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5)
가뭄의 의미
고라니가 마당까지 내려와 생전 먹잖던 비비추와 개망초까지 뜯어먹고 있다. 잎이 겨우 나기 시작한 고추 모종을 몽당가리로 만들어 놓은 진 오래되었다. 알뜰살뜰 부쳐놓은 싹들을 생각하니 애끓는 마음. 비를 비는 기도를 드린다. 허나 무슨 엘리야의 예지로 구름을 헤아릴까. 그보단 간절한 시절 속 태우는 가뭄이 무슨 뜻인지 하늘에 물어본다.
사무엘은 하권의 끝에(21) 다윗왕의 남은 치세를 정리한다. 소임이 끝난 창립자에게 역사가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엔 삼년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결과(어떻게 물었을까?) 전왕(前王)과 그 집안이 저지른 기드온 학살사건 때문이라는 결론이 났다. 왕은 그 하회(下回)를 희생자의 유가족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달라 요청한다.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사울왕의 고향에서 그의 완전한 종말을 선언하리라는 원한에 사무친 요청이었다. 놀랍게도, 왕은 수락한다. 사울가(家)의 자손 일곱이 목매임을 받았고 곧 비가 쏟아졌다. 복수를 완성한 비, 원한을 풀어내는 비. 과거사의 피 흘림으로부터 땅을 정화시키는 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를 맞이하진 못했다. 오직 한 사람 사울의 미망인 리스바가 자식들의 시체 위에 내리는 비를 맞았다. 영욕의 한 시대를 고별하는 처절하고 질긴 울음과 함께. 왕은 그 시체들을 거두어 사울왕의 묘실에 정중히 매장한다. 이로써 화해와 치유가 이루어졌고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 다윗의 과거청산. 이것이 대왕의 최후 업적이라 사관(史官)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과 봄이 이어진 접경의 긴 터널이 끝나자 새로운 계절이 펼쳐진다. 신(新)정부에 거는 기대와 찬탄으로 환호하기도 한다. 이제 막 복구한 일상은 연부년 삼년의 기근 끝에 있는데, 갑자기 맥이 빠지고 무서워지기도 한다. 왜 맥이 빠질까? 무엇이 무서운 것일까? 깜빡깜빡. 우리의 가뭄이 어떤 것이었지? 세월호, 물대포, 헬조선, 각양 마피아들의 연대, 베를린 장벽보다 더 공고한 넘사벽이 되어 탈출 외에는 전망이 없으리라 던 악몽 같은 참사와 장례와 애도의 기간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는 아랑곳없이 백년까지 누리리라. 백년까지 우리를 지배하려는 가상의 왕조라도 있는 것처럼. 적대 아니면 원한뿐인 역사의 미래가 무서웠다. 꿈을 비는 마음으로 동티라도 날까 평화와 절제의 집단지성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 겸손한 승리를 획득했다. 권력 교체를 넘어선 함께 나가는 행복의 시대를 위해. 나 한 사람 가만있으면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무서움이 하나 더한 촛불들의 반전이었다. 그러니 ‘혁명은 이루지 못하고 방만 바꾸었다’는 시구처럼 이 반전이 ‘다 똑같다’는 허무주의로 돌아갈까 무서운 것이다. 해방이후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고, 4.19 이후 5.16이 터지고, 10.26 이후 12.12와 5.18이 터지고, 6.10 이후 6.29가 나온 것처럼. 말과 말이 겹치고 말과 말이 엇갈리고 말과 말이 말들을 낳기를 원하는 끝없는 스캔들. 새 부대에 새 술이 간절해진다.
거듭남. 과거의 청산. 회개와 고백이 요청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율법의 시대와 같이 보복으로 조종(弔鐘)을 울려서도 안 된다.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의 난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자발적 회개와 고백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안달도 방관도 없이. 이 변화된 시대의 의미를 묻는 회개와 고백을 선도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솔직히 말해보자. 역사가는 장차 이 시대 우리들의 교회를 어떻게 기록할까? 사무엘의 가뭄과 비는 기상이변의 기록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모르거나 알아들은 인간에게 내리는 화답이었다. 개혁도 개개인 실존의 구체성에 이르지 않고는 ‘변한 게 없다’는 허무주의로 돌아간다. 누구보다 개혁을 진리파지(眞理把持)의 수단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허무주의부터 밝혀야 할 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유럽여행을 가는 정신으론 미진하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로마서 2:28). 대지가 기근에 시달리는 한 기드온 거민들의 영의 가뭄도 끝나지 않았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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