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54)

 

브엘라해로이

 

주님의 천사가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은 수르로 가는 길옆에 있다. 천사가 물었다. “사래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갈이 대답하였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족과 대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어서 불렀다.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창세기 16:7-14)

 

하갈은 한 번도 자기 운명의 주체인 적이 없었다. 이집트인인 그가 어떻게 하여 사래의 몸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가난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예와 같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는 종속된 존재일 뿐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기 못했다. 사래는 하갈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아브람에게 말했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하시니, 당신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서, 집안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창세기 16:2)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랐다. 하갈이 잉태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성경은 하갈이 사래를 깔보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까? 사래의 자격지심이 빚은 오해일까? 마음에 멍이 든 사래는 아브람조차 원망스럽다. 아브람은 그런 사래의 마음을 달래려고 당신에게 속한 사람이니 당신 뜻대로 하라고 말한다. 

 

복의 매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행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한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사래의 집에서 도망친다. 그러나 임신한 여인이 그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그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또한 땅에서 벌어지는 일과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파스칼의 말처럼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원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산스런 삶에 동행하시며 희망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천사는 하갈에게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라 이른다. 억울하고 아파도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갈의 태중에 잉태된 아이는 들나귀처럼 든든한 사람이 되어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주어진다. 그 약속은 하갈의 어둔 마음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 어둠이 물러가자 삶의 용기 또한 돌아왔다. 하갈은 기뻐하며 말한다.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그리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어서 불렀다.”(창세기 16:13) 놀랍지 않은가?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부른 첫 사람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억울하다는 말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말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맡기라는 말이 아니다. 노예 도덕을 강화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를 잡아당기는 절망의 심연은 힘을 쓰지 못한다. 하갈의 마음에 기둥 하나가 든든하게 섰다. 그는 하나님과 만났던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이름 지었다.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이라는 뜻이다. 삶이 아무리 곤고해도 그 샘을 떠올리는 순간 희망이 가슴에 유입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 어느 샘가를 서성거리고 있는가?

 

*기도*

 

하나님, 하갈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는 이들, 존엄한 인격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받는 이들 말입니다. 갑질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갈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그런 이들의 처지를 모른 척하지 않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 곁에 있는 ‘하갈들’의 억눌린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해주시고, 그들의 가슴에 한이 누적되지 않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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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3)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서 8:31)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 무거움을 주체할 길 없을 때 마음은 무너지고 만다. 당당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은 슬그머니 잦아들고 버티고 견뎌야 할 시간이 우리를 짓누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마음을 압도할 때면 만사가 부질없어진다. 즐겨 듣던 음악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음 나눌 벗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선뜻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도 못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정처를 잃어버린 마음이 평정을 되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언제나 당당하고 씩씩해 보이는 사람도 더러는 이런 영혼의 병을 앓곤 한다. 다만 그가 겪는 어둠의 시간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바울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을까? 바울은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법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선을 행하기를 바라지만 번번이 악에 기우는 자기 마음 때문에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죄의 법이 확고하게 자기를 사로잡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는 구원을 갈망했다. 영혼의 어둔 밤이 지나고 은총의 새벽이 밝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은총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음을 알았을 때 말할 수 없는 영적 자유가 찾아왔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 없었다. 아무리 크게 넘어져도 은총 바깥으로 넘어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약함을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은총의 세계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이 결국은 ‘선’으로 귀결된다고 고백한다. 실패의 쓰라림도, 고난의 아픔도 구원이라는 보화를 빚는데 사용된다. 세상에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쭈뼛거리며 살 것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바울은 확고한 믿음을 품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서 8:31) 백범 김구 선생은 이 놀라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두려움과 절망감이 밀려올 때 이 말씀은 그의 내면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속해야 한다. 나 좋을 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만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투신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번번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 겪는 것으로 족하다지만, 괴로움은 다음 날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멍이 든 가슴은 조그마한 자극에도 비명부터 질러댑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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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2)

 

책꽂이를 구입한 이유

 

중고서적을 판매하는 알라딘 서점에 들렀다. 딸 소리가 찾는 책이 있다하기에 겸사겸사 같이 찾았다. 버스를 한 번만 타면 되는 가까운 곳에 중고서점이 있다는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처음 찾는 곳이었는데, 서점에서는 중고서적은 물론 중고 음반과 문구류 등을 함께 팔고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다가 그레고리안 찬가를 담은 음반 2장과 책 몇 권을 골랐다. 저렴한 가격이 착하게 느껴졌다. 폐기처분되지 않고 다시 나누어지는 것이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서점 안을 둘러보다가 만난 물건 중에는 책꽂이도 있었다. 삼나무로 만들었다는데, 지극히 심플한 구조였다. 바닥면 한 쪽 아래에 턱을 괸, 그것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그 약간의 경사로 인해 굳이 양쪽을 다 막지 않아도 책이 넘어지지 않았다.

 

 

 


차지하는 공간도 적어 책상에 두고 쓰면 좋겠다 싶어 사려고 하니 그 책꽂이는 전시된 것 외에는 다른 물건이 남아 있지 않다고, 전시되어 있던 것도 괜찮다면 팔 수 있다고 했다.


흔쾌한 마음으로 구입을 했다. 책꽂이에 손때가 얼마나 묻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손때가 묻었으면 어떤가. 오히려 그 손때로 인하여 책꽂이로 사용된 삼나무가 한결 부드럽게 느껴진다 싶었다.


값이 크게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실은 책꽂이를 산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저 단순한 구조 속에 절묘한 이치를 담아낸 누군가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책을 가까이에 두려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작품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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