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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 1

by 한종호 2017. 4. 4.

예언자는 누구이고 뭘 한 사람인가? (4)


고통 · 자비 · 용서 · 회복(1)

호세아 6:1-6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하느님


지난번에 서구사상의 양대 뿌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습니다. 헬레니즘에서 최고신은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는 존재이고 동시에 불변하는 우주의 원리와 원칙, 그에 따른 조화와 질서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신은 자연세계와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리스어로 ‘아타락시아’(atarax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적과 평화를 어지럽히는 온갖 잡다한 일들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얻는 평정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 철학자 피론과 에피쿠로스가 즐겨 사용한 개념입니다. 이들은 아타락시아 상태에 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고 신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헤브라이즘의 신,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세상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냥 관심 갖는 정도가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분이요 사람과 언약을 맺고 약속을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파트너가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한 분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야훼가 무슨 복을 주랴? 무슨 화를 주랴?”(스바냐 1:12)라고 생각하거나 “야훼는 우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야훼는 이 땅을 버렸다.”(에스겔 8:12) 또는 “야훼는 우리 고생길 따위에는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내 권리 따위는 아는 체도 않는다.”(이사야 40:27)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라고 그런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냉소하지 않았고 이런 사람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인생사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복 줄 사람에게는 복 주고 벌할 사람은 벌하는 분이었던 겁니다. 야훼는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한 분도 아니고 이 땅을 외면하고 팽개쳐버린 분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고생길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와 삶에 눈 감고 계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을 생각할 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파렴치한 사람은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게 뭐가 이상해?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한 사람을 옹서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아?’라고 당당하게 말할 겁니다. 하느님이라면 마땅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정도로 당당하진 않아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시편 노래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시편 103:8-13).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죄를 지어놓고 용서해달라는 게 염치없지만, 또 그게 반복되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이라면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염치 있고 진지한 사람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송구한 일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는 게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용서’가 쉬운 일이 아니고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용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그 어려운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을까?


2015년 1월에 한국에서 ‘크림빵 뺑소니 사건’이란 게 있었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주려고 크림빵을 사갖고 귀가하던 사람을 한 운전자가 차로 치어 죽이고 뺑소니 친 사건입니다. 그는 나중에 자수했고 사망자의 아버지는 운전자가 자수한 그 날 경찰서로 찾아가 그를 위로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화가 나서 자신의 용서를 번복했습니다. 운전자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사건 진술도 진정성 있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가해자를 원망하지 않을 터이니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호소까지 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결론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얘기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걸 보여주는 게 그것입니다. 용서의 전제조건은 가해자가 저지른 잘못을 왜곡, 축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본래대로 복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해의 원상 복구가 불가능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중보기도 시간에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위안부’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겨레 대부분은 일본 정부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으며 적절한 보상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독일 정부의 그것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2차 대전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후손인 빌리 브란트 수상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쟁 중에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습니다. 이것은 참회의 상징적 행위로서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국민화합 차원이라며 광주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일당을 사면해줬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두환 일당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와는 다른 얘기지만 ‘용서’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거기서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유괴당해 살해된 후 기독교에 입문해서 화해와 용서를 배웠고 그래서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용서하러 감방으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기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셨다는 원장의 말을 듣고 졸도해버립니다. 어떻게 피해자(또는 피해자의 어머니)인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맘대로 가해자를 용서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따져야 할 것들


용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지은 죄를 참회하면 용서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은데 용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의 문제들을 따져봐야 하는데 이것 하나하나가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크림빵 뺑소니사고 경우에도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용서의 전제조건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피해자의 부모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유태인 학살의 경우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이 아닙니다. 당사자를 제외한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에게서 상당히 멉니다. 또한 과거에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서 현 정부 책임자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책임이 있는지 문제도 따져봐야 합니다.


‘무엇’을 용서하는가와 ‘왜’ 용서하는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겁니까, 아니면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겁니까?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치에 맞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죄가 혼자 날뛰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죄는 죄인이 짓는데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겁니다. 또한 개인이 죄를 짓는 경우와 집단이 죄를 짓는 경우를 나눠서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개인의 죄와 집단의 죄는 성격도 다르고 용서하는 방법도 다르니 말입니다. 또한 ‘왜’ 용서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용서의 ‘목적’ 말입니다. 용서가 뭔가를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두환을 사면하면서 내세운 ‘국민화합’ 같은 것 말입니다. 이 경우에 용서는 화해 또는 화합의 수단 역할을 한 셈입니다. 진정 용서는 뭔가를 위한 수단인가, 그게 아니라 용서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도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형제가 죄를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곧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용서하라는 말이 490번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임은 모두 아실 겁니다. 문제는, 말은 쉬운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카운터 종업원이 계속해서 돈을 슬쩍 훔쳐가는 것 안다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하겠습니까? 나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무한정 용서하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 해도 그게 바람직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용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라는 데 공감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서도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하는 물음만 빼면 앞에서 용서를 생각할 때 물어야 하는 문제들, 곧 왜 용서하는가, 무엇을 용서하는가, 어떻게 용서하는가, 언제 용서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등을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에서는 모든 게 인간관계에서의 용서보다 더 모호하고 확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용서가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표현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크림빵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를 찾아가서 용서했노라고 말했습니다. 


‘밀양’의 신애도 아들의 유괴살해자를 용서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용서의 경우, 하느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고 그나마 주관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밀양’에서 학원 원장의 경우에서도 자기는 용서받았다고 확신을 갖고 말했지만 신애는 그걸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랬다니까 그렇게 믿었을 뿐이지 그걸 확인할 수단이 없어 부정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모든 정황에 들어맞는 용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얘기하고 오늘 얘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용서’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성서에서 이 주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약성서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구약성서에서도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주제인데 그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성서는 개인의 죄와 그 용서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지은 죄와 그것의 용서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개인의 죄에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주된 관심은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죄와 그 용서에 놓여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왕과 귀족,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지은 죄를 꾸중하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도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그들이 백성 전체를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구약성서는 대부분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의 용서를 말합니다. 곧 ‘조건적 용서’입니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곧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서를 ‘표면적’으로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대부분 ‘조건적 용서’를 말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깊이’ 읽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조건적 용서를 말하는 구약성서 구절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무조건적 용서’가 떠오릅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는 용서, 충족해야 할 조건이 없는 용서, 곧 무조건적 용서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가 이 무조건적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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