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5)
바람을 마주보고 가는 바보
“그 양반은 독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잠은 안자고 책만 읽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다 말려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문제는 책이었다. 아, 독서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에 해롭단다. 그걸 염려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 반대로 골수가 넘쳐나서 문제가 되려나? 이에 대한 최근 학계의 결론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이 사나이는, 기사 소설을 잔뜩 읽은 탓에 마침내 방랑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골수가 동이 나도 그런 결심은 가능한 모양이다. 아니 그러 길래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가? 이리하여 라 만차의 어느 시골에 사는 영감 “돈 끼호떼”의 기이한 유랑 행각이 시작된다.
돈 끼호떼와 산초 (출처: spotter_nl (http://www.flickr.com/photos/30733371@N00))
그런데 기사라면 당연히 말을 타고 다녀야 하니, 머리는 부스럼투성이에 비루먹고 마른 말이라도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어느 명마에 뒤지지 않았다. 이 말의 이름을 “로신안떼”로 지었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로신”으로만 하면 “농사를 짓던 말”이라는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앞 또는 전(前)이라는 의미의 “안떼”를 붙여, 지금 농사짓는 말들보다 훨씬 앞선 최고의 말이라고 내세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와 더불어 착한 남자 산초 빤사가 그의 시종노릇을 하면서 일종의 “짝패 영화(buddy movie)”를 내내 찍는다.
“돈 끼호떼”하면, 풍차와의 대결이 유명한데 사실 이 대목은 소설 전편에 걸쳐 아주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은 돈 끼호떼의 면모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들판에 풍차가 나타나자 돈 끼호떼는 거인이라며, “정의의 싸움이야. 저런 악독한 죄의 씨앗을 없애버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네”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는 산초에게는, “모험이라는 걸 통 모르는 모양이구먼”이라며 풍차로 돌진한다.
당연히 거센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날개의 충격으로 돈 끼호떼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살아있다.
“결투라고 하는 것은 세상 어느 일보다 언제나 우여곡절이 더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내가 아프다고 끙끙대지 않는 건, 우리 방랑기사는 어떤 상처를 입어도, 설령 배에서 창자가 다 터져 나오더라도 신음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라고 기사도를 설명한다. 기사는 슬픈 존재다. 신음도 마음대로 못하다니.
돈 끼호떼는 사방을 다니면서 수습이 되지 않을 일만 저지르고 다닌다. 이런 일도 있다. 열두 명의 사나이들이 쇠밧줄로 목이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는데 돈 끼호테는 이들이 죄수라는 호송 군인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시비를 건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이들의 의사와는 달리 억지로 데려가고 있단 말이 아닌가? 기사인 나의 할 일이 생겼네. 억지로 강압된 자들을 풀어주고, 고난에 처한 자들에게 달려가 구해주는 일이니 말일세.”
그렇게 해서 이들 열두 명의 죄수들은 돈 끼호떼의, 난동에 가까운 활약으로 풀려나게 된다.
도대체 이 엉터리 같아 보이는 이야기가 어찌해서 1605년 출간된 이래 고전의 반열에 올라 오늘날까지 경탄과 찬사를 받을까? 그건 무엇보다도 작가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익살과 해학에 찬 이야기 솜씨가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주인공 돈 끼호떼의 매력이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치광이 같지만 진지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대단히 점잖고, 사랑하는 여인 둘씨네아에 대한 마음을 끝까지 지킨다. 그는 지식인인 동시에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억울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풍차와의 대결도,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도 피하지 않고 마주쳐 돌진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일까? 돈 끼호떼는 우리에게 그걸 묻는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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