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8)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행사를 참여했을 때 간혹 만났던 진기한 장면들이 있다. 행사의 장(長)이 누구이며 좌우에 어떤 지위의 사람들로 위치가 정해지고 순서가 정해졌냐 하는 것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대부분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행사를 치르지만, 간혹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자신의 위치를 변경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발생하는 일이다.
따라서 행사를 준비하는 진행 팀이 정작 행사를 어떻게 의미 있게 진행할까 하는 것보다 자리를 잘못 지정하여 혹 지적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참석한 유력한 이들이 충분히 대접받는 위치에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으면 좋은 행사였다고 평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불평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가(儒家)는 특히 형식에 초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가가 강조하는 ‘예의(禮儀)를 갖춘다’는 것은 적합한 형식을 잘 갖추어 행동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유가의 논리는 제도와 형식에 치중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허례허식을 추방하기 위해 강력하게 반(反)-유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가에 대해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유가의 경전을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떤 사람의 해설서가 아니라 직접 자기 스스로 유가 경전을 읽어보았다면 공자나 유가에 대해 그토록 적대감이나 편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편견이 직접 대해보지 않은 경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매우 강조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탕의 철학으로 인(仁)을 주장했고, 상호관계성을 위한 방법론으로 예(禮)를 주장했다. 이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관한 강조가 아니었다. 공자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해 나갔다. 오히려 형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켰다.
“예식은 사치하기보다 검소해야하고, 장례는 형식 갖추기보다 슬퍼해야 한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논어》, 〈팔일〉 4장 3절
공자 당시에도 형식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시 관료들은 자신들의 집과 의복 그리고 마차 등을 화려하게 꾸며 일반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보여주려 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관혼상제도 남들보다 능력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사치하게 행사를 치르곤 하였다. 위 문장은 행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외형에 치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근본적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음을 공자가 말한다. 모든 행사에는 그 본래적 취지가 담겨있다. 좋은 일을 만났기에 축하하거나, 나쁜 일이 발생했기에 위로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이러한 일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실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었다.
공자는 어떤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취지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논어》, 〈이인〉 13장은 “예의 근본인 겸손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있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고 하였다. 예(禮)의 강조는 예의 틀인 예식(禮式)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예를 갖추게 만든 근본적인 정신인 겸손[禮讓]에 대한 집중이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특별한 절기가 되어 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구걸하는 걸 목격한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이나 도움을 주는 이들이 모두 당당한 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도움 주는 이들은 선행에 대한 자부심으로, 도움 받는 이들은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 자부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또 다른 종교발생지에서는 큰 단위 액면의 지폐를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 바꿔 수십 명에게 나누어주면서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고 으쓱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구제한 사람의 수를 기억하여 나중 심판 때에 구제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죄를 감해준다는 교리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저 형식만 따라하는 한심스런 태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2절
한발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남을 돕는 일 자체를 인식하지 말라 하신다. 위 본문 다음에는“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인식 없는 구제를 하라고 한다. 은밀함을 유지 못하는 선행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 CIA 앞마당에는 ‘크립토스(Kryptos)’라 불리는 유명한 조각 작품이 있다. 미국의 CIA는 성서 구절에서 이름을 딴 조각을 앞마당에 세워놓아 자신들의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임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크립토스’라는 단어는 위 성서구절의 ‘은밀하게’의 그리스어이다. ‘숨겨진’ ‘알려지지 않은’ 등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단어이다.
크립토스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단어가 ‘신비동물학(Crypotozoology)’이다. 이는 미확인 동물종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과로서 각종 신화나 경전에 등장하는 신비한 생명체를 연구한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네피림(Giant)이라는 거인이나 요나를 삼켰던 거대한 물고기 등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를 연구하기도 한다.
‘은밀함’이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는 감추어져 알 수 없는 존재나 사건을 꾸며주는 말이다. 신앙적인 구제는 철저히 감추어지거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CIA 앞마당의 크립토스에 새겨진 암호는 아직 다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풀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신앙인의 구제는 영원한 미제(未濟)행위로 남아야 한다.
어딜 가나 끝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리에 앉으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끄는 게 싫기 때문이다. 실은 나의 존재나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현이다. 나의 존재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 속에서 취하는 행동이다.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남기고 싶어 어떤 이는 바위에 이름을 새겨두기도 한다. 자신의 동상을 세워 길이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건물을 세우거나 구제기관이나 복지단체를 설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열심히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이나 구조물이라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기억보관장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기억에 입력이 되면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영원히 잊지 않으신다. 은밀함이란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인의 구제행위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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