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0)

 

씨앗과 같은 말
   

 

마음에 떨어져 씨앗처럼 남은 말들이 있다. 동네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느꼈으면 싶어 논농사를 시작하던 해, 논에 물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를 병철 씨에게 물었을 때였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농사꾼은 꿈속에서도 물이 마르면 안 돼요.”

 

 

 

 

 

마을 사람들이 거반 다 나와 강가 너른 밭에서 일하던 날이었다. 아예 솥을 가지고 나와 강둑에서 밥을 짓는 김영옥 집사님께 일일이 짐을 다 옮겨야 했으니 고생이 많았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예전에는 물이 맑아 강물을 길어 밥을 지었는데 이젠 어림도 없게 되었다며 툭 한 마디를 했다.


“다 씨어(씻어) 먹어두, 물은 못 씨어 먹는 법인데유.”

 

꿈속에서도 물이 마르면 안 된다는, 어떤 것이든 물로 씻으면 되지만 물이 더러워지면 씻을 게 없다는, 흙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려준, 씨앗과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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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데 왜 잔이 넘칠까?

 

독자적인 몇 개의 낱말들이 서로 모여 구(句 phrase)나 절(節 clause)을 형성할 때 각 개별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결합된 낱말들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뜻을 우리는 숙어(熟語) 혹은 관용구(慣用句)라고 한다. 이러한 특수 표현의 형성은 언어마다 다르다. 같은 언어라고 하더라도 시대마다 다를 수도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뜻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용적 표현이 축자(逐字) 번역이 될 때에는 그 의미를 옮기지는 못한다. 한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대한 의미론적 연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특유의 표현들은 번역된 성서 중에서 직역의 경향을 보이는 KJV나 《개역》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다/붓다

to anoint one’s head with oil

dishanta bashemen roshi

 

이것은 시편 23편 5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표현 dishanta bashemen roshi의 축자 번역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하고 오해를 유발하는 표현이기도 한다. 어렵다는 것은 “기름을 머리에 바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발을 보호하거나 모발 전체의 모양을 일정한 형태로 유지하려 할 때, 혹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다듬으려고 할 때 동백기름을 바르거나 포마드나, 헤어크림, 헤어로션, 헤어스프레이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식탁에 시인을 초청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정발 문화와는 다른 것 같다. 또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데 왜 그것과는 무관한 잔이 넘친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표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개역》 시 23:5).

 

이 표현이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란 말은 무엇인가? 성경을 오래 읽어오거나 공부해 온 이들은 어디선가 이미 “머리에 기름 붓는다”는 표현을 들어서 알고 있다. 제사장이 정결 예식에 참예한 이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고(natan) 그를 위해 속죄한다.(예레미야 14:18, 29).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yatsaq) 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삼는다(사무엘상 10:1). 예언자가 한 장군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yatsaq) 그를 왕으로 선포한다(열왕기하 9;3). 그리스말로 ‘그리스도’라고 하고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하는 이 칭호의 본래의 뜻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 ‘마샤크’(mashakh)라는 동사에서 ‘메시아’(Messiah)란 말이 나온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칭호는 왕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다니엘 9:25, 26). 그래서 시편 23편 5절을 다윗이 왕이 될 때의 기쁨을 말한 것으로 오해한다는 말이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기름을 바르다”는 말은 ‘메시아’와 관련된 ‘마샤크’(mashakh)가 아니라 ‘다샨’(dashan)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동사다.

 

“아무개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다/붓다”(to anoint one’s head with oil)라는 표현은 현대의 여러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개를 극진한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표현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과 《새번역》 은 문제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직역과 의역 두 가지를 동시에 본문 안에 넣는 이런 이중번역(二重飜譯)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어도 이미 잘 알려진 본문의 경우에는 번역 과도기에서 잠시 허용될 수 있다.

 

영어 번역 역사에서도 초창기에는 축자적 번역을 하다가 독자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새로운 번역들은 의미 번역을 택한다.

 

Thou preparest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ine enemies: thou anointest my head with oil my cup runneth over.(KJV Ps 23:5)

 

영어 번역에 있어서도 이렇게 축자적으로 이루어진 번역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본문과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뜻으로 읽도록 오해를 유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어 현대어 번역은 문제가 되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You prepare a banquet for me, where all my enemies can see me;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and fill my cup to the brim.(TEV Ps 23:5)

 

누가복음 7장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본다.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가셨을 때, 시몬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드리지 않아, 예수께서 그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누가복음 7:46)라고 하시면서. 시몬을 나무라신 적이 있다. 이때의 영어 번역은(NIV)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이다. 이것도 히브리어의 축자적 번역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때 물을 주어서 맨발로, 혹은 샌들을 신고 다닌 발을 씻고서 집안에 들어오게 하거나 환영의 표시로 머리에 귀한 기름을 발라주거나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 누가복음 7장 46절에서도 “너는 나를 환영하지도 아니하였으되…/ You dis not welcome me.”(누가복음 7:46)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 표현 “아무개의 머리에 기름을 붓다/바르다”라는 말은 “아무개를 극진한 손님으로 맞아들인다”는 뜻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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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9)

 

                                     그냥 
                 

  후둑후둑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오래된 흙집 흙벽 떨어지듯 견고하다 싶었던 마음이 허물어질 때가 있다. 태연하던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어디에도 뿌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미동도 없이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손을 휘저어도 무엇 하나 잡히는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어떤 것도 마음에 닿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일도, 음악도, 책도, 커피도, 세상 풍경도, 전해지는 이야기도,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뒷걸음을 친다. 한 순간 내가 낯설고 세상이 낯설다. 모래알 구르듯 시간이 지나가고, 어둠이 깊도록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향방이 사라진다.


그럴 때면 발버둥을 치지 않는다. 고함을 지르지도, 안간힘을 쓰지도 않는다. 미끄러지듯 스미듯 무중력의 물컹한 시간에 나를 맡긴다. 유빙처럼 어디에 닿을지를 알지 못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떠받칠, 나보다 깊은 내부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럴 뿐이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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