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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37)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마르케스가 쓴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것은 무엇일까?

 

어서 오지 않는다고
내가 힘들어하는
작은 것은 무엇일까?

 

ㅡ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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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79)

 

 

한 글자로 된 우리말을 풀어낸 <한 글자 사전>,


어떤 책인가 싶어 아무렇게나 책장을 펼쳤을 때,

대번 들어온 표제어가 ‘빈’이었다.

 

 


단 한 줄, 나머지는 비어 있었다.


비어있는 여백 자체가 ‘빈’을 말하고 있었다.

책에서는 ‘빈’을 이렇게 풀고 있었다.


‘휑하지만 않다면 가장 좋은 상태’

 

휑하지만 '않다면'을 빼도 좋을, 빈!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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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38)

 

동네서점

 

처음으로 참석한 정릉2동 복지혐의체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가는 걸 나는 마주보이는 책방을 찾아갔다. 동네 한 구석, 서점이 있는 것이 반가웠다. 몇 번 차를 타고 오가며 보아둔 서점이었다. 동네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서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불이 켜져 있는 서점 안에는 여주인 밖에는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 책 구경을 했다. 마침 낮에 종로서적을 들러 봐둔 책이 있었다. <나는 그냥 버스 기사입니다>라는 책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컴퓨터로 검색을 한다.


“여기 와서 찾아볼래요?”


책이 있다고는 뜨는데,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책을 찾다가 <한 글자 사전>이라는 책을 보았다. 우리말 중 한 글자로 된 낱말만을 골라 풀이한 책이다.


“오늘은 이 책을 사고, 아까 그 책은 찾아두면 다음에 와서 사지요.”

 

 


 

책을 찾는 시간이 길어져 그렇게 말했을 때, 주인이 씩 웃으며 책을 골라 뺀다. 때마침 책을 찾은 것이다. 책 두 권을 정가대로 산다. 카드 대신 오만 원 권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는다. 그게 별 일일까만, 내 깐에는 작은 위로와 응원이다.


봉투를 사양한 채 책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서점 입구에 세워둔 문구가 눈에 띈다.


‘Reading 정릉 Leading 정릉’


서점 주인은 누구도 모를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간판, 삼미여관 후문이었다.
정릉 내부순환도로 아래 삼미여관 후문 께엔 대원서점이 있다.

정릉을 읽고 싶고, 정릉을 이끌고 싶은.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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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34)

 

손수 심으신

 

‘주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들’


정릉교회 제단에 걸려 있는 교회 표어이다.

 

 

문득 표어를 보며 눈물겨울 때가 있다.


우리가 하찮은 존재라 여겨질 때,
버려진 존재라 생각될 때,
모두에게 잊힌 존재다 싶을 때,


그게 아니라고,
여전히 거룩하신 분의 눈길과 손길이 닿고 있다고
짤막한 한 문장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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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35)

 

누군가 악보를 읽어


‘페친’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다.
SNS에 서툰 내게는 ‘폐를 끼치는 친구’라는 느낌도 있었던, 낯선 말이었다.
우연히 페친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


미국에 사는 분인데, 2015년 일리노이 어느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라 했다.
마른 수초가 호수에 비친 모습이겠다 싶다.

 

 

그런데 사진을 보며 대번 수초라 말하는 것은 도무지 도리가 아니다 싶다.

이응로 화백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을, 자연이 그려낸 추상화다.

놀라운 연주이기도 하다.


