야기일까, 민중이 싫어했다는 이야기일까?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명령은 단순한 인구조사가 아니라 자기 본적지에 가서 등록을 하라는 특별한 명령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떤 의심자들은 호적이란 거주지 등록이면 되는 것이지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이 기록을 거짓이라 단정하기도 한다. 또 혹자는 시리아 총독 구레뇨의 호적의 역사적 연대를 들어서 복음서 전체의 신뢰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우선 구레뇨의 호적에 대해. 구레뇨가 아구스도의 명으로 시행한 호적조사는 첫 번째 한 것이라는 누가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구레뇨의 인구조사는 단 한번 나타나 있고 그 연대가 「누가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저서Antiquities에서 AD 6년에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고 기록했다. 6년이면 이미 예수가 태어나신 이후로 누가의 기록에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구레뇨가 두 차례 시리아 총독을 역임한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구레뇨는 두 번의 재임 기간중 각각 호적조사를 실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누가가 굳이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 됐을 때 첫번 한 호적이라는 언급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의문의 표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왜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들이 끝없이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의 부재에 있다. 복음서 이외 일반 역사 기록에 예수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왜일까? 메시아 즉 인류 역사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이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은 대개 어디에서 나오는가? 위대한 가문. 왕가의 혈통. 정복자. 국가를 세운 개창자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역사는 그런 승리자들의 역사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1~8)

 

만일 당대 로마의 귀족 집단에 속한 지식인이 「누가복음」을 읽었다면 유대 지배 계급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 예수라는 인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것이 예수에 대한 역사의 직접적 언급이 현저히 부족한 이유다. 메시아(구원자)라 불릴만한 자는 이런 보잘 것 없는 출신과 형상을 지닌 사람이어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의 인식 속에는 인간의 삶속의 보편적이고 거대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음모가 들어있다. 다름 아닌 메시아(역사의 주인공)는 황제 영웅 권력자 귀족 엘리트일 것이고 그래야 마땅하다는 편견이자 착각이다. 이것은 평범한 자, 노동하는 자, 희생하는 자, 고통 받는 자에 대한 멸시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 믿음이다.

 

여러분이 가끔 어떤 영화를 보면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주인공이 결국 모두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부자나 지식인 권력자는 항상 배덕한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속의 신화일 뿐이다. 현실은 무수한 과묵하고 근로하는 영웅들과 희생자들에 의해 전진해가고 구원 되는 것이지만, 그들의 모든 노고와 노력은 소수의 권력자들과 그들에게 결합된 약삭빠른 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언젠간 이 침묵하는 구원자들이 그들의 말을 할 때가 오리라는 것이 역사의 발전 방향이었고 민주주의가 걸어온 과정이었다.

 

 

 

 

지금 11월에 시작된 촛불혁명이 성공하고 훗날 이 역사를 기념한다고 할 때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질까? 백남기 농민의 동상이 세워질까? 사람들은 박정희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세월호의 학생들이나 백남기 농민의 기념물이 건립된다면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무슨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라고 말이다. 예수의 초기 생애에 대한 현저한 기초자료의 부족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몰이해(은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거부(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역사성을 잃어버리고 엉뚱하게도 신비화 되고 말았다. 신비화됨으로써 다시 부자와 권력자들을 보호해주는 신으로까지 왜곡되게 된 것이다.

 

호적 문제로 돌아가자. 왜 거주지에서 등록해도 될 것을 본적지로 돌아가 등록하도록 했을까. 이는 로마 제국이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내세우고 있지만 심층에는 공고한 감시와 통제의 혹독하고 잔인한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이 호적 방식은 세금의 확보 뿐 아니라 부랑하는 난민들에 대한 정보와 통제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오늘날 유럽에서 벌어지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그것에 대한 각국 정보기관들의 정보수집과 난민통제 정책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자고로 제국들이 해체 붕괴하는 데에는 난민발생 곧 세금을 내지 않고 출신이 모호한 유랑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원동력이 되었다. 떠돌이들이 결집하고 거기에 불순세력과 지방 세력들이 결합되면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구심이 형성된다. 이 구심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회오리바람처럼 이동하면서 세상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서유럽은 흉노라 불리는 동북아시아의 유목민족 집단이나 몽골족의 서진으로 이에 쫓긴 훈족(타타르)이 서진하면서 서유럽까지 휩쓸었던 무서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로마 역시 이러한 동방 타타르계 용병집단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 사람들을 지옥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타르타르’라 불렀다. 아우구스투스의 천하 호적 명령은 그런 배경을 가졌고 이런 지상의 왕 아우구스투스 통치의 배경이 진리의 왕 그리스도 탄생의 배경이자 대립의 의미이다.

