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9)

 

 

뿔 솟은 모세?

 

 

로마에 있는 일명 쇠사슬교회라 불리는 산 피에트르 인빈콜리 성당 안에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상이 있다. 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고 왼쪽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다. 힘줄이 튀어나온 팔과 다리의 근육, 긴 수염에 곱슬머리. 그런데 머리에 뿔 두 개가 솟아 잇는 것이 처음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뿔 솟은 모세>다. 조각가가 모세의 머리에 뿔을 조각해 넣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의 출애굽기 34장 29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들 설명한다.

 

 

 

 

우리말 번역의 <개역>,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은 모세가 증거판 돌을 가지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개역),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개역개정),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되었다”(공동번역)라고 번역하엿다. 그러나 불가탁역에는 모세의 얼굴에 “뿔이 솟았다”라고 하였다.

 

히브리어 명사 ‘케렌’(뿔)에서 나온 동사의 뜻은 “광채가 나다”(출애굽기 34:29), “뿔이 솟다”(시편 69:32)인데, 불가탁역은 “광채가 나다”로 번역해야 할 곳에서 “뿔이 솟다”로 번역한 것이다. 같은 식의 오역은 영어흠정역 하박국 3장 4절에서도 볼 수 있다. 야훼의 손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뿔이 났다”고 번역하였다.

 

“뿔이 솟다, 뿔이 나다, 뿔이 자라다”라는 말마저도 그렇게 쉬운 말은 아니다. 뿔이 동물의 머리나 얼굴에 딱딱하게 튀어나온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말이나 히브리어나 같다. 그러나 동사로 쓰여 “뿔이 나다” 혹은 “뿔이 솟다”는 우리말은 화를 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말에서 “뿔나다”는 곧 “화가 나다”, “골이 나다”를 뜻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뿔은 힘과 존엄을 상징하기 때문에 “야훼께서 아무개의 뿔을 높이신다”거나 아무개의 “뿔이 높아지다”, “뿔이 높이 들리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말의 “뿔나다”와는 뜻이 전혀 다르다.

 

히브리어의 뜻은 차라리 뿔 달린 짐승이 약한 짐승을 성공적으로 제압하고 난 뒤에 머리를 높이 쳐들고 제 힘을 과시하는 가시적 모습에 가깝다. “높음” 혹은 “정상” 등괴도 관련된다.

 

“뿔”은 구약에서 자식들을 보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헤만에게 자식들 곧 아들 열 넷과 딸 셋을 허락하신다. 이것은 헤만의 뿔을 높이 들어 주시겠다던 약속의 성취였다(역대상 25:5). 한나가 사무엘을 낳아 하나님께 바치면서 드린 기도에서 야훼 때문에 자기의 뿔이 높아졌다고(사무엘상 2:1) 고백한다. 이것은 돌계집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난 기쁨, 자식을 얻은 기쁨, 이제는 떳떳이 얼굴을 들 수 있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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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0)

 

나는 누구일까?
   

큰 딸 소리가 다시 독일로 돌아갈 날이 가까이 오면서 함께 연극을 보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 싶다. 정릉에서 대학로는 버스 한 번만 타면 되는 가까운 거리,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내와 소리가 정한 연극이 <12인의 성난 사람들>, 나는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요즘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했던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좌석이 매진이었고, 좌석을 따로 지정하지를 않아 줄을 선 순서대로 입장을 해야 했다.

 

 

 


무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단순했다. 평범한 의자들이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고, 공사장에서 쓰는 듯한 둥근 쇠파이프가 울타리처럼 둘러쳐 있었다. 설치된 무대만 봐서는 연극이 무척 단조롭거나 지루할 것처럼 여겨졌다.