시간과 바람을 저보다 잘 표현한 악보가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 마음으로 악보를 읽을 사람이 있어
피아노를 치거나 교향곡으로 연주한다면
세상은 깊은 고요 속에 잠기리라.
사방 눈 내리듯 하늘 평화 임하리라.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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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0)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0 주여 나는 아니지요? -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장면이 바뀌고 유월절 성찬이 준비 되고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그려진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피투성이가 된 마음도 유월절 성찬 앞에서 차분하게 바뀌며 거룩한 분위기가 다시금 감돕니다.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이 부분을 노래하는 에반겔리스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내러티브를 노래하느냐가 아니라 두 장면 사이에 놓인 침묵을 어떻게 노래하느냐 입니다. 지휘자는 이 부분에서 에반겔리스트와 오르간 콘티누오에게 큐 사인을 주기 전에 침묵을 연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음반 녹음으로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의 아쉬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곡을 트랙별로 쪼개어 음반에 실어야하기 때문에 곡과 곡 사이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곡과 곡 사이에 있는 침묵의 순간을 지휘자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들을 수 없지요. 마태수난곡에서는 소리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침묵을 음악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베이스 콘티누오처럼 계속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마태수난곡을 직접 듣거나 공연실황을 담은 동영상을 볼 때 이 침묵의 순간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색다르고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수난곡 113~16

마태복음 26:17~22

 음악듣기 : https://youtu.be/GKyWzMfuFjg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7. Aber am ersten Tage der süßen Brot traten die Jünger zu Jesu und sprachen zu ihm:

17.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대사

제자들(합창)

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8. Er sprach:

18.이르시되

대사

예수

Gehet hin in die Stadt zu einem, und sprecht zu ihm: Der Meister läßt dir sagen: Meine Zeit ist hie, ich will bei dir die Ostern halten mit meinen Jüngern.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9. Und die Jünger taten, wie ihnen Jesus befohlen hatte, und bereiteten das Osterlamm. 20. Und am Abend satzte er sich zu Tische mit den Zwölfen. 21. Und da sie aßen, sprach er:

 

19.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euch: 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2. Und sie wurden sehr betrübt, und huben an, ein jeglicher unter ihnen, und sagten zu ihm: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대사

제자들(합창)

Herr, bin ich's?

주여 나는 아니지요?

코멘트

코랄(합창)

Ich bin's, ich sollte büßen,

An Händen und an Füßen

Gebunden in der Höll'!

Die Geißeln und die Banden,

Und was du ausgestanden,

Das hat verdienet meine Seel'.

그 사람은 바로 나,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지옥에서 손발을 묶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채찍질과 멍에

당신께서 당하신 그 모든 것은

내 영혼이 짊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찬과 유월절 어린양

 

제자들이 예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라고 묻는 합창은 영어의 ‘where/어디서에 해당하는 의문사 ‘wo’를 세 번 반복하면서 거룩하고 정성스럽게 성찬을 준비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관악기들이 하나의 소리로 아르페지오를 그려가며 부드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단순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임에도 이 합창은 음악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바흐는 왜 이 부분에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요? 그 비밀은 독일어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내러티브와 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말 개역개정 성경은 헬라어 원문에 맞게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이라고 번역했지만 루터가 번역한 바흐 시대의 성경은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어린양을 잡수실 것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어린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루터에 의해서 추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바흐는 단순히 먹을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음악을 입힌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의 첫 달인 니산월 열흘날에 새끼 양을 취하여 간직하고 있다가 열나흗날 해 질 때 양을 잡아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은 불에 구워 쓴나물,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손질된 고기를 사는 것은 쉬어도 살아 있을 때 함께 지낸 생명을 죽이고 먹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양을 사흘 동안 집에 두는 이유는 생명과 피의 희생이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인가를 깊이 새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먼저 떠올리지만 성찬에서 유월절 양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병행구절에는 무교절 첫날다음에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마가복음 1412)

 

루터는 아마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마태복음을 번역할 때, ‘유월절 양/das Osterlamm’이라는 표현을 추가했고, 바흐 역시 그 표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우리말 성경으로 읽었을 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 부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적 표현을 정성스레 덧입힌 것입니다.

