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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

by 한종호 2017. 3. 23.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3)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

아모스 2:4-16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신

서구 사상의 양대 뿌리는 그리스 사상인 헬레니즘과 구약성서 사상인 헤브라이즘이라고 말들 합니다. 오랫동안 믿어져왔던 이 주장이 요즘은 더 이상 일반적으로 옳다고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거나 철 지난 주장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두 사상에서 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다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를 신으로 여깁니다.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나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헬레니즘의 신입니다. 이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조화를 유지하면 됩니다.


반면 헤브라이즘, 곧 구약성서의 신은 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는 자연 및 인간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사에 개입하기도 하지요. 이 신은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섭섭할 때는 섭섭해 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냅니다. 헬레니즘의 신과는 달리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위협하고 칭찬하며 위로하고 뭔가를 엄중하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걸 구약성서의 하느님이 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명색이 신인데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다 갖고 있고 그걸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런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냐는 겁니다. 사람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처럼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볼 수 없다는 헬레니즘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거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둘 중 어느 편이든 입증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종류의 얘기는 아닙니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가 지금 여기 와서 저를 설득한다고 해도 저는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견해와 신념을 존중하지만 그에게 설득되어 신에 대한 제 생각과 믿음을 바꾸지는 않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제 얘기를 듣고 도킨스가 설득되지도 않을 겁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게 아니라 모르면서도 믿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느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저런 일은 안 하신다 등등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실제로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모든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의미이지 정말 하느님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점은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 역시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삶에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삶의 고백인 성서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입증할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성서가 그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믿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지금 우리네 삶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과 더 가깝게 살았거나 더 밀접하게 소통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이 봤던 것을 지금 우리가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들이 들었던 걸 지금 우리는 못 듣는 것도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때와 지금 다른 게 있다면 하느님을 인식하는 방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심장’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서는 이를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약간은 추상적인 말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레브’는 잠시도 뛰지 않고 멈추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심장’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 ‘심장’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곧 하느님은 절대불변의 원리나 원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고 소통이 가능하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심장을 갖고 있는 인격으로 인식됐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제목이 ‘예언자의 분노, 하느님의 분노’인데 이는 예언자의 분노가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분노’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하느님의 분노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자의 분노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하느님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정념과 열정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왜 분노하실까?

예언자의 선포에서 하느님의 분노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언자 나훔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내린다. 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 주님께서 진노하실 때에 누가 감히 버틸 수 있으며 주님께서 분노를 터뜨리실 때에 누가 감히 견딜 수 있으랴? 주님의 진노가 불같이 쏟아지면 바위가 주님 앞에서 산산조각 난다(나훔 1:5-6).


하느님이 분노하면 산들이 진동하고 언덕은 녹아내리고 땅은 뒤집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곤두박질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진노할 때 그 앞에 버틸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은유적으로 읽으면 될까요? ‘정말 실제로 산들이 진동하고 땅이 뒤집히겠어?’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포를 한 나훔은 현실을 과장했을까요? 그랬다면 그는 왜 과장했을까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영문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불합리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변덕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하느님의 확고한 믿음 때문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불의가 행해질 때 아파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낙심하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이런 것이며 이것들이 고스란히 예언자의 분노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때론 매우 위험합니다.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악의 경계선에 다가서는 일입니다. 분노는 좋은 것이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악에 굴복할 수 있는 반면 분노를 치솟는 대로 내버려두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잠언 16:32)고 말합니다.


분노의 궁극적인 근원은 무엇일까요? 분노는 근원적으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분노의 반대는 자비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처럼 분노의 반대도 자비가 아니라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분노할 이유도 없습니다. 분노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습니다. 최근에 특검이 요청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첫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적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분노할까요? 저는 만일 이재용 씨가 먼 우주 어딘가에서 값비싼 물건을 발견해서 돈을 벌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富)는 그렇게 쌓인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겁니다. 사람들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착취하고 억압해서 이룩했다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임금을 착취했고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 몰아넣어서 얻어진 재산이기 때문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분노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느님도, 예언자도 이런 불의한 일이 벌어졌기에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 속에서 자비하신 분

예언자 하박국은 하느님은 ‘진노 속에서 자비를 기억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3:2). 시편도 분노와 자비가 서로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시편 77:7-9)


왜 하느님은 분노하실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람 사는 세상에 ‘정의’가 무너졌기 때문에 분노하십니다. 정의는 하느님의 분노를 헤아리는 척도입니다. 불의한 사람에 의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희생당하고 상처 입은 피해자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동정이 분노를 촉발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모스 본문 외에도 예레미야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선언합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예레미야 5:26-29)?


하느님의 진노가 가져올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가 여전히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 그래서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 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느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1-6)


다음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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