 

은마(銀馬)는 오지 않는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산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서으로 가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뜰에서 울 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다들 누군가(어느 때, 무엇인가) 오기를 기다렸다. 매일 눈을 뜨면 보이는 건 논과 밭과 산이었다. 산 사이로 신작로가 나있고 거기서 버스를 타면 시내(용인)로 갈 수 있었다. 용인에서 다시 버스를 타면 수원에 갈 수 있고 수원에서 기차를 타면 서울에 간다. 나는 유년시절 서울에 서너 번 가본 기억이 나는데 구체적인 풍경은 생각나지 않고 버스에 시달린 것과 연탄재 냄새만 기억난다. 우리 외가는 서울의 변두리였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시골보다도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 자라자 곧 서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청소년기에 벌써 미국이나 독일에 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뭔가를 누군가를 어느 때를 기다린다. 아빠. 엄마. 오빠. 동생. 남편. 아들. 딸. 손자. 무엇을, 어떤 때를 기다렸을까? 그 기다림과 기대와 소망은 각기 다르고 다양하겠지만 인간다운 행복한 삶, 샬롬,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미가 4:4」)처럼 자기의 생활 안에서 근심 걱정에 쫓김 없는 편안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뭉뚱그려 ‘구원(救援)’이라고 해보자.

 

나의 어린 시절이 그런 구원이 풍족한 것이었다면 나는 서울을 동경하지도 미국과 유럽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동경한 그런 곳에는 그런 구원이 풍성해서 우리는 거기 가서 그것을 얻어다가 구원이 부족한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나라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동요와 같이 서울 가신 오빠는 오지 않고 이내 우리의 구원의 꿈과 기대도 사라져 버린다. 한때는 서울의 최고 아파트이기도 했던 ‘은마(銀馬)’는 재미작가 안정효의 소설에 나오는 전설 속 구원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은마아파트는 있을지언정 은마는 없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면 전설의 시대가 온다. 신화의 주인공과 전설의 주인공은 다르다. 신화 속의 주인공은 영웅이고 승리자이고 위대한 권력자이다. 그러나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그 신화에 도전하는 또 다른 영웅은 반란자 배반자 패배자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민족에게는 오랜 세월동안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애기 장수의 전설이 있었다. 그의 날개가 자라나 날아다니게 되면 마침내 세상을 뒤집어엎을 때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애기장수는 그때가 이르기 전에 머리카락 잘린 삼손과 같이 날개가 잘려서 죽게 된다. 그런데 신화학적으로 이러한 전설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배세력에게 짓눌린 민중들이 만들어낸 슬픈 영웅이 애기장수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의 창작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일부러 지어내 퍼트린 실패한 메시아가 애기장수라는 설이다. 여러분은 이 두 학설 중 어느 것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가?

 

아무튼. 신화의 시대가 가고 애기 장수도 죽고 전설도 지워지고 우리들은 자기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곧 내 스스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게 오빠이고 은마이고 메시아가 되어야만 하는 시대가 왔다. 이 말은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우리의 인식이) 자각되고 각성된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주체적 자립(自立)을 이루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그 누구(지도자, 권력자, 부모님, 부부간, 친구간, 선생님, 목사님)의, 어차피 부분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게서 전체적 구원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안에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전체적 구원을 기대하고 발견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은 저 멀고 높은 서울과 워싱턴과 뉴욕과 파리나 베를린 혹은 모스크바를 바라는 게 아니다.

 

예루살렘이나 대형교회나 명망 있는 종교지도자를 사모하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이게 진짜 우리들 자신이다!) 내 속에서, 우리들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보다 근본적이고 인격적인 전체적으로 완성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사랑(새로운 관점의 관심)으로. 서로 새로운 관점의 관심으로 자각된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는 무관심하고 비정한 이 세상과 맞서는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 사랑의 발견 속에서 우리는 모든 지상의 가짜 메시아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게 된다. 그것을 오직 하나님만 바란다고 하는 것이다.