연극의 상황은 단순했고 명확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한 소년이 법정에 서게 되는데 모든 정황과 증거가 소년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법정 최고형인 사형 판결까지 남아 있는 절차는 하나, 배심원 12명의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모두가 유죄라 생각했기에 그것마저 쉽게 결정이 되려는가 싶을 때 무죄라 손을 든 한 사람이 있었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상황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배심원들이 요구받은 것은 만장일치, 11명이 나서서 한 명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너무도 일방적으로 보이는 11:1, 그런 상황설정이 흥미로웠고 흡인력이 있었다.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짐작과는 달리 110분이라는 시간이 잠깐인 듯 지나갔다. 주제도 주제지만 연극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배우들이 배우 같지 않았다. 배우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배우라기보다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일상이었다. 연극에 등장하는 열두 명의 인물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축소판이었다. 배우들 한 명 한 명의 캐릭터가 드러날 때마다 겹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배우는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는지, 편견은 얼마나 거칠게 현실을 왜곡하는지, 그래서 맹목적인 확신으로 자리를 잡는지, 편견과 왜곡이 집단화 될 때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해지며 용감해지는지, 애정이나 책임이 없는 논리와 주장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했다. 말도 행동도 거칠기 그지없는 한 배우가 함부로 코를 풀고 사방 무대 위에 어지럽게 내버린 휴지조각처럼 공연 내내 온갖 주장과 갈등이 난무하지만 연극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당신은 12명 중 누구냐고, 누가 당신이냐고 말이다. 

 

연극을 보고 나와 음식점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대화는 오래 이어졌다. 과연 나는 누구인지, 누가 나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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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5월의 능선에서

 

 

우리에게 5월은 유난히 격동의 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필 5월인가 싶은 질문을 굳이 던져본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그런 계절의 지점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이 때를 그냥 보내면 여름이 다가오고, 그러다보면 무언가 계기를 잡아내기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5월은 그런 점에서 어떤 고비를 힘겹게 넘어서는 경계선에 있는 듯 하다.

이런 느낌은 달리 말하자면, 초조감과 통한다. 이후의 시간은 너무나 쏜살같이 흘러서 그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연말의 지점에 자신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건 당혹스러운 일이다. 마땅한 결실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그렇게 되어버린다면 또다시 새롭게 오는 일년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 년의 이 시점에 이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압박감을 경험하게 되는 모양이다. 날씨도 좋고 자연도 아름답고 바람도 맑고 흙냄새도 풋풋하다. 그렇게 계절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면, 아차 하는 사이에 5월도 지난 달력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5월의 향기에 취하는 것이 실수는 아니다. 도리어, 그걸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 실수가 아닐까.

 

 



빠르게 다가오는 시간을 의식하는 일에 신경을 집중시키면 준비에 철저할 듯 하다. 하지만 그건 그 계절마다 우리 안에 마련되어야 할 바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다급함과 초조감으로 이루어낸 일들이 올바로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우격다짐이 되거나 두루두루 살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해가 시작된 1월에 품어야 할 마음이 따로 있고, 얼었던 강이 풀리는 3월에 먹어야 할 마음이 있다.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4월에 떠올려야 하는 생각이 있고, 신록(新綠)의 풍경이 산하(山河)를 물들여가는 때에 갖추어야 할 성찰의 내용이 있다. 다짐이 필요한 때가 있고, 반성이 요구되는 시간이 있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신선하게 자극시켜야할 시각이 있는 법이다.

아무 상념 없이 하늘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여유가 절실한 경우가 있고, 가파른 언덕을 정신없이 달려 올라가야 할 순간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때 마다의 개성과 요구, 그리고 적절한 마음가짐에 눈을 돌리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당장 닥친 일에 허겁지겁 몰두하는 하루살이 인생이 될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길러지는 내공이 없어 그걸 발휘해야 할 때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린 불필요하게 초조해지고 마는 것이다. 결국 실패하고 말 격동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만다. 다 허무해지는 첩경이다. 자신을 낭비하는 길이다. 계절마다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지혜가 있는 자는, 인생의 그 어느 순간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하루가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될 것이다.

5월의 능선에, 저 멀리 정상을 바라보며 이제 가야할 거리만 정확히 측정하려는 바보가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고, 맑은 물소리를 듣는 지혜가 깊어졌으면 한다. 그런 이가 아름답게 성공할 것이다.

 

김민웅/목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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