 

분명, 그날 최후의 만찬 자리에는 빵과 포도주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을 비롯한 몇몇 그림들은 성찬의 식탁에 빵과 포도주만 놓여 있습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강조하기 위한 배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고 빵은 양의 고기를, 포도주는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가 되어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성찬, 온 마음과 온 몸에 되새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최근 교계 여기저기에서 예전적인 성찬식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예전과 성찬을 구교의 폐습으로 여겼던 교회가 변해가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지만 이것이 유행처럼 지나가거나 영적 허영이나 또 다른 형식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연회의 한 행사에서 열린 성찬에 참석하신 한 분이 빵을 받을 때 오른 손과 왼손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성찬 집례목사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고 뒷줄로 다시 돌아갔다며 뭐가 잘못된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잘못된 것은 그 목사님이며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으로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찬은 형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기억하는 성찬으로 인해 유월절 전통의 율법적 형식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찬이 또 다른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모든 행위를 통해 우리를 살리신 예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씻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나누고 쉬는 행위를 통해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했던 아름답고 소중했던 기억들을 소환하여 정성스레 되새기는 것이 성찬입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유월절 성찬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최후의 만찬, 첫 성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담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합창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묻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자리 한쪽 벽에 그려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 속에서 제자들의 합창 소리가 들러오는 듯합니다.

 

 

 

 

자기의 일인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예수께 묻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자들의 자리에 있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리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하기에 이리 저리 흔들리느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할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여 몹시 근심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예수께 고백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코랄에 참된 신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센스 있는 지휘자라면 제자들의 합창이 끝난 뒤 긴 텀을 두지 않고 바로 코랄을 시작할 것입니다. 첫 시간에 코랄은 주님의 수난의 장면을 바라보는 극 밖의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코멘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아니지요?’라고 떠들어 대는 제자들을 본 신자들은 제자들에 대한 답답함과, 예수에 대한 애련함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코랄을 통해 갑자기 터져 나오듯 표출되는 것이지요.

 

참된 신자라면 이 코랄의 가사처럼 주님을 판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bin ich es/나는 아니지요?’ ‘Ich bin es/나 입니다!’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작해야 단어 위치 하나 바뀌는 쉬운 일 같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요하고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며, 말로 그렇게 고백했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과 십자를 깨닫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죄인 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존재의 근원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죄 없는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한 마디 변명 없이 다 받으셨건만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명백한 죄마저 부인하고, 잘못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만큼은 하지 않으려했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는데, 말 하지 않으려했으면 끝까지 안하면 된다.” “마지막 말은 하지마라! 안고 살아라! 주님을 통해 풀어라! 그게 신앙인이다

 

세상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발뺌을 하고 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진정 회개하고 시인하는 것이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죄에 따른 징벌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죄 값을 대신 지신 예수님과 자비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척, 거룩한 척 하지 마십시오. 진짜로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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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금요심야기도회, 교우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는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마침 필리핀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이기도 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것보다도, 앙드레 말로가 20세기의 프랑스 작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는 것보다도, 장 지오노라는 이름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한 작품만으로도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싶다.


장 지오노는 1895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워낙 집이 가난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17살 때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5년 동안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이 모두 ‘나무를 심은 사람’에 녹아 있다. 평소 지오노는 자신의 작품이 설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나무를 심은 사람’은 설교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영화를 본 뒤에 몇 가지 생각을 나눴다.


-제목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지만, 실제로 심은 것은 도토리다. 집을 그리라 하면 대개가 지붕부터 그리지만, 집은 터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씨앗부터 심어야 한다.


-아무 것이나 심으면 안 된다. 좋은 도토리를 골라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나무가 선다. 좋은 씨를 고르기 위해서는 나쁜 씨를 가려내야 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말을 잊는다.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때로는 말로 씨앗을 대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내 땅 남의 땅을 가리지 않는다. 셈을 버린다. 황량한 땅, 버려진 땅이 있다면 그곳이 나무를 심을 곳이다.


-모래바람이 불던 황량한 땅을 계곡물이 흐르는 녹색의 숲으로 변하게 한 것은 씨앗을 심은 한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의 갈채를 기대하지 않았다. 씨를 심되 나머지를 잊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말했다. “주님은 내가 전에 없었던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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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늘 앉는 책상 위 모니터 앞에는 서너 개 소품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딸이 선물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 있다.


“Some people make the world more special just by being in it.”


‘어떤 이들은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더욱 특별한 곳으로 만든다.’는 뜻이겠다.



 

맞다, 둘러보면 그런 이들이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이들이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추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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