 

이걸 일깨워주려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개인이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그 개인이 공적 그리스도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나약하고 취약한 죄인의 자의식으로 뭔가 눈에 보이는 가짜 메시아들에 의지하고 기대야만했던 옛 자아의 상태를 뛰어넘어 하나의 독립적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가 그리스도적 인간, 신의 아들, 신적 인류로 탈바꿈하는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도 이렇게 신자에게 주어진 권능과 책임에 도달하지 못하여 여전히 그리스도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미지의 메시아로 상정해 놓고 자기의 모든 삶을 그 추상과 관념에 맡겨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삶의 태도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거짓말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메시아는 본래 없는 공허한 것이거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인간적 노력이나 행위가 없이 무상으로 받는다는 교리에만 입각해 있기도 하는데, 이런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노고와 희생을 거저먹겠다는 인민의 아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를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저절로 나온다. 어리석고 깨어나지 않은 사람, 어린아이 같아서 잘 속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의심도 회의도 결과도 헤아리지 못하는 민중을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항상 이런 아편 같은 세상에 휩쓸린 사람들을 흔들어 깨움으로써 그 지배자들을 두렵게 한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구약성서는 아들들에 대한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이야기다. 선택하고 유기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꼭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의 기록이란 동시통역이 아니라 추후기록이기 때문이다. 선택받고 보니 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얘기. 그러나 당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 당사자들의 선택이 중요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땅을 갈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하와는 아들을 낳는다. 가인의 이름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구원자를 낳았다는 기쁨의 표현이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통해 에덴동산으로 복귀할 기대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창세기 3:15). 그러나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을 죽임으로써 선택에서 탈락한다. ‘아벨(헤벨, 공허의 뜻)’은 무고한 죽음, 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상징이다. 그에게도 본래 어떤 이름이 있었겠지만 성경은 그를 그냥 ‘공허(생기의 뜻도 있음)’라 불렀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존재를 무위의 공허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는 가장 악한 폭력이 된다. 하나님은 그를 대신해 곧 이 공허의 무고한 희생자에게서 이어 나온 아들 ‘셋(대신 줌의 뜻)’을 통해 계보를 잇게 하신다.(창세기 4:25) 우리 모두(셋)는 공허로 돌아간 누군가(희생)의 대신으로 주어진 생명이다.

 

노아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세기 5:29)는 의미다. 역시 에덴동산의 회복을 염원하는 인간 구원의 갈망과 기대가 담긴 이름이다. 그러나 노아는 위로는커녕 홍수로 세상이 깡그리 심판받는 것을 보았다. 훗날 홍수 후에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드는 추태를 보인다(창세기 9). 이것은 뭘까? 왜 노아는 술에 취했으며 벌거벗었을까? 왜 그는 자신을 비웃은 아들 함을 저주했을까? 왜 자기의 벗은 몸을 보지 않고 감싸준 셈과 야벳을 축복했을까? 이것은 노아의 술 취한 절망이다. 술에 취해 그는 돌아갈 가망이 없는 가짜 낙원을 만들고 스스로 벌거벗었다. 함은 그것을 비웃었다. 무엇을? 낙원 복귀의 꿈을. 이미 낙원에 돌아갈 꿈을 포기해버린, 그 절망(갈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는 인류가 나타난 것이다. 자기 아들일지라도 노아가 그 아들과 아들의 아들(가나안) 곧 그 후손까지 저주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메시아(에덴 복귀)를 기다리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바꾸면 곧 스스로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메시아) 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

 

