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4)

 

‘우리 모두’와 ‘저와 여러분’

 

 

언젠가 몇 몇 목회자들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였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이 흔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즐겁고 유익하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아들 목사를 둔 원로 목사님이 당신이 들은 아들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설교 중에 ‘우리 모두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은 좋다고 여겨져요.”

 

설교자가 설교 중에 사용하는 용어, 특히 인칭대명사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설교자가 갖는 태도나 마음가짐을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모두’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회중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이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아니고, ‘저와 여러분에게’이다. ‘저’가 먼저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우선한다. 그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태도에서 비롯된 표현일 것이다. 왜 굳이 같은 말씀 앞에서 ‘저’와 ‘여러분’을 나누는 것일까, 설교자는 자신도 모르게, 혹은 회중이 모르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충분히 공감한다. 말 한 마디에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담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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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69)

 

예언자 오뎃

 

사마리아에 오뎃이라고 하는 주님의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하러 나가서,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주 당신들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붙이신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녀들까지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고 있소. 당신들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당신들은 이제 내가 하는 말을 들으시오. 당신들이 잡아 온 이 포로들은 바로 당신들의 형제자매이니, 곧 풀어 주어 돌아가게 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당신들을 벌하실 것이오.”(역대하 28:9-11)

 

스무 살에 유다 왕이 된 아하스는 열여섯 해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다. 그의 통치를 역대지 기자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는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는 풍요와 다산을 보장해준다는 바알을 섬겼고,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나라 사람들이 섬겼던 신들에게 절을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하나님께서 보호를 철회하자마자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다. 약탈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도 많았다. 포로가 된 이들의 미래는 어둠 그 자체였다. 희망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희망은 늘 예기치 않은 곳에서 피어난다.

 

이스라엘에는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뎃’이라는 예언자였다. 그는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맞이하러 나가서 준엄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도록 허락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행태는 도를 넘었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살육하고,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녀들까지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고 있소. 당신들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역대하28:9b-10).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이들에게 오뎃은 찬물을 끼얹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 30장에서 인간 세상에서 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고 시인한다. 그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전쟁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고(故)로 선자(善者)는 과이이(果而已)요 불감이취강(不敢以取强)이라.” ‘목적을 겨우 이룰 따름이요 감히 강함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패전한 나라에 대해서 지나치게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하고, 또 스스로 강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뎃은 이스라엘 군대가 부르는 승전가 속에 깃든 오만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군대 지휘관들에게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고 말한다. 오뎃은 그들이 포로이기 이전에 언약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징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추상과 같은 오뎃의 가르침에 에브라임의 지도자 네 사람이 깊이 공감하고 군대를 막아섰다. 자칫하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군인들은 포로와 전리품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넘겼고, 에브라임의 네 지도자는 전리품을 풀어 헐벗은 이는 입히고, 맨발로 끌려온 이들에게는 신을 신기고, 음식을 나눠주고, 상처 입은 이들은 치료해주고, 환자들은 나귀에 태워 돌려보내주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 시대에 벌어진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모든 일은 눈 밝은 사람 하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적 양심에 따라 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 또한 많지 않습니다. 모처럼의 승전을 기뻐하며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군대를 막아서는 것, 그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불의를 보면서도 비겁한 침묵 속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낼 눈을 열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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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3)

 

폭력 혹은 무례

 

 

정릉에 와서 당황스러웠던 것이 있다. 설교를 하고 나면 설교 영상이 곧바로 페이스북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먼젓번 교회에서도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려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오랫동안 거절하다가 음성만을 올리는 것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자마자 SNS에 오르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게 관례였다니 받아들이기는 받아들였지만 불편한 마음은 적지 않았다. 우선은 조금씩 조정을 했다. 주일1,2부 설교 모두를 올리던 것을 하나만 올리기로 하고, 안 하던 페이스북에도 가입을 했다. 혹 누군가의 반응이나 의견이 있다면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겠다 싶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 아예 홈페이지를 바꾸기로 했다. 운영비를 줄이느라 교회 홈페이지를 페이스북과 연동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참에 분리시키기로 했다. 홈페이지가 새로 개설이 되면 어디 한 구석 설교 듣기를 원하는 이들만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

 

 

 


어제는 여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강원도 귀래를 다녀왔다. 선교후원을 하는 동역교회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작지만 단아하게 바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점심 식사를 할 때였다.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았는데, 홀 안에는 단체식사를 하는 우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 3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기도를 하기 전 그들을 찾아가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괜찮다고 했고, 나는 나대로 기도를 하는 중에 식사를 계속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찌 내 설교를 모든 사람 앞에 양해나 허락도 없이 내놓는단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씨를 뿌리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내게 폭력이나 무례에 가깝다. 믿음이 없다 나무란다 하여도 내게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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