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5)
무엇을 걱정하는가
걱정으로 일생을 살아오신 분을 알고 있다. 늘 각종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며 살아오신, 말 그대로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사신 분이다. 상당 부분의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도 자신이 세상의 걱정하지 않으면 사건의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강박관념에 잡혀있는 그런 분이었다.
여러 해 그분을 대하다가 드디어 걱정의 절정을 포착하게 되었다. 그분의 최고 걱정은 ‘걱정 없음의 걱정’이었다. 몹시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분의 불안한 태도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금처럼 아무 걱정이 없는 순간이 가장 힘겹다. 이렇게 걱정 없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정말 걱정된다.’고 슬픈 표정으로 답했다.
《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를 쓴 대만학자 서복관(徐復觀)은 유가 특징을 우환의식(憂患意識)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의식은 일상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또는 종교적인 원죄의식이나 자기존재에 대한 부정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자기성찰을 통해 온전한 자아의 완성으로 이끄는 의식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걱정이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목표 없이 되는대로 멋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한 자극제로 작용한다면, 진리추구라는 좁고도 먼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걱정의 중요한 핵심은 과연 무엇을 걱정하며 어떻게 걱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막연히 세상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부류의 걱정은 의미 없기 때문이다.
“군자는 진리를 도모하지 먹을 것을 모색하지 않는다. 농사에는 굶주림이 들어있다. 공부에는 복록이 들어있다. 군자는 진리를 걱정하지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謀道不謀食. 耕也 餒在其中矣, 學也 祿在其中矣. 君子憂道不憂貧).” - 《논어》, 〈위령공〉 31장
위의 본문은 오해가 많은 문장이다. 본문의 방점이 진리추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을 추구하지 않음에 초점을 두어, 공부 좀 하겠다는 이들은 생계를 무시해도 된다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본문을 공부에 녹봉이 있고 농사에는 배고픔만 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농사 집어치우고 모두가 과거급제하려 달려들게 만들었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매진하고 있는가를 판단케 하는 척도가 된다. 공자께서는 올곧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군자는 모름지기 진리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사에는 늘 허기짐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두는 관심은 늘 부족함을 동반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공부에는 복됨이 있다. 본문의 녹(祿)이란 구체적으로 복록(福祿)을 의미한다. 하늘께 제사 드리는 고기와 음료를 복(福)이라 하고, 제사 후에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고기와 음료를 녹(祿)이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하늘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 군자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근심할 것이 아니라, 진리추구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 아래 서있는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지를 걱정해야지, 삶이 곤궁할 것이냐 풍성할 것이냐를 근심해서는 안 된다고 공자께서 힘주어 말한다. 삶의 곤궁함을 피하기 위해 아등바등 거려봐야 만족함은 없을 것이라면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향해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다.
경전의 典자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하늘의 뜻을 펼치기 전,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 음식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실시한 것이다. 온통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면 하늘의 뜻과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속내를 간파한 시험하는 자는 그의 거리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일깨워주려 했다. 현실의 냉엄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4장 3-4절
예수의 시선은 돌덩이에 있지 않았다. 광야의 40일 내내 떡을 향해 관심두지 않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입을 통해 표출되는 진리의 말씀에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떡에 관심이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걱정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 한동안 먹을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느 날 예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제자들과 호수를 건넜다.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서로 의논하자, 예수께서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상기시키면서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11)고 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실 때, 제자들은 여전히 떡이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떡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제자들은 먹는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걱정, 염려를 뜻하는 헬라어는 ‘메림나(merimna)’이다. ‘나누이다’, ‘분열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merizo)’의 파생어이다. 다시 말하면, 걱정이나 염려는 분열이나 나누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집중하지 못하여 생각이 흩어지거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산만하게 진행하는 것이 걱정 또는 염려의 근거라는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40일 동안 꾸준히 진행된 예수의 집중력을 흩으려했다. 예수의 관심을 먹는 것으로 돌리려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시험에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산만하게 흩어진 관심을 궁극적인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집중시켜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세상에 대한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분열시킨다. 분열된 마음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물고 나타난다. 공자께서 농사를 짓는 것에 늘 굶주림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함에는 하늘의 은총인 복록이 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궁극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인리히 오토’가 종교경험의 본질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역설적인 용어로 말했다.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진리를 향한 ‘거룩한 걱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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