메시아를 포기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주셨다. 두 가지다. 땅과 자손.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사백년을 살았다. 땅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때가 이르러 모세가 나타났다. 모세는 정치적 지도자이자 시대의 메시아적 인물이었다. 그는 이집트 파라오의 유아학살에서 살아남았다. 그 이름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끌고 출애굽(Exodus, 길을 떠난다는 뜻)을 결행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 건설할 하나님 나라의 반석인 토라(תּוֹרָה, 율법)를 선포했다. 율법은 법률이지만 동시에 지혜의 가르침이다. 가르침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지혜. 그 원리에 대한 이해력. 그러한 이해의 충만함이 만드는 국가제도의 종교적 서정성. 그것이 가나안의 자연과 어우러진 하나님 나라의 이상향이었다. 모든 지파와 가문이 땅을 가지고 있고 그 경계와 원칙을 지키며 각기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 그늘 아래서 평화롭고 안전한 삶. 그들이 아직 히브리 노예였을 때 애굽에서 꿈꾸던 천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사사들의 시대를 거쳐 사울이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첫왕이 된다. 그는 세속 왕의 전형적 실패와 패착을 다 보여주고 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다윗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 무렵 사무엘과 같은 예언자가 등장한다.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의 삼두체제는 멸망 때 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엔 이 세 가지가 다 타락하고 극소수의 예언자들만이 실패한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하게 된다. 이 무렵 메시아의 단절이자 진정한 메시아 도래의 꿈이 생성된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 유수 시대에 이스라엘은 고난, 고통, 박해의 나그네 생활 곧 세상의 최하층으로 살면서 ‘도대체 왜?’라는 강렬한 종교적 의문의 해답을 갈구했다. 그들은 조상들의 죄와 실패의 역사를 기록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했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도래를 이렇게 예언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3)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를 의미했는데, 그들이 갈망한 메시아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는 참된 왕 제사장 예언자이어야 했다. 그것은 오랜 인간의 역사와 종교적 경험 그리고 성서적 예언의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결론이었다. 왕만으로도 아니고 제사장만으로도 아니고 예언자만으로도 아니더라는 것. 자신들과 같은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려면, 어떤 세상이 와야 하는가? 세상의 왕들을 보니, 세상의 제사장들을 보니, 세상의 예언자들을 보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럼 누구이어야 하는가? 이 셋이 하나이어야 한다. 이 셋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이 세 가지가 기능적으로 살아있어야 한다. 정치적 지도자, 영적 중재자, 미래의 지시자.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런 메시아를 참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기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어떤 사람은 다윗 같은 메시아를, 어떤 사람은 엘리야 같은, 어떤 사람은 멜기세덱 같은, 그런데 누가 왔는가?

 

 

 

베들레헴 말구유에 아기 예수가 오셨다. 나사렛 지방 시골 목수의 아들이 나타났다. 가이사 아구스도와 유대왕 헤롯과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시대에, 폭군들과 부패한 종교지도자들과 끊어진 예언자의 시대에, 누가 왔나? 예수가 오셨다. 오셔서 예수는 무엇을 했는가? 폭력과 지배의 법, 율법의 세계로부터 사랑과 이타의 법, 비폭력적 사랑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그는 우선 가르치는 예언자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복잡하고 고상한 랍비들과 달랐다. 단순하고 지혜로운 말씀들. 명쾌한 자유의 선언. 거듭남. 세례. 그는 세상 권력자들의 지배에 얽매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바라보라. 믿음이라는 영적 실제적 본질적 변화의 세계, 믿음이 있어야지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셨다.

 

이것을 깨우쳐 이 세상 지배에 히브리 노예처럼 예속된 자기를 자각하고, 거기에 직면해 십자가를 지듯 그것을 짊어지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 비로소 열리고 보이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새로운 신의 나라. 그것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인식상의 깨우침과 생각하는 방식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 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깨우친 사람은 자기의 그리스도적 삶 곧 메시아적이고 공적인 삶의 소명을 깨닫고 이 세상에 비참여, 비가담, 비협력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러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나그네 떠돌이 풀뿌리 민중이란 본래부터 언제나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인데 자각치 못했을 뿐이었다. 자각하면 가난한 자도 메시아로 각성되어 자유로워진 지상의 왕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전의 제사가 아니라 이런 왕적인 삶을 진짜 종교라 했다. 산제사로 자기를 희생으로 드리는 것. 세상 지배자들처럼 자기의 권세와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는 참 제사장으로서 성전을 거부하셨다. 성전을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셨고 그 모든 화려한 건축물이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 선언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 곧 삶과 정신의 예배자를 원하신다고 하셨다(요한복음 4:24). 그는 이러한 참 제사장으로서 세상과 하나님 간의 중재자로 오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중재는 어떤 방식이었는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인간이 동료 인간을 자기와 같이 대접하는 예절. 사랑이 곧 새로운 계명(율법)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 사랑으로써 우리도 우리가 받고 배운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민족, 전통, 율법, 그런 관념이나 의식도 필요 없이. 편견, 불안, 의심, 경계, 이런 분리와 분열도 필요 없이. 예수님은 참된 미래의 예언자로서 자신이 보이신 그 사랑으로 사랑 없는 세상을 구원하라고 우리의 미래를 제시하셨다. 오직 서로 사랑, 오직 서로 존경, 오직 서로 대접, 서로 같이 살아가는 아름다움 단순함 착함으로.

 

가이사냐 그리스도냐

 

그리스도는 너희 안에(우리의 사랑 속에) 자기가 계시고 하나님도 계신다고 하셨다. 세상에 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러 내가 왔다고 하셨다. 내가 곧 하나님 아들이고 메시아라고.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내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내가. 배우지도 못하고 유명하지도 않고 중앙무대에서 활약하지도 않은 내가. 예언자에서 제사장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을 유대인의 왕, 하나님의 왕국의 왕, 진리의 왕으로 선언하셨다. 아우구스투스와 헤롯과 빌라도와 안나스와 가야바의 시대에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다. 니가 무슨 예언자냐? 니가 무슨 제사장이냐? 니가 무슨 왕이냐? 헛소리! 미쳤다! 신성모독! 바알세불이 지폈다!

 

그러나 그가 표적(sign)을 보이시자 사람들이 몰렸다. 사람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상의 왕과 지상의 제사장과 지상의 예언자들이 합작하여 참된 왕이자 제사장이자 예언자인 그를 십자가에 죽였다. 강도와 같이 반란자와 같이, 저주받은 자의 형상으로 죽였다. 그러나 그를 죽였어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을 근절시키진 못했다. 그가 없어도 근절 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깨닫고 경험한 것을 고백했고 증언했고 전파했다. 무엇을?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 복음을. 이제 난 알았다. 무엇이 구원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죽고 그가 살았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인 그. 그리고 거듭나 새롭게 태어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

 

오빠는 없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신화는 끝났다. 그러나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 왔다. 차원과 인식과 관점이 달라진 현실. 내가 구원자다. 내가 예수다.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기쁜 소식을.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모든 인류에게 평화가 되는 소식과 그 방식을. 그것은 사랑의 힘으로 모든 폭력을 이기는 것이다. 내 안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공동체 속에서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내게서 세상을 봄으로써 가능해진다. 나는 세상의 거울 진리의 거울이다. 내가 세상의 대표자이므로 나의 죄와 슬픔과 미움과 원망과 약함과 그런 것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 안에서 내가 얼마나 고귀하고 유일한 가능함을 지닌 존재인지를 자각하니 내가 곧 나에게 왕이고 제사장이고 예언자로서 나의 모든 인생이 새로워진다.

 

이 두 가지. 1)정직한 인식과 직면. 2)그것을 넘어가는 차원 다른 성숙과 지혜. 지혜는 도덕이 아니지만 도덕보다 현명하다. 지혜는 사랑인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넘어 타자를 환대하는 그리스도적 사랑을 깨치고 배운 사람이다. 사려깊고 온정이 있고 따스한 연민과 냉철함, 공감과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가진 사람. 종교적 서정성. 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식 안에서 혁명이 일어나 더 이상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

 

지금 세상은 가이사 아구스도, 헤롯, 빌라도, 가야바와 안나스, 박근혜 김기춘 우병우 최순실, 김삼환 조용기 오정현의 세상이 아닌가. 이 세상에 우리의 그리스도는 어디 계신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에베소서 3:17).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태어났는가? 얼마나 자라고 계신가? 옹알이 수준? 초딩? 중딩? 고딩? 대학생? 청년, 중년, 노년? 왕(정치적 지도자)? 제사장(종교가, 예술가)? 예언자(비평가, 철학자, 사상가)? 바울은 말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브리서 5:12).

 

아우구스투스의 천하의 변방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하나님의 아들 참된 진리의 왕 예수가 아기로 오셨다. 아직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주의 부모와 천사들의 초대를 받은 들판의 이름 없는 목자들뿐이다. 천사들이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누가 이 의미를 알겠는가! 이제 곧 그리스도께서 무럭무럭 자라나 갈릴리에서 부터 복음을 전파하시고 유대와 사마리아를 누비시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실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오시기를! 자신의 인격적 결단으로 자기 안에 메시아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우리 모두 새해에는 놀라운 변화와 성숙이 임하기를! 우리 교회와 사회와 나라도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공의로운 세상으로 진전되어 가기를.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복음이 도래하는 샬롬이 넘치는 대한민국이